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엄마,할머니에게-1

땅따먹기

by 미뇽작가

아빠가 없던 나의 네 살 인생이 온통 슬픔 투성이는 아니었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매일 밤 어스름이 깔릴 때까지 골목을 지키며 숨이 차도록 놀던 즐거운 기억이 가득하니까 . 하지만 그 화사한 풍경 속에도 날카로운 파편 같은 날은 있었다.

그날은 동네 아이들과 흙바닥에 선을 긋고 땅따먹기를 하던 중이었다. 팽팽한 긴장감 속에 내 차례가 왔을 때, 옆에 있던 아이가 짓궂게 나를 툭 밀쳤고 중심을 잃은 내 발이 야속하게도 금을 밟고 말았다.


"너, 왜 밀어?"


억울함에 나도 모르게 그 아이를 똑같이 밀어냈다. 아이들끼리의 흔한 다툼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곁에서 지켜보던 그 아이의 엄마가 불쑥 끼어들어서


"아빠도 없는 년이 어디 감히 남의 귀한 자식한테 손을 대?"


날 선 목소리와 함께 거친 손길로 내 어깨를 후려쳤다. 어른의 힘을 이기지 못한 내 작고 어린 몸은 힘없이 차가운 땅바닥 위로 내동댕이쳐졌다. 손바닥이 화끈거리는 아픔보다, 난생 처음 마주한 ‘어른의 악의’가 더 큰 공포였다.

충격과 아픔에 엉엉 우는 내 비명에 우리 집 대문이 벌컥 열렸다. 우리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상황을 살필 것도 없이 서슬 퍼런 눈빛으로 그 여자를 단숨에 제압하셨다. 나는 할머니의 치맛자락을 붙들고 악에 받쳐 일러바쳤다.


"할머니! 저 아줌마가 나보고 아빠 없는 년이래! 그러고 나 밀었단 말이야!"


잠시 정적이 흐르고, 당시 88 ,99사이즈의 당당한 풍채를 자랑하시던 할머니가 그 여자 앞에 태산처럼 버티고 서서 입을 여셨다.


"애 아빠는 어린 자식 두고 차마 눈도 못 감고 죽었다만, 얘 뒤에는 아직 할머니, 할아버지, 엄마, 삼촌들이 시퍼렇게 살아 있어! 나도 너 한번 밀어봐 줄까? 어? 나도 좀 밀어줘 봐!"


금방이라도 폭풍이 몰아칠 듯한 할머니의 위엄에 아주머니는 사색이 되어 사과를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날 이후, 우리 남매가 골목에 나가 놀 때면 대문 틈 너머로 할머니의 매서운 감시가 이어졌고, 삼촌들은 번갈아 가며 골목 어귀를 지켰다.

그 누구라도 우릴 건드렸다간 호랑이 같은 할머니의 분노를 사게 될 노릇이었다.

비록 아버지는 일찍 세상을 떠나셨지만, 그 빈자리에는 몇 배나 더 촘촘하고 뜨거운 사랑이 채워졌고 아빠의 몫 이상으로 우리를 지켜준 외갓집 식구들 덕분에 나는 그늘 대신 햇살을 품고 당당하게 자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