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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내 Dec 13. 2021

100년의 기록(2)

버나드 루이스의 삶과 중동 역사

<오스만 제국의 기록보관소>

내가 영국인 최초로 중동의 역사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교수라는 점은 

당시에는 실감하지 못했지만 극히 행운이었다.
 당시 아랍어를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적었다. 


 영국을 통틀어 100명 이하였으며 

그들 중에서 아랍 역사 전반을 이해할 수 있는 학자는 거의 없었다. 


 전쟁 후 아랍세계가 미국과 소련의 우방국 확보를 위한 경쟁 지역이었고, 

대다수 아랍 국가들은 소련을 선호했는데 

이는 패권으로 부상하던 미국과 서양의 강대국들에게는 심각한 과제였다. 


1946년 8월 초, 나는 아주 기분 좋은 편지 한 통을 받았다. 
 유명한 모리스 포위크 경이 보낸 편지로 중동관련 원고를 청탁하는 내용이 었다. 
 

책을 집필하는 데 3개월이 걸렸다. 
 그러나 종전 이후의 출판 작업은 느리고 복잡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책은 1950년이 되어서야 세상에 나왔다.


 그 책의 사실상의 기획자인 깁 선생과 모리스 경은 상당한 만족감을 표했다. 
 영국의 여러 일간지와 주간지에 서평이 실렸고 

아랍세계에서도 우호적인 평가를 받았다.


1949년 가을, 서른 셋의 나이에 정교수가 되었다. 
 그리고 런던대학교에 새로 개설된 중근동 역사학 주임교수에 임명되었다. 


 1
년 동안 안식년을 맞아 중동 역사의 주인공인 아랍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아내와 나는 1949년 가을 이스탄불로 향했다. 
 당시 중동 지역의 정세는 인식하기 어려울 정도로 급변했다. 


 이전에는 아랍 세계의 대부분을 영국이나 프랑스가 지배했기 때문에 입국이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독립한 아랍 국가들은 입국비자 신청자들에게 종교를 기입하게 하면서 

유대종교라고 밝힌 사람들의 입국을 대부분 거절했다. 


 당시 중동에 관심있는 유대인 학자들이 방문할 수 있는 나라는 

터키, 이란, 이스라엘 세 곳뿐이었다.

안식년을 보낸 곳도 이들 세 나라였고 첫 방문지 이스탄불에서 대부분 시간을 보냈다.


 도서관과 기록 보관소가 밀집된 곳이라서 

중동 역사를 전공하는 학자들에게는 매력적인 곳이었다. 


이 기록 보관소는 수 세기에 걸쳐 유지된 자료를 모아 두는 중앙 아카이브로, 

중동 전역의 역사에 귀중하고 필수적인 자료를 다량 보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곳의 출입은 제한된 수의 터키학자들에게만 허용되었다.
 

그런데 내게 행운이 찾아왔다. 
 기록보관소 정책에 변화가 생겨 자국민에게만 허용하던 정책을 바꾼 것이다. 
 나는 그토록 원하던 허가를 받게 되어 날아갈 듯이 기뻤다. 
 마치 장난감 가게에 풀어 놓은 아이처럼 어느 곳부터 먼저 둘러봐야 할지 모를 정도였다. 


1950년 처음으로 이란을 방문했다. 
 대학에서 이란 역사를 가르치고 있었기 때문에, 

이란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이 필요하다고 느꼈을 때였다. 


 몇 주 동안 이란 전역을 둘러보면서 나는 이란이 매력적이고 친절한 나라라고 느꼈다. 
 사람들은 어수룩한 내 페르시아어 실력에도 관대한고 상냥하게 응해주었다. 

 

1950년 런던으로 돌아왔을 때, 

왕립국제문제연구소와 옥스퍼드대학교 출판사가

 현대 터키에 대한 책을 집필해 달라고 요청했다. 


 두 기관은 이슬람 세계와 서양의 관계에 대한 시리즈를 기획 중이었는데, 

내가 그 시리즈의 한 부분을 담당해 줄 경우 터키 현지 조사도 지원하겠다고 언급했고 

횟수에 제한을 두지 않았다.
 나는 크게 만족하여 집필을 수락하고 터키로 현지조사를 떠났다.


 원고 집필이 1960년에 완료되고, 

<현대 터키의 등장>이라는 재목으로  세상에 내놓았다.

