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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나 Dec 27. 2022

2. 실패야 미안해

실패는 나쁜 것만이 아니더라.



망했다. 이 생각을 했을 땐 반년이 지나가 있었다. 돌이킬 수 없이 망했다. 이 생각을 했을 땐 또 반년이 지나간 이후였다. 이제 아마도, 다시는 이 글을 이어 쓰지 못하겠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미루고 미루다 언젠가는 내가 여행을 주제로 글 쓰려고 했단 사실마저 영영 잊어버릴 테니까. 아니 대체 누가 1년 전에 1화를 올린 글을 이어 쓰냐고.


언젠가 의사 선생님이 내게 All of Nothing이냐고 물어보셨다. 1분이라도 늦을 거 같은 수업이라면 아예 가지 않는 완벽주의자 성향을 가지고 있느냐고. 아니라는 확신이 있었다. 끝나기까지 10분 남은 수업에 들어갔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하필 그날따라 수업이 일찍 끝나서, 문을 열자마자 짐을 챙기는 친구들과 눈이 마주쳤다. 선생님도 어떻게든 온 건 잘했지만 출석 인정은 어렵지 않겠냐며 곤란한 웃음을 터뜨리셨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면, 완벽주의자 성향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다.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완벽히 준비되지 않으면 시작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많은 사람이 그렇듯이.


최근 몇 달, 어쩌면 몇 년 동안 나는 기회를 잡으려면 잡을 수 있으면서도 기꺼이 놓치는 만행을 저질러왔다. 정말이지 만행이다. 비록 사소한 일이긴 했지만 누군가는 기회가 없어서 안달인데 나는 온갖 핑계를 대고 밀어냈기 때문이다. 기반에는 내가 이걸 제대로 해낼 수 있을까 하는 불안이 존재했다. 


초등학교 5학년, 과학 실험 후기를 적은 숙제를 보신 과학 선생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 글을 보면 시작은 중학생에 비견해도 무리가 없는데 끝은 유치원생이 쓴 것 같다고. 선생님의 솔직한 평가는 저주로 변질하여 나를 괴롭힌다. 시작은 창대하나 끝은 미미하리라. 의도는 아니셨겠지만 예언을 하셨어요! 선생님!



pixabay



용두사미의 저주로 늘 끝맺음이 좋지 않으니 시작하기도 전에 실패할 결과를 생각한다. 어차피 흐지부지 끝날 걸 아니까 시작도 하지 않는 경우는 더 많다. 괜찮은 기회가 와도 핑계를 대고 밀어버린다. 금괴가 들었을 수도 있는 상자를 매번 뻥 차버리는 것이다. 이번에도 그랬다. 제대로 준비하지 않았단 이유로 올해 초 야심 차게 준비한 (준비 기간과 별개로 나의 마음가짐이 상당히 야심 찼다.) 이 ‘현재에게 과가’를 미루고 미루며 방치했다. 도대체 이런 만행은 어떻게 멈출 수 있을까?


한 번 땅을 파면 굴삭기처럼 파고든다. 결국 돌이켜보면 스스로 뿌듯해질 만큼 성취한 기억이 없지 않나, 싶은 생각에 닿는다. 성적은 무난했고 공모전은 늘 떨어졌고 운동 신경도 영 못하다. 나의 정신 건강을 판단하기 위해 본 시험엔 끈기 없음이라는 말로 귀결되는 긴 문장이 나열되어 있었다. 그런데 정말 그것뿐인가? 좀 더, 좀 더 과거로 돌아가면 옛날의 나는 분명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쌀알 한 톨에 불과하더라도 가끔은 겁 없고 도전적이었다. 바보 같았을지언정 용감했다. 


겁도 없이 옷가지 몇 벌과 일기장, 세면도구만 챙겨 영국으로 홀랑 떠난 날도 그랬다. 로밍도 안 하고 유레일 패스도 끊지 않고 오직 일주일 치 숙소만 잡고 출발했던 날은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가장 모험적이었던 순간인지도 모른다. 


그때의 용기는 어떻게 생긴 걸까? 왜 나는 갑자기 용감한 기사에서 초라한 겁쟁이가 된 걸까? 그 이야기를 하려면 반수생이었던 시절부터 말해야겠다. 부끄러워서 가족 외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혼자 준비하던 반수.

