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이사

by 이안


아빠, 나, 그리고 가영. 우리 셋의 새로운 생활이 시작되었다.

아빠가 엄마를 때려서 엄마가 집을 나갔다는 원망보다는, 아빠라도 곁에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장롱 안에 남아 있던 엄마 냄새는 이미 사라졌고, 엄마 없는 일상은 어느새 아빠와 가영과 함께하는 또 다른 익숙함으로 채워졌다.


아침마다 아빠는 김밥을 사 와 작은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가영과 나는 그 김밥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가영이는 아빠 손을 잡고 유치원에 가고, 나는 책가방을 메고 혼자 학교로 향했다.

어린 나는 그런 상황들을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받아들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어느 주말 아침이었다.

잠이 덜 깬 채로 방 밖을 나가니, 거실 안에 찬 기운이 감돌았다.

창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바깥에선 눈이 조용히 내리고 있었다.

눈송이들이 소리 없이 창틀을 타고 흘러내렸고, 거실 바닥엔 낡은 박스와 테이프 자국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가영과 나는 이유도 모른 채 멍하니 서 있었다.

밖에서 담배를 피우던 아빠는 우리를 보자, 급히 담배를 끄고 안으로 들어왔다.


“이제 이천에 있는 할머니 집으로 가서 살 거야.

가면 할머니, 할아버지 말씀 잘 듣고 밥도 잘 먹어야 해.”


그 말을 들은 나는 불안한 마음에 아빠에게 물었다.

“아빠도 같이 가는 거지?”

“아빠는 여기서 일해야 하니까… 당분간 할머니, 할아버지랑 지내고 있어. 할머니 말씀 잘 듣고.”

“그럼 가영이랑 나만 가는 거야? 언제까지 있어야 해?”


그 뒤로 아빠는 아무 말이 없었다.

대신 우리 둘을 남겨둔 채, 바쁘게 짐을 싸기 시작했다.

단 하나 분명한 건, 오늘이 이 집에서의 마지막 날이라는 사실뿐이었다.


“차 왔다.”

아빠의 짧은 말에, 나는 엄마가 사준 토끼 인형을 본능처럼 꼭 끌어안았다.

가영이는 벌써 신발을 신고 문 앞에 서 있었다.

엄마, 아빠와 함께 살던 집을 떠나는 순간에도, 가영은 아무렇지 않은 듯 보였다.

작별의 준비란, 어쩌면 가장 어린 마음이 가장 먼저 해내는 일인지도 모른다.


집을 나서기 전,

나는 마지막으로 집 안을 돌아보았다.

어린 마음에도, 뭔가를 기억하려는 본능 같은 것이 있었다.

문을 열 때마다 끼익 하고 소리를 내던 현관문,

엄마, 아빠, 가영, 그리고 내 신발이 함께 놓여 있던 신발장,

엄마가 마지막으로 쓴 흔적처럼 남은 거실 찬장,

그리고 시계가 걸려 있던 벽의 못 자국.

나는 그것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그 순간들을 나중에 꺼내 볼 수 있도록, 기억이라는 작고 낡은 상자에 천천히 담아두었다.


시골로 가는 차 안은 조용했다.

라디오는 낮은 볼륨으로 무언가를 흘려보내고 있었지만, 아빠는 말이 없었고,

가영이는 내 옆자리에서 졸고 있었다.

나는 눈을 감은 동생의 손 위에 조심스럽게 내 손을 얹었다.

이제부터는, 엄마도 아빠도 아닌, 가영이만 내 곁에 남아 있다.


시골집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마당 위에 소복이 쌓인 눈은 누군가의 손길 없이 그대로였고,

그 풍경이 낯설고 차가워서 괜히 코끝이 시큰해졌다.


할머니는 마당 끝에 서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눈을 맞으며 서 있는 그 모습은 이상하게도 따뜻하기보다는 차갑고 단단하게 느껴졌다.

그 시선 속에는 환영보다는, 우리가 이곳에 어쩔 수 없이 묶여 있는 존재라는 인식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마치 사라지지 않고, 그저 여기 머물러야만 하는 그림자처럼.


“왔냐.”

그 짧은 한마디가 전부였다.

나는 뒤돌아 아빠를 바라봤지만, 아빠는 고개만 조용히 끄덕였다.


할머니의 집 안은 오래된 냄새가 났다.

구석구석에서 오래된 가구와 이불, 옷들에서 풍기는 냄새였다.

그 냄새가 마치 나를 전혀 다른 세상으로 데려가는 듯했다.

보일러가 아직 가동되지 않은 방엔 서늘한 기운이 맴돌았고,

우리가 가져온 이불과 옷가지들은 방 한구석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아졌다.


엄마가 없는 방은 원래 이렇게 추운 것인지,

아니면 이 오래된 냄새가 나라는 존재를 삼키고 있는 것인지 불안한 감정이 자꾸만 마음을 채웠다.


“너희는 방으로 들어가.”

할머니는 짐이 놓인 방을 가리켰고,

나는 가영이의 손을 잡고 그 방으로 들어갔다.


밖에서는 아빠와 할머니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무슨 이야기인지는 들리지 않았지만, 아빠의 표정은 어두워 보였다.

창밖에는 여전히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 속에서, 나의 세상이 조용히 바뀌고 있었다.


잠시 뒤, 아빠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내일 출근해야 해서 먼저 간다. 할머니, 할아버지 말씀 잘 듣고 있어.”


그 말에 나와 가영이는 눈을 크게 떴고,

서로의 손을 더 꽉 쥐었다.


“아빠, 안 가면 안 돼?”

“아빠는 해야 할 일이 있어서 가봐야 해.”

“그럼, 내일 가면 안 돼?”

나는 아빠가 이 낯선 곳에 단 하루라도 같이 머물러주길 바랐다.


아빠는 우리 머리를 번갈아 쓰다듬고는, 아무 말 없이 일어섰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붙잡고 싶은 감정이 목에 걸려 턱 막혔다.


문이 닫히는 소리.

마당을 밟는 발소리.

시동 거는 소리.

점점 멀어지는 차 소리.


아빠는 떠났다.

우리만 남았다.


그날 밤, 방 안은 추웠다.

이불속에서 느껴지는 가영이의 등이 따뜻했지만,

마음속 어딘가는 자꾸만 허전했다.


나는 눈을 감으며

엄마가 남기고 간 종이 위의 글자를 떠올렸다.


“가영이랑 싸우지 말고, 밥 잘 챙겨 먹고…”


그 말대로 하려 애썼다.

하지만 따뜻한 말이 가득했던 그 종잇조각은,

이 추운 방을 조금도 덥혀주지 못했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는 첫날밤을 맞이했다.

엄마 없이,

아빠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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