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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을밤 Sep 03. 2021

나와 발을 맞춰 걸어줄 사람이 있다는 것

고마워, 나의 베스티

나에게는 중학교 시절부터 연을 이어온 친구가 있다.

당시에 혼자 감당하기 어려웠던 고민을 친구에게 털어놓은 적이 있다. 친구는 해결책을 찾아주기보단 내 상황을 이해하고 내 감정을 헤아리며 상처 받았을 나를 위로했고, 어쩌면 나보다 더 많은 눈물을 흘리며 자신만의 방법으로 나를 달래주었다. 머릿속 한켠에 미세한 조각으로 남아버린 이 날을 과연 친구가 기억할지는 모르겠지만, 이것이 바로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이 친구를 소개할 때 '내 친구들 중 가장 착한 친구'라고 소개하는 이유다.


내가 이 친구를 좋아하는 이유가 또 하나 있다. 여행을 좋아한다는 것. 인생의 첫 터닝포인트라고도 할 수 있는 유럽여행은 내 인생 가장 친한 친구와 함께 떠나게 되었다.






친구랑 함께 한 달 동안 여행을 간다고 하면 들려오는 말은 전부 부정적인 반응뿐이었다. 기대로 부푼 마음을 가지고 떠난 여행이, 설렘과 기대가 와장창 깨진 채 친구와 각각 다른 버스를 타고 돌아오는 그 모습이 얼마나 처참한가. 하지만 나는 싸우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왜냐? 내 친구는 진짜 착하거든.


여행을 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아쉽게도 우리의 여행 스타일이 정확하게 맞아떨어지는 건 아니었다. 친구는 걷는 것을 좋아하지만 나는 체력이 약하다. 친구는 다른 사람들이랑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지만 나는 혼자 쉬는 걸 더 선호하는 편이다. 하지만 우리는 식성이나 숙소, 기타 다른 부분에서 잘 맞았고 만약 달라도 상관없었다. 서로의 마음을 가장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눈물겨운 우리 우정이 나쁜 일을 막기에는 힘이 부족했던 것일까,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어린 동양인 여자애들이 범죄의 표적이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을까. 이탈리아 여행을 마치고 스위스로 넘어가는 기차 안에서 우리는 보기 좋게 소매치기를 당했다.


첫 여행지가 소매치기로 악명 높은 이탈리아였기 때문에 우리는 늘 자물쇠로 가방을 단단히 채우고 다녔다. 평소에는 늘 자물쇠로 걸어 잠갔고 계산을 할 때에나 핸드폰을 가방에서 꺼내야 할 때에만 잠깐 열었다가 바로 잠가 버릇했다. 우리는 한 달 동안 쓸 공용 경비를 절반씩 나누어 가지고 있었다. 나는 일부는 지갑 속에, 일부는 힙색 속에, 일부는 가방 속에 넣어놨다. 힙색은 후드티에 가려진 채 내 배를 감싸 둘러놓았고, 지갑은 가방에 넣었지만 늘 자물쇠로 잠가놓고 다녔다.


긴장의 연속이었던 이탈리아 여행을 마무리하고 드디어 우리가 고대하던 스위스로 넘어가던 기차 안이었다. 가장 저렴한 표를 예매하다 보니 자유석으로 고르게 되었고 빈자리에 앉으면 되는 거였다. 기차에 올라서자마자 빈자리를 찾아 앉았고 캐리어도 실어놓고 짐도 다 풀어놓은 채 긴장을 한껏 풀어냈다. 기차가 출발하기 5분 전이었을까, 저 멀리서 이탈리아인 여자애 둘이 걸어오더니 대뜸 말을 걸었다. 이탈리아어였고 이해를 하지 못한 우리는 순간 당황해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대충 손짓 발짓으로 이해한 바로는 여기가 자기네 자리이니 확인을 해보라는 것 같았다. 우리는 티켓을 보여주며 그럼 어디로 가야 하는지 조언을 부탁했다. 소매치기범인 줄은 꿈에도 생각지도 못한 채.






자리를 비켜주기 위해서 선반에 있는 짐을 내리는데 갑자기 태세를 전환하더니 본인들이 다른 자리로 가겠다며 우리 보고 여기에 앉으라고 한다. 왜?라는 물음이 잠깐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아 착한 애들이었구나’ 했다. 그들은 다시 우리 짐을 선반 위에 올리는 걸 도와주었고 그렇게 다른 칸으로 사라져 버렸다. 양보를 받았지만 괜스레 찝찝한 마음을 풀 수가 없어, 주위를 둘러보니 한국인이 눈에 띄었다. 그분에게 다가가 조언을 구했지만 본인도 알지 못한다는 답변만 돌아올 뿐이었다. 그렇게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갔는데. 자리에 놓인 내 힙색. 응? 힙색은 내가 지금 메고 있는 가방 안에 있어야 하는데? 무슨 상황이야 이거?


정말 꿈인 줄로만 알았다. 재빨리 힙색 안을 뒤져봤지만 역시나 현금은 다 털리고 없었고, 다행일지 여권과 카드는 제자리에 놓여 있었다. 현금만으로도 돈이 꽤 되니, 다른 건 건드리지 않았나 보다. 그렇게 5분도 안 되는 시간만에 우리는 10일 치 여행 경비를 눈앞에서 잃어버리게 되었다.






추측하건대, 선반으로 물건을 올리는 과정에서 나의 양손이 자유로운 틈을 타 그 사이에 가방에 손을 댄 것 같다. 과정이 뭐가 중요하겠냐만. 스위스로 가는 길 내내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꿈인 것 같았고 꿈이었으면 싶었다. 무엇보다 잃어버린 돈이 친구와 나의 공동경비였기 때문에 친구에게도 피해를 준 것 같아 내내 마음이 쓰였다. 내가 힙색을 내 몸에 차고 있었더라면, 내가 돈을 여기저기 나눠서 보관했더라면, 아니 내가 힙색에 돈을 넣지 않았더라면. 후회와 절망이 가득한 기차 안이었다.


친구는 나를 원망하지 않았다. 우리의 돈을 훔쳐간 도둑을 욕하고 자신도 바로 옆에서 눈치채지 못했다며 말을 건넸다. 내가 그 상황이었다면 친구를 원망하는 마음이 조금도 없었을까? 오로지 도둑만 탓하고 친구의 탓으로 돌리지 않을 자신이 있을까? 솔직히 자신 없다. 이런 못된 생각을 가진 나와는 다르게 친구는 나만의 잘못이 아닌 듯, 우리가 함께 처한 이 상황을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지에 대해 의논하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상황을 수습하기에 바빠서 고마움을 느낄 시간이 없었는데, 지금에 와서야 이렇게 고마움을 표현해본다. 나를 혼자 두지 않아 줘서 고마워.


Thank you, My Best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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