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원하는 게 없던 게 아니라, 말하지 않았던 거였다

나에게 솔직하지 못해서 나를 잃는 과정

by 느린 마음

얼마전까지 스타트업의 어설픈 공동 창업자였다.

대표의 의견을 복종해야 했고, 팀원들의 의견도 존중해야 했다.

점점 내 의견을 낼 자리는 사라졌고, 일은 점점 재미없어졌다.


처음엔 괜찮다고 생각했다.
“회사가 잘되기만 하면, 나는 어떤 희생이든 감수할 수 있어.”
그게 내 스스로를 설득한 방식이었다.

몇 년이 지나고 나서야 그것이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90년대에 태어났다.
그 시절 우리는 ‘감정을 드러내는 건 약한 거’라고 배웠다.
모두에게 그게 당연했지만, 남자는 특히 더 그랬다.

“남자가 울면 안 된다”, “말하지 말고 참아라”, “상대방 기분 먼저 생각해라.”
이런 말들이 하나의 도덕처럼 작동했다.


그런 문화 안에서 자란 나는,
감정을 느끼는 법도, 표현하는 법도 배우지 못했다.

내가 회피형 인간이었단 걸 안 것은 모든 것을 잃고 난 다음의 일이었다.


그전까지는 내가

‘조심성 있는 사람’, ‘배려하는 사람’, ‘맞춰주는 사람’인 줄 알았다.

하지만 사실은 내 감정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던 것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에게는 하고 싶은 게 있었다.
하기 싫은 것도 분명히 있었다.

그런데 그걸 꺼내 말하는 과정이 너무 불편해서 침묵했을 뿐이었다.

어쩌면 설득이 되지 않은 상황을 두려워했는지도 모르겠다.


갈등을 피했고, 의견을 접었고,

나의 생각과 감정은 밖으로 향하지 않고 안으로만 쌓였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 억눌린 감정은 수동적인 공격성으로 변했다.

표출되지 않고 내가 감정을 마주하지 못한 댓가로

우울증의 늪에 빠지게 되었다.




애착이론의 창시자인 존 볼비는 이렇게 말했다.
'회피형 애착을 가진 사람은 감정을 억누른다'

이것은 착함이 아니라, 거절에 대한 두려움이 만든 방어기제이다.

전문용어로 억제형 방어기제라고도 한다.


감정을 억누른 채 오랜 시간 선택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자아를 잃는다.

그리고 자아가 사라진 자리에 우울이 찾아온다.

회피적 성향이 결국에 어떻게 되는지를 완전하게 기술했는데,

돌이켜보니 내 이야기였다.



나는 희생한 게 아니었다.
그저 감정을 말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논쟁이 불편했고, 갈등이 무서웠고, 그래서 내 욕망을 조용히 숨기고만 있었다.

감정을 억누르면서 나는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요즘 나는 자주 나에게 묻는다.
“정말 하고 싶은 거야?”
“이건 진심이야, 아니면 회피야?”

작은 감정부터 꺼내는 연습을 하고 있다.
작은 선택부터 내가 하도록 해본다.

그게 나를 되찾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이 글을 보게되는 분은
누군가를 위해 괜찮은 척하고 있지는 않은지,

그게 희생인지, 아니면 회피인지
늦기 전에 스스로에게 진지하게 물어보고 감정을 직면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