그러니까, 나는 대입에서 그닥 좋은 결과를 얻지 못했다. 그래도 가고 싶었던 과 중 하나에 합격했으니 되었다 싶은데도 이상하게 겉도는 기분이었다. 가고 싶었던 과가 아니었고 환경도 달라졌다. 또 낯을 많이 가리는 내가 누군가와 새로 친해지는 것도 힘들었다.


여러 가지 이유가 겹쳐 반수를 준비했다. 편도로 집에서 학교까지는 2시간이, 집에서 학원까지는 1시간 반 정도가 걸렸다. 약해진 건강을 챙기기 위해 억지로 시작한 헬스장도 집에서 1시간 거리였다. 쉬는 날이 없었다. 주중엔 학교애 다니고 하교하면 학원과 헬스장을 갔다. 주말엔 과제와 학원 숙제를 했고. 즐거울 일도 친구도 없었다. 빨리 모든 게 끝나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모든 게 끝나고 나니 남는 게 없었다. 유의미한 결과를 얻지 못했으니까. 노력은 물거품이 되었고 시간은 의미없이 허비되었다.


그게 반수와 나 사이에 있었던 모든 일이다. 아무 일도 없었다. 또 하나 실패의 역사를 추가했을 뿐. 허망해졌다. 이제 뭘 해야 하지? 목적도 목표도 없고 의욕도 나지 않았다. 부모님이 물으셨다. 


앞으로 어떻게 할 거냐고. 


누구보다 내가 답을 알고 싶은 질문이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누가 알려주면 참 편하고 좋을 텐데. 그냥 다 놓고 쉬고 싶어요. 그렇게 말하기 직전에 부모님이 다시 말씀하셨다.


여행을 좀 다녀오라고. 휴학하고 여행을 다녀오면 하고 싶은 것도 좀 더 보일 거라고.


안개가 쳐진 것처럼 흐릿하던 내 삶에 갑자기 해가 들었다. 먹구름이 사라지고 해가 들었다. 기꺼이 그러기로 했다. 나의 실패를 정리하고 새로운 출발을 하기 위해.


아. 세상에.

내가 그토록 오래 떠올리고 그리워하던 여행이 실패에서 시작했다니.



pixabay



대학교가 마음에 들었다면 반수를 할 생각을 했을까? 반수에 실패하지 않았다면 여행을 시작할 수나 있었을까? 내가 그토록 무서워하고 피하던 ‘실패’가 새로운 길을 물어 주었다. 그걸 왜 이제야 깨달은 건지. 반대로 또다시 입시 싸움에서 패배할 게 두려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만족스럽지 않은 학교를 만족스럽지 않게 다녔을 것이다. 반수를 시도하지 않은 자신을 한심하게 여기면서 말이다.


실패한다고 세상이 끝나지 않나 보다. 하긴 그렇다. 돌이켜보면 별다른 성취의 역사를 쌓은 기억이 없지만 그렇다고 불행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 좋은 걸 보았고 많은 걸 생각했고 마음 맞는 사람을 만났다. 단지 예상했던 방향과 다른 미래에 갈 뿐이다. 다르다고 나쁘다는 법은 없고.


실패가 무서워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가 아는 미래만 경험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물 먹을 게 두려워 수영하지 않으면 나는 영원히 바다를 보지 못하게 되지만 수영을 배우다 물 먹으면 적어도 물이 어떻게 하면 코가 아프지 않게 물 먹을 수 있는지는 아는 거다. 물론 말은 쉽고 행동은 어렵지만,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마음이 조금 놓인다.


사실은 망하지 않았다. 비록 1년이 걸리긴 했지만 이렇게 다음 편을 쓰고 있으니까. 시간은 무한하지 않지만 손 놓을 만큼 빠르게 사라지지도 않는다. 대체 누가 1년 전에 1화를 올린 글을 이어 쓰냐고? 내가 쓴다. 조용히 해라, 1분 전의 과거. 어쨌든 쓰면 된 거 아닌가?