 

<문화 외교>

나는 1920년대 런던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나이는 어렸지만 세계의 1/3에 달하는 지역을 장악한 

가장 위대한 제국에 속해 있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이 후 시간이 지나면서 대영제국의 존재와 

그 긍정적인 역할에 대한 믿음은 국내 외에서 공격을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무장테러 세력이 영국군대와 군 시설을 공격했다. 
 키프로스, 팔레스타인, 아덴에서 이런 상황이 발생했다


 이들 세력의 공통 목표는 영국군의 철수와 완전한 독립의 달성을 촉진하는 것이었다. 
 당시 이들 세 조직은 모두 테러 세력으로 불렸지만 상당히 온건한 부류였다. 
 예외 없이 이들의 공격 대상은 군사적 목표였다. 
 때로는 민간인들에 대한 부수적 피해가 발생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최대한 피하려고 노력했다. 


1955년 가을 나는 영국에서 출발해 뉴욕을 거쳐 로스앤젤레스로 향했다.

 1년동안 UCLA에서 객원교수로 근무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미국사회에 정착된 반유대주의에 적잖게 충격을 받았다. 
 

영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당시 미국내 일부 호텔에서는 유대인 손님을 받지 않았는데, 

이는 일반적인 관행이었다. 
 영국에서 이런 차별 대우를 하는 호텔은 숙박업 면허를 유지할 수 없었다. 


19세기 중반에 로스차일드 가문의 사람이 수도 런던의 자유당 후보로 출마해 선출되었다. 
 그가 의원직 수행을 위해 의회로 갔을 때 하원의 한 서기가 충성선서를 요청했다.


 유대인 로스차일드는 종교적 이유로 

‘기독교의 참된 믿음에 따라’라는 문구가 담긴 선서를 할 수 없었다. 
 이 사안을 두고 열띤 논쟁을 벌였고 하원은 로스차일드가 선서를 거부했기 때문에 

당선은 무효이며 보궐선거를 하기로 결정했다.


 보궐선거에서 로스차일드는 다시 당선됐고, 

의회에서 같은 일이 반복되어 다시 무효로 선언됐고 보궐선거가 열렸다.
 그리고 그가 세 번째 당선되자 하원도 입장을 바꾸었다. 


 하원은 충성선언 문구를 수정했고 그때부터 유대인이 의회에 진출할 수 있었다. 
 로스차일드는 결국 1858년 유대인 최초의 영국 하원의원이 되었다. 


 <왜 역사를 공부하는가?>

역사학자의 책임과 의무는 자신이 확인한 진실만 말하는 것이다. 
 진실 외의 다른 어떤 주장을 내놓아서는 안된다. 
 자신이 선전가가 되거나 선전가들에게 이용당하게 내버려두어서는 안된다. 


 역사는 누군가에 의해 정치적으로 쉽게 왜곡될 수 있기 때문에 많은 유혹이 존재하는데 

이는 역사학자가 직면할 수 있는 큰 위험이다. 
 역사는 명확한 해석을 요하는 복잡한 사안들로 기득하기 때문에 정확한 해석이 필수적이다. 
 부정확한 역사보다는 차라리 역사가 없는 것이 낫다. 


 사람들이 환상과 신화에 노출되기 때문이다.

역사의 흐름을 바꾸려는 생각은 파괴적인 망상일 뿐이다. 
 역사 연구를 통해 우리는 인류가 직면한 역경의 성격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다. 


 역사를 적절하지 않다고 자신이 생각하는 방향으로 수정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역사를 쓸모없다고 무시하는 사람들 보다 더 위험할 수 있다. 


무슬림의 시각에서 본다면 이슬람 종교와 연관된 것들 만이 역사적으로 중요하다. 
 이슬람의 출현은 역사적 증거를 통해 알려진 중대 사건이다. 
 이슬람법의 발전은 사도와 그 동료들의 가르침 및 행동을 집대성한 순나에 바탕을 둔다. 
 순나는 과거의 행위와 발언을 기록한 역사다.


 따라서 무슬림에게 역사는 종교적으로 상당히 중요하고 

그렇기 때문에 이들에게 역사는 정확한 것이어야 한다. 


 사도의 전승을 담은 하디스도 역사적 기술인데 

사도가 이런저런 사안에 대해 언급하고 결정한 것을 집대성한 것이다. 


 따라서 하디스를 기록하고, 수집하고, 평가하는 것도 역사 편찬의 일종이다.

 

<학자로 살아온 날들>

1960년대에 여왕이 주최하는 버킹엄 궁 오찬에 초대받았다.


 영국 정부는 아라비아 반도의 걸프 토호국들에서 

철군하겠다는 의향을 공식적으로 밝혔다. 
 이에 걸프 지역의 지도자들이 철군 이후에 발생할 문제들을 

왕실과 논의하기 위해 잇달아 런던을 방문했다.


 이들 부족 지도자들은 공식적으로 영국의 철수 결정을 환영한다고 선언했으나, 

은밀하게 자신들의 우려를 밝히면서 점진적인 철군을 간청했다. 

