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문

기억의 문

by 이안


햇살이 부엌 창문을 타고 들어올 때,

엄마는 늘 그 빛을 등지고 밥을 지었다.

국에서 피어오르던 김은 이 집이 아직 따뜻하다는 증거처럼 느껴졌고,

나는 그 곁에서 말없이 식탁에 앉아

엄마가 숟가락을 내 앞에 놓아주는 순간을 기다리곤 했다.


엄마는 늘 바빠 보였고, 지쳐 보였지만

나를 부드럽게 깨우는 손길이나

등굣길에 건네주던 마른 김밥 한 줄 속에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그런 날들은 고요했고, 익숙했다.

학교를 다녀오면 책가방을 내려놓고,

피아노 학원을 다녀오면 엄마는 항상 미숫가루를 타주곤 했다.

그런 평범한 일상이, 내게는 엄마라는 존재의 전부였다.


집 안에는 늘 빨래 뒤 풍기는 섬유유연제 냄새,

엄마가 외출 전에 뿌리던 향수의 잔향,

엄마가 해준 음식 냄새가 머물렀다.

그 모든 냄새는, 엄마가 이 집에 ‘존재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감각이었다.


엄마는 가끔 창밖을 오래 바라보곤 했다.

설거지를 멈춘 채, 손을 물에 담근 채 그대로.

그럴 때면, 엄마가 아주 먼 곳에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런 엄마에게 더 많은 애정을 갈구했다.

시도 때도 없이 안아달라 떼쓰고,

동생 가영이가 엄마 옆에 오는 것조차 샘이 나,

혼자서만 엄마를 차지하려 애썼다. 엄마라는 존재는 나에게 전부였다.


10살인 내가 바라보는 세상은 엄마가 보여주는 세상뿐이었다. 그래서 엄마가 없는

순간은 불안해졌고 엄마의 존재만이 나를 살아가게 해 주었다.

가영이 역시 나와 같았을까? 그걸 알기엔 나는 어렸고 무지했다. 그저 너무나도 엄마만이 필요했었다.


엄마가 보여주는 세상 속에서 안정을 찾고 평범한 일상을 보내는 그저 어린아이였다.


하지만 엄마와 아빠 사이의 기억은 대부분 고요하지 않았다.

아빠는 늘 술에 취해 밤늦게 들어왔고,

엄마는 지친 얼굴로 그를 맞이했다.

처음엔 말 몇 마디였지만, 그것은 곧 싸움이 되었고,

언젠가부터 싸움은 소리로, 그리고 손으로 이어졌다.


“지영아, 가영이 데리고 방에 들어가 있어.”

엄마는 부엌 바닥에 떨어져 있던 숟가락을 쥔 채,

우리의 등을 떠밀듯 방으로 몰아넣었다.

그 다급한 손끝은, 지금만큼은 아무것도 보게 하지 않으려는 간절함 같았다.


나는 가영과 함께 침대와 장롱사이에 비집고 쭈그려 앉아,

귀를 막은 손에 힘을 주며 눈을 꼭 감았다.

그러나 귀를 막아도 엄마 아빠가 싸우는 소리는 선명하게 들려왔고

문 너머에선 엄마가 울부짖는 소리는 점점 더 커져만 갔다.

그럴수록 가영과 나는 눈을 더 세게 감고 벗어나려고 애썼다.


“제발… 제발 그만해… 너만 이 집에 없으면 돼. 나가줘, 제발… 제발…”


엄마의 말은 단순한 두려움이 아니었다.

그건 오래 눌러온 분노와 피로,

그리고 이제는 무너지는 걸 멈추고 싶은 몸부림에 가까웠던 것 같다,

아빠를 원망하는 목소리는 더욱 커졌고 아빠는 그런 엄마의 모습에 화가 더 나는 것 같았다.

그럴수록 엄마가 맞는 소리는 선명해졌고 엄마의 울부짖음은 계속됐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다.

거실은 조용했고, 엄마의 흐느낌만이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고 나왔다.