최근에 한 친구가 그런 이야기를 했다. 넌 끈기는 없는데 근성이 있다고. 꾸준히 하지는 못하는데 띄엄띄엄은 한다고 말이다. 이번에는, 시작은 창대한데 끝은 미미하다는 초등학교 선생님 말씀을 잊고 이 친구의 말을 믿어볼까 한다. 저주는 항상 축복으로 풀리는 법이니까.


아래는 내가 인생에서 가장 지쳐 있던 시기, 목적도 목표도 없고 실패의 쓴 기억만 가득 안고 있던 시기로부터 반 년 뒤에 썼던 일기이며 유럽 여행을 떠나며 처음으로 쓴 일기다. 다시 읽어보니 입시 실패로 얻은 우울함은 사라지고 설렘과 불안만 가득하다. 참, 그렇다. 실패는 영원하지 않다. 불안도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실패하면 실패한 대로 얻을 게 있다.






수능 전날 같다. 영 믿기지가 않는다. 수화물 맡기고 티켓 뽑을 때 런던에 얼마나 있을 건지, 스페인으로 가는 항공 티켓이 있는지 물었는데 아직 온라인으로 티켓을 뽑지 못했다. 걱정하다 호텔 바우처 뽑은 것이 생각나 그게 있다고 말하자 소지하신 거냐고 묻고는 티켓을 건네주셨다. 멀리서 엄마가 지켜보다가 무슨 일 있었냐고 너무 오래 있었다고 말했다. 물품검사를 하는데 미스트랑 칼이 있어서 잠깐 지체되었다. 미스트는 용량을 보곤 괜찮다고 돌려줬고 문구용 작은 칼은 빼앗겼다.



사진만 보는데도 비행기를 탄 첫 순간의 설렘이 너무 생생히 떠오른다



비행기는 생각보다 크고 넓고 좋다. 의자마다 담요와 베개가 놓여있다. 더워서 니트 카디건과 카키 잠바까지 벗어서 가방에 넣어뒀다. 비행기에 타서 여권은 파란 가방 안에 넣으려고 보니까 가방이 안 보였다. 호텔 바우처며 해리포터 스튜디오 예약권도 거기 넣어놔서 잃어버린 줄 알고 식겁했다. 다른 건 잃어버려도 다시 뽑으면 되지만 스페인 호텔 바우처를 잃어버리면 런던 입국이 불가할까 봐. 


지금은 12시 35분. 50분에 수속 마감을 하고 1시 10분에 비행기가 출발한다. 좌석은 46K. 창문 쪽이라 꽤 좋다. 3자리 연속인데 아직 내 옆은 아무도 안 왔다. 공항 안에서는 그래도 와이파이가 잘 터졌는데 여기는 와이파이가 안 된다. 13시간을 나는 뭘 하면서 버텨낼까. 노트북이 있어서 다행이다. 


ㅋㅋ 노트북 전혀 안 한다. 지금은 5시. 출발할 때는 졸았는데 그 뒤로는 전혀 잠이 안 온다. 5시간은 더 가야 할 듯. 와 이게 생각보다 장난 아니구나 싶다.


점심을 치킨과 피쉬 중에 고르라 했는데 난 구운 닭가슴살 같은 걸 생각하고 치킨이라 했다. 근데 삼계탕과 닭죽 사이의 이상한 무언가가 나왔다. 나름 맛은 좋았다. 연어 샐러드도 있고 초코 케이크는 크고 달았다. 비행기에 남자 승무원이 있는데 슈퍼 내추럴의 딘을 닮았다 슈퍼 내추럴 팬인 친구가 봤으면 진짜진짜 좋아했을 텐데!


영화를 하나 봤다. 스쿠비두비두! 옛날에 즐겨보던 애니메이션인데 이번 시리즈 내용은 오페라의 유령과 아메리칸 아이돌을 섞어 패러디한 느낌이었다. 자막이 없고 정확하게 알아들은 부분도 적지만 발음도 느리고 행동도 과해서 그냥 영화를 볼 때보다는 훨씬 이해하기 쉬웠다. 