오찬 자체는 그리 흥미롭지 않았다. 
 같은 테이블에 앉은 참석자는 왕궁 만찬에서 제공되는 음식들은 항상 따뜻하지 않다고 설명했다.
 아마도 왕궁 조리실과 만찬장과 거리가 멀기 때문일 것이다.


학자로서 느낄 수 있는 여러 만족감이 있다. 
 그 중에서도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한다는 것이 가장 기쁜 일일 것이다. 

 그리고 학자는 학생과 제자를 얻는 기쁨도 있다.
 이제는 상당수 은퇴하기도 했지만 적지 않은 학부 졸업생과 

절대 다수의 대학원 졸업생은 자국에 돌아가서 교사 혹은 교수가 되었다.
 

그러나 중동 국가에 돌아간 제자들의 상황이 다 좋지는 않았다.
 대부분의 중동 국가에서 대학교수는 박봉에도 과도한 업무를 담당해야 했다. 

 능력 있고 유망한 학생들이 귀국 후 더는 학문적으로 훌륭한 논문을 게재하지 못했다. 

안타깝게도 재능이 낭비되고 마는 것이 현실이었다.


1974년 미국으로 떠나기 전 영국에서의 마지막 2년 동안 내 삶은 고달팠다. 

‘고통스러운’이라는 단어를 쓴다 해도 지나치지 않았다.


 결혼생활은 파탄은 일상생활의 모든 부분에 악영향을 주었다. 
 학부생을 가르치고 대학원생 논문을 지도하는 직업상 의무만을 겨우 감당할 수 있었다. 
 새로운 역사 연구 프로젝트를 수행할 에너지도 의지도 모두 상실했다. 


<대서양을 건너>

1974년 아주 새로운 해였다. 
 고통스런 이혼 과정이 끝나고 나는 조국과 직장과 삶을 떠났다.
 그리고 뉴저지의 프린스턴에 도착했다.
 새로운 국가, 새로운 삶, 새로운 연인이 생겼다. 

소도시 프린스턴에 적응하는데 가장 큰 도움을 준 것은 새로운 여성과의 관계였다. 
 관계는 영국을 떠나기 직전에 시작되었다. 


 1974
년 초 이란 대사관이 주최한 연회에서 터키 귀족 출신의 여성을 만났다. 

우리는 첫 눈에 반했고 같은 해 내가 중동을 방문할 때 본격적인 만남을 시작했다. 
 내가 미국으로 이주할 즈음 그녀는 나와 같이 미국으로 갈 의향을 내비쳤다. 
 그래서 학교에 커플 숙소를 요청했고 거처가 마련된 뒤 동거를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의 관계에 대해 서로 다른 시각을 알게 되었고, 

관계를 정리하기로 합의했다. 
 그녀는 터키로 돌아 갔으나 우리는 여전히 친구로 남았다. 


프린스턴 이주로 시간적인 여유가 주어졌다.
 나는 1년에 1학기만 강의를 하면 되었고

 외국에서 온 교수에게는 학교 행정을 맡기지 않은 것이 일반적인 관례여서 

행정업무를 벗어나게 된 것은 큰 기쁨이었다. 


 이렇게 주어진 시간에 수 십년 동안 수집한 자료를 정리하고 분류해서 

은퇴 후에도 경이로울 정도로 많은 책을 집필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었다. 


 은퇴 이후 15권의 단행본을 출판했는데, 

이는 교수로 재직하면서 집필한 책보다 더 많은 수다.

 

<이웃>

1973년 10월, 이집트 대통령 사다트는 유대교 명절인 속죄일 욤 키푸르에 

이스라엘 점령군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전쟁의 시작 단계는 성공적이었다.
 이스라엘군은 완벽한 기습을 당했다. 
 이집트 군대가 휴전선을 넘어 이스라엘이 점령한 시나이반도로 진격해 온 것이다. 
 동시에 시리아군도 이스라엘이 점령한 골란고원을 급습했다. 
 두 지역은 1967년 전쟁 이후 이스라엘이 점령한 곳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신속한 반격은 초반의 불리한 전세를 뒤집었다. 

이스라엘은 수에즈 운하를 넘어 이집트 본토내에 교두보를 구축했다. 
 이후 휴전 합의가 도출됐고, 협상이 진행되었다. 
 협상의 결과로 6년 후 이스라엘과 아랍국가 간 최초의 평화조약이 체결되었다.