냉장고 앞에 주저앉은 엄마는

마치 모든 기운이 빠져나간 듯, 맥없이 울고 있었다.

거실은 깨진 그릇들과 부서진 가구들로 엉망이었다.


“엄마… 괜찮아?”

내가 묻자, 엄마는 대답 없이 울기만 했다. 엄마의 표정은 그 상황에서 우리마저

귀찮아지고 싫어져버린 것 같았다.

그 모습에 나도 눈물이 났다.

가영은 옆에서 조용히 엄마와 내 얼굴을 번갈아 보다가,

같이 울기 시작했다.

그날 엄마는 가영과 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날 밤 이후, 며칠간 엄마는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매일 문 소리에 귀를 기울였고,

그림자 같은 불안이 나도 모르게 마음속에 자리 잡았다.

결국 엄마는 우리마저 싫어져 떠난 것이라고 끊임없이 생각하고 자책했다.


며칠 뒤 엄마는 돌아왔지만, 그때부터 알았다.

언젠가 엄마는 정말로 떠나게 될 거는 걸 마음속에 품고 지냈다.

그리고 그 예감은 아주 조용히, 아주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그날도 평범한 오후였다.

학교를 마치고, 피아노 학원에서 나올 때는 손끝이 시렸지만

집의 온기가 곧 닿을 것 같아 익숙한 골목을 천천히 걸었다.


“학교 다녀왔습니다.”

작은 목소리로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말하며,

현관문을 열었다.


그런데 그 순간,

고요한 집 안에 묘한 낯섦이 스며 있었다.

전에 엄마가 사라졌을 때와 같은 공기의 냄새였다.

어디선가 어떤 온기가 빠져나간 자리를 감각적으로 알 수 있었다.


식지 않은 국에서는 여전히 김이 피어오르고,

책상 위엔 새 학용품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 자리에서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아 울기시작했다.

한참을 울다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 옆에

하얀 종이 한 장이 바람결에 살짝 흔들리고 있었다.

읽지 않아도, 그건 엄마가 남긴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손끝으로 종이를 들었다.

글자는 짧았고, 문장은 담담했다.


“가영이랑 싸우지 말고, 밥 잘 챙겨 먹고 잘 지내고 있어.”


그 문장을 읽는 순간,

나는 그것이 작별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 것 같았다.

이건 인사였고, 이별이었고,

더는 엄마를 볼 수 없다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순간이었다.


집 안에 남아 있던 엄마의 향기마저

조금씩 사라져 가는 것 같았다.

엄마가 등을 돌리고 걸어가는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익숙했던 집 안의 풍경이, 이제는 나를 낯설게 바라보았다.


나는 조용히 방문을 열고, 엄마의 옷장 앞에 섰다.

그 문을 여는 일은, 기억의 문을 여는 일과도 같았다.


비워진 옷장 안,

엄마의 냄새가 남아 있는 옷 하나를 꺼내 품에 안았다.

그 옷은 여전히 따뜻했고,

그 냄새를 맡으면 엄마가 내 곁에 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조심스레 몸을 장롱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그 안에 웅크려 누운 채, 장롱 문을 닫았다.


세상의 소리는 문 너머로 희미해지고,

낯선 공기가 감도는 집 안과 달리

장롱 안에는 오직 엄마의 냄새만이 가득했다.


그 안에서 나는

엄마를 놓아주기 싫어,

그 냄새가 사라질 때까지 매일 장롱 속으로 들어갔다.


엄마가 남긴 온기 위에

내 어린 마음은 조금씩 웅크러졌다.

슬픔은 말 대신 숨결이 되어

장롱 속 어둠을 천천히 채워갔다.


그리고 나는 그 어둠 속에서

처음으로, 진심으로

엄마가 떠났다는 사실과 마주했다.


그날 이후, 우리의 말들은

하나둘 눈 속에 묻혔다.

잊지 않았지만, 꺼내지도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겨울 속으로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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