초반에 승무원이 마실 거 뭐 줄지 물어보는데 오렌지! 하고 한국 발음으로 말하니까 영 못 알아들어서 슬펐다. 근데 주변에 다 오렌지 주스를 시켜서 그런지 오렌지가 인기 많네, 그치? 옆에서 같이 일하는 승무원에게 영어로 말하며 지나가더라. 이런 사소한 것까지 모든 게 설렌다. 여전히 내가 런던에 간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자고 게임하고 노래 듣다가 밥 먹고 8시 30분. 메뉴는 군만두에 잡채 섞인 메인과 조금 짠 고기 샐러드, 빵과 버터, 오예스였다. 오예스가 하늘 압력에 빵빵해진 게 왠지 웃긴다. 



정말 신기했는지 놀랍게도 사진으로 남아있는 빵빵한 오예스



한국 시각으로 오후 9시인데 지나치게 밝다. 창밖에 러시아의 눈 쌓인 대지가 펼쳐져 있다. 조금 신기하기도 하고 졸리진 않은 거 보니 시차 적응 걱정은 안 해도 될 듯싶다. 자꾸 목이 간지럽고 아파서 불편하다. 혹시 미세먼지가 여기에도 있나. 


모스크바 시각으로는 지금이 3시이다 난 한국에서 1시에 출발했으니 8시간을 2시간으로 쓴 것이다. 런던은 1시. 변하지 않았다. 한국과 8시간 시차가 난다. 그리고 서유럽 옆으로 가면 또 한 시간 차이 나고……. 시간이 이렇게 유동적인 개념일 줄이야. 시간 역시 인간이 만든 문물 중 하나인가 보다.


창문에 얼음 서리가 생겼다 5월인데 러시아는 정말 추운 나라인가 보다 ㅋㅋㅋㅋㅋ 신기해!



성에가 잔뜩 낀 비행기 창



런던행 비행기를 탔다. 러시아 공항에 내려 기다리는 내내 와이파이가 되어서 폰으로 떠들었다. 런던 비행기를 탄 뒤로는 한국 시간으로 새벽이어서 자꾸 정신을 차리면 잠들어 있었는데 그때마다 승무원이 깨웠다. 음료수를 주고 밥을 주고 입국할 때 필요한 서류를 주고. 


밥은 참치 감자 샐러드에 메인 요리는 피쉬로 했다. 구운 감자와 이름 모를 생선이 카레 소스에 요리되어 나왔는데 꽤 맛있었다. 속이 안 좋고 계속 목이 간질거리며 부은 느낌이 난다. 콧물도 나고. 감기라도 걸린 걸까 봐 걱정이다. 


엄마가 카드로 숙소비 34파운드가 결제되었다고 말했다. 좀 이상하다. 거기는 도착해서 결제하는 곳인데 왜 먼저 결제가 된 거지? 가서 물어봐야겠다. 벌써부터 물어볼 게 걱정이다. 혹시 내가 시차를 혼동해 잘못 예약한 건 아닐까? 거의 7만원에 가까운 숙소라 더 걱정 걱정 불안 불안. 제발 아무 일도 없길! ㅎ




어우, 길다. 미리 말해두는데, 나의 일기는 늘 이렇게 길다. 앞으로는 조금씩 잘라서 올려보겠지만 스크롤의 압박에 먼저 도망갈 필요는 없다. 어차피 의미없이 세밀하게 적은 사소한 이야기니까, 가볍게 넘겨도 좋다.


제발 아무 일도 없길! ㅎ 그래서 아무 일이 없었느냐고?

아무 일. 있었다. 상당히 많았다.


이야기를 순차적으로 진행할 생각은 없지만, 비행기에서 쓰던 일기가 복선이 되었으니 다음엔 험난했던 영국에서의 첫날을 묘사해야겠다. 새벽에 비행기에서 내렸는데, 유심도 안 샀고 로밍도 안 했고, 숙소도 문제가 생겨선 한밤에 체조하듯 오래 걸어다녔다. 소소한 모험을 하는 기분이었다. 따지고 보면 곧 위험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모험이라니. 역시 실패는 나쁘기만 한 게 아닌가 보다. 새로운 걸 접하게 해주니까. 


그동안 오해한 실패에게 심심한 사과를 전한다. 그래서, 끝이 흐지부지 될 두려움도 실패할 걱정도 무시하고 가보기로 한다. 다음 편이 내년에 나오든 내후년에 나오든 망했다고 버려두지 않으면 망한 게 아니니까. 여행을 출발하듯 설렘 가득하게 '현재에게 과거가', 다시 출발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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