이스라엘-이집트 평화 과정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스라엘에서는 입장을 재고하라는 국민의 뜻이 담긴 정권 교체도 있었다. 
 메나헴 베긴 수상이 1977년 총리 자리에 오른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1977년 11월 역사적으로 이집트 대통령 사다트가 예루살렘을 방문해 

베긴 이스라엘 총리로부터 영접을 받았다. 
 그리고 정부 인사들은 물론 야당 지도자들과도 만났다.


 이스라엘과 이집트 간 평화는 정상적으로 유지되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반신반의했다. 

이집트가 시나이 반도를 되찾은 후에 평화조약이 깨질 것이라고 말했고, 

또 다른 사람들은 사다트가 사망하면 평화적 관계가 끝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집트와 이스라엘 간 평화협정은 여러 충격적 사건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았다. 

그리고 아직도유지되고 있다.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평화조약 체결은 중동의 세력 균형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처음으로 이웃 국가들이 이스라엘을 인정하는 조치가 등장한 것이다.
 하지만, 팔레스타인인들은 한동안 협상을 거부했는데, 

1993년 오슬로에서 협상에 참여했다. 


 오슬로 협정은 팔레스타인의 의지가 아니라 다른 환경적 변화 때문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냉전의 종식과 소련의 몰락이 가장 크게 영향을 미쳤다.


1993년 워싱턴 백악관 잔디밭, 

환호하는 군중들 앞에서 이스라엘의 이츠하크 라빈 총리와 

PLO의 야세르 아라파트 의장이 악수했다. 
 클린턴 대통령의 중재로 마련된 자리였다. 
 상호 최대의 적이었던 두 사람이 공식석상에서 처음 악수를 나누었다.


 아랍과 이스라엘 간 평화를 위한 기본원칙에 서명한 것을 기념한 행사였다. 

이 행사는 전 세계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이 역사적 상호조치 이후 다른 일들도 술술 풀렸다. 


 요르단이 이스라엘과 포괄적인 평화조약을 체결할 수 있었고, 

모로코, 튀니지, 오만과 카타르를 포함한 걸프 국가 등 많은 아랍 국가들이 

이스라엘과 직접적인 접촉을 시작할 수 있었다.


 물론, 팔레스타인과의 평화협상이 최종 타결되지 않으면서 

이런 접촉들도 답보 상태에 있거나 중단된 상태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갈등은 성격이 매우 다르다. 
 이스라엘과 이집트는 이웃 국가이고, 

국경을 맞댄 이웃 국가들끼리 심각하고 장기적인 갈등이 나타나는 것은 

인류 역사에서 흔한 일이다.


 이스라엘이 시리아와 레바논과 겪었던 충돌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두 개 국가 간 갈등이 아니다. 
 한 지역 내에 두 개의 민족이 존재하는 것이다. 


 두 민족은 자신들의 생존과 미래에 대한 각기 다른 개념을 가지고 있다. 
 특히 수 세기에 걸쳐 이 개념은 더욱 극단적인 방향으로 변모해왔다. 


팔레스타인이라는 명칭은 2세기 바르-코크바 반란을 진압한 이후 

로마인들이 처음으로 사용한 지명이다. 
 로마인은 빈번히 문제를 야기하는 유대민족에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유대인들의 정체성과 존재 자체를 제거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판단한 그들은 

유대인을 다른 곳으로 추방해버렸다. 
 유대 왕국의 수도 예루살렘은 일리어로 개명했고, 

지역 전체의 이름도 팔레스티나 혹은 시리아-팔레스티나로 바꾸었다. 


 이런 조치들을 통해 로마인들은 유대민족과 고대 조국 간 어떠한 연계성도 지워버리려 했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이 지역을 장악한 영국에 의해 팔레스타인은 

고대 이후 처음으로 독자적인 실체를 갖게 되었다.


 대영제국이 이곳을 위임 통치하게 되었고 유엔의 전신인 국제연맹도 이를 승인했다. 
 이 공식적인 과정에서 팔레스타인은 국제사회의 공식 명칭이 되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 오랜 분쟁이 복잡하고 해결하기 어려운 데는 

바로 이러한 배경이 있다. 


 이는 이집트, 시리아, 레바논에서 처럼 국경분쟁이 아니고 

한 국가의 성격과 정체성에 관한 갈등이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양측 모두 각각 언급하는 시대는 다르지만 

역사적인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특히 아랍인과 유대인 양측의 극단주의자들은 다양한 시대의 역사적 증거와 타당성을 제시하면서 

전체 지역이 자신들의 역사적, 민족적 유산이라고 주장한다. 


 최근에는 두 국가 설립 구상이 부상하고 있는데, 

양측이 주장하는 역사적인 소유권에 기반을 두어 영토를 분리하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두 국가를 설립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 쪽도 상대방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이런 종류의 해결 방안은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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