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 그 간절함을 통해.
이별과 혼란 속의 출발
아들의 돌을 하루 앞둔 날, 나는 열차에 몸을 실었다.
수없이 반복하며 마음속에 담아둔 “가야 한다”는 약속을
드디어 지킬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 깊은 곳에서 작은 기쁨이 스며올랐다.
‘잘 지내고 있을까.’
짧은 한 문장이 내 안에서 잔물결처럼 번졌다.
그리움과 설렘이 뒤섞인 마음속에서, 심장은 조용히, 그러나 재촉하듯 뛰었다.
지난 몇 달 동안 두 아이는
마치 ‘엄마’라는 존재를 잃어버린 듯했다.
딸아이는 나를 ‘언니’라고 불렀고,
아들은 낯선 사람을 대하듯 주변을 돌며 나를 살폈다.
하루라도 잊지 않고 기다리길 바랐던 내 마음은
현실의 벽 앞에서 조용히 깨져버렸다.
그렇게 나는
‘엄마’라는 존재를 다시 아이들에게 심는 것부터 시작하며
시골 생활을 이어갔다.
고난 속의 선택과 결단
그는 시골에서 지내고 있었다.
여전히 술에 기대는 날이 많았고,
예전과 다르지 않게 나를 향한 불만과 불평은 밤늦도록 이어졌다.
하지만 예전처럼 그 모든 말을 침묵으로 넘길 수는 없었다.
나는 그의 배려를 얻고 싶어,
내가 겪어온 지난 시간을 조심스레 꺼내 놓았다.
남은 개월동안 더 약을 복용해야 한다는 의사의 진단,
아직 회복기 환자라는 사실,
그리고 앞으로 몸을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 들었던 당부들까지.
그 모든 말은 곧 도움을 요청하는 마음이었다.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은 절박함,
가냘픈 몸과 마음을 잠시라도 내려놓고 싶은 갈망이 있었다.
그리고 내가 의지하고 위로받고 싶은 그 ‘누군가’가
사랑하는 사람, 바로 그이길 바랐다.
그러나 나의 바람일뿐이었다.
어느 날 밤, 생각에 잠겨 누워 있던 그가 느닷없이 말을 꺼냈다.
이미 마음을 정한 듯한 표정이었다.
“30만 원을 줄 테니… 딸아이만 데리고 서울로 올라가서 살면 어떻겠어.”
서울 외곽에는 값싼 방이 많고,
근처 공장의 남자들을 상대로 세탁 일을 하면
두 식구가 먹고사는 데는 충분하다는 설명까지 덧붙였다.
그의 말은 제안이라기보다 통보였다.
그리고 내게는 현실적이지도, 가능하지도 않은 이야기였다.
설사 그런 환경이 주어진다 해도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삶의 방식은 아니었다.
하지만 반복되는 그의 무책임과 감정 폭주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한계를 내게 깨우쳐 주었다.
그는 과장으로서 정착의 의지도, 또 가정을 책임질 최소한의 마음도 없었다.
그의 말대로 하기로 했다.
그의 결단이 선이상 더 이상 버틸 수도 묵인할 수 도 없다는 생각이었다.
맘을 다지는 며칠을 보내고,
밤새 잠 못 이루며 떠날 마음의 준비를 했다.
작은 옷 가방을 챙기는 두 모녀를 지켜보며
아빠 무릎에 앉은 아들의 눈빛에는 ‘엄마, 어디 가?’ 라는 조용한 질문이 가득했다.
나는 그 눈빛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또다시 아픈 이별을 맞아야 했다.
‘엄마… 왜 철이는 안 데리고 가?’
내 손을 놓칠새라 꼭 잡은 딸아이는 연신 뒤를 돌아보며 동생을 걱정했고,
대답을 구하는 눈빛을 나에게 보냈다.
나는 그 눈빛 앞에서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아쉬움과 눈물을 삼키며 다시 서울로 향했다.
당분간 언니 집에서 머물며, 마음을 추스르고 새로운 출발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사를 앞둔 며칠 전,
모친을 앞세운 채 시어머니와 시아주버니가 아들을 데리고 찾아왔다.
