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랑 다르게 살 줄 알았지(프롤로그)

평범한 이웃들

by 코토리


[꿈- 대회의실]

“신사업본부 허애리 팀장입니다. 발표 시작하겠습니다.”

내 목소리는 생각보다 또렷했다.

회장님, 사장단, 전무, 상무까지 전원이 참석한 회의실.

어젯밤, 두 아이 재우고 새벽 2시까지 준비한 PT였다.

이 자리에서 나를 증명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회장님의 미간이 점점 구겨지기 시작했다.

상무는 물끄러미 바닥만 바라봤다. 팀원들은 노트북을 닫았다.

그리고 후배, 내가 그토록 질투하던 김 차장은… 조용히 웃고 있었다.


[꿈속 현실- 보고 후 회의실]

“허 팀장, 오늘이 마지막 기회였어.”

“숫자도 틀렸고, 보고 의도도 개판이야. 회장님이 화낼만하지.”

“팀장이 그 자리에 앉아 있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내일부터 김 차장 밑으로 내려가. 아니면 백업부서로 발령 처리할 테니까 그렇게 알아.”

나는 얼어붙은 채 앉아 있었다. 누가 나를 건드려 깨울 줄 알았다. 아무도 그러지 않았다.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착각이길 바랐다.

그런데 내 PPT 슬라이드에는 붉은 글씨가 박혀 있었다.

“퇴사 권고”


[현재 – 서울 아파트 침실]

눈을 번쩍 떴다. 천장이 흰색이었다.

진짜 꿈이었다.

그런데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또 더러운 꿈이네… 몇 번째야.’

이상하게 이번 휴직은 전보다 더 불안하다.

복직까지 아직 한참 남았는데도, 이미 회사에서 ‘밀려난 사람’이 된 기분이다.


[내레이션 – 주인공의 내면]

나는 엄마처럼은 안 살 줄 알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엄마처럼 살지 않기 위해 독하게 달렸다’는 표현이 맞겠다.

서울대 졸업, S전자 입사. 탑티어 연봉, 해외 프로젝트, 여성 리더 멘토링까지.

나는 회사에서 ‘잘 나가는 여자’였다.

결혼도 철저하게 따졌다. 아이를 낳을 생각은 없었다.

커리어를 지켜주겠다는 약속을 받은 뒤, 마치 계약처럼 시작한 결혼이었다.

그런데 어긋났다.

되기 싫었던 ‘엄마’가 어느새 내 모습에 겹친다.

복직을 서두르던 첫 육아휴직보다 이번 둘째 육아는 훨씬 더 버겁고, 외롭고, 우울하다.

‘엄마’가 될 거면 그 전의 치열했던 나날들은 대체 뭐였을까.


[장면 전환 – 서울 아파트, 밤]

엄마가 미역을 한 보따리 들고 고향 부산에서 올라왔다.

내 엄마, 황지예 씨.

남편 대학 뒷바라지, 석사, 박사, 승진 시험까지 지원했고,

애 둘을 (거의) 혼자 키웠다.

보험, 화장품 방문판매, 보석장사까지 안 해본 일이 없었다.

그렇게 가족만 보고 살아온 사람이 이제는 손주까지 봐주겠다고 서울까지 올라온 거다.

둘째 아이가 잠든 뒤 20분쯤 지났을까.

주방엔 조용한 숨소리와 보글보글 끓는 미역국 냄비 소리만 남아 있다.

나는 식탁에 주저앉고,

엄마는 아기 가재수건을 개고 있다.


[대화 – 엄마와 나]

“… 엄마, 요새 회사 잘리는 꿈을 너무 자주 꿔. 그것도 아주 기분 나쁜 방식으로.”

엄마

“우리 딸 복직 생각하면서 스트레스받고 있나 보네. 힘들 거 같으면 집에서 살림하고 애들 예쁘게 키워.”

“그걸 말이라고 해, 엄마?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나... 이렇게 살려고 여기까지 온 거 아니잖아.”

(잠깐 침묵)

“나 진짜 엄마랑은 다르게 살 줄 알았거든.”

엄마

“그 말, 니 고등학교 때부터 했다 아이가.”

(작게 웃는다)

“‘나는 결혼 안 하고, 애도 안 낳고, 멋지게 일할 거야’ 그랬지.”

“그땐… 엄마가 너무 고생스러워 보였어.

아빠 뒷바라지에, 애 둘에, 보험 팔고, 화장품 팔고…

엄마 인생에 엄마는 없고, 맨날 가족만 있었잖아.”

엄마 (잠깐 멈추고)

“그렇게라도 안 하면 살기 힘들었으니까.

니 아빠 대학원 다닐 땐, 나 혼자 돈 벌고 살림했어.

그래도… 애들 키우는 건 나쁘지 않더라.”

“엄마, 난 커리어 방해된다고 애 낳는 것도 망설였는데…

지금은… 그냥, 아무것도 모르겠어.

이게 다 무너진 기분이야.”

엄마

“니가 무너진 게 아니라…

니가 애를 키우고 있는 기라.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데.”

“근데 그렇게 가족만 보고 살아서… 안 억울해?

엄마는 제대로 된 취미 하나도 없잖아.”

엄마

“글쎄… 돌아가서 다시 선택하라고 해도

또 니들 키우면서 살 끼다.”


[내레이션 – 마무리]

나는 엄마 입에서 ‘힘들다’, ‘나도 좀 쉬고 싶다’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대신 엄마는 늘 이렇게 말했다.

“밥은 묵었나.” “김치 다 먹었으면 보내줄까.” “애기 너무 안아재우지 마라. 난중에 니가 힘들다.”

나는 그런 엄마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게까지 우리만 챙기면… 결국 남는 게 뭔가 싶었다.

결혼하면 엄마처럼 살 자신도 없었고, 하고 싶지도 않았다.


지금 고향에서 올라온 엄마와 서울 집 식탁에 마주 앉아 나는 조용히 울고 있다.

나는 엄마처럼은 안 살 줄 알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자꾸 닮아간다.

그날 밤, 엄마는 오랜만에 자기 친구들 이야기를 꺼냈다.

어릴 때부터 익숙했던 엄마친구 금자 이모, 나사장, 김 이사 아저씨..


이 이야기는 엄마와 나의 이야기이자, 우리 아파트에 사는 평범한 이웃들의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