들어오자마자 시어머니는,
우리가 서울로 올라온 그날 이후 있었던 일들을 숨김없이 쏟아내기 시작했다.
남편은 우리를 떠나보낸 뒤,
아들을 시어머니에게 맡기고 자취를 감췄단다.
그래서 그 두 사람은,
우리 부부가 일부러 아들을 할머니에게 떠 맡기고 계획적으로 떠난 것 아니냐며 의심했다.
그리고 이어진 말은 충격적이었다.
"친아들이 아니니까 버리고 간 거지.
아니면 어떻게 딸아이는 데리고 가면서 아들만 남겨둘 수 있겠느냐?"
참으로 황당하고 믿기 어려운 발상이었다.
아들은 아버지를 꼭 빼닮은 얼굴이었다.
"나는 친손인지 의심스러운 아이는 키울 수 없으니, 알아서 해라!"
두 사람은 내 입장표명을 듣기도 전에 아들을 마루에 내려놓고,
붙잡힐세라 허둥지둥 골목 밖으로 달아났다.
그들이 사라진 골목길에서,
등에 업힌 아들은 할머니를 찾듯 울고 있었다.
나는 당혹감 속에서 분노의 눈물을 흘렸다.
그는
아들을 데려간다하면 딸 아이는 고아원에 버린다고 했다.
그러니 딸을 데리고 가라고 했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두 아이를 내게 보낸셈이다.
'두고 보자, 나쁜 자식.
너 없다고 내가 못 키울 것 같아?
내게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걸, 너는 모를 거다.’
오해와 억측 속에서도 마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주어진 현실을 담담히 받아들이며, 아이들과 함께 새로운 출발을 결심했다.
신앙을 통한 회복과 은혜
그렇게, 그가 없는 세 사람의 새로운 생활이 조심스럽게 시작되었다.
골목 입구에 '양장 수선 전문' 이라는 간판을 걸었다.
언니 의상실에서 배운 기술을 활용활 생각이었다.
약은 계속 복용했지만, 몸과 마음은 안정되어갔고 체력도 나날이 나아지고 있었다.
이사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언니를 앞세워 찾아왔다.
언니는 조금은 민망한 얼굴로 내 눈치를 살폈다.
“자꾸 찾아와서 가르쳐 달라고 하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같이 왔다” 고 했다.
다시는 그를 보지 않겠노라,
마음속으로 수없이 다짐하며 결별을 선언했던 터라 나는 냉정하게 거절했다.
그러나 그는 각오를 하고 온 듯, 아무 말 없이
방 한켠에 앉아 수 시간이 지나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 그의 태도가 어쩌면 처음부터 계산된 계획이었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그는 우리와 다시 함께 살게 되었다.
한편,극적인 상황 속에서도 지켜주신 주님의 사랑은 내 마음 깊이 스며들었다.
역경과 시련은 오히려 나를 단단하게 만들었고,
나는 능동적으로 주님과 관계를 맺는 믿음생활을 다시 이어가고 있었다.
날마다 설레는 마음으로 예배를 기다렸다.
예배가 시작될 때마다 벅찬 감사가 마음 가득 스며들었다.
찬양과 기도, 말씀 속에서 감사와 감격의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말씀은 꿀처럼 달콤했고,
내적 변화와 영적 성숙이 매일의 삶을 은혜로 채웠다.
기다리던 부흥회가 다시 시작되었다.
전날 저녁,
그는 만취한 채 집에 들어왔고, 눈빛은 이미 정상적이지 않았다.
휘두르는 굵은 막대기는 가차 없었고,
사정없는 주먹에 눈 주변에는 금세 큰 멍이 들었다.
그는
부흥회를 앞두고는, 이유를 알 수 없이 더욱 이성을 잃었다.
지난해, 멍든 얼굴이 부끄러워 부흥회에 참석하지 못했던 나는,
그때의 후회와 참회의 시간을 떠올리며,
죽음 앞에서 간절히 소망했던 기회를 또 다시 놓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다음 날 부터, 나는 안대를 하고 예배에 참석했다.
부흥회를 마치는 날, 세례를 받기 위해 일행은 분주히 움직였다.
당시 교회는 선교사를 강사로 초빙해 부흥회를 진행했고,
마지막 금요일 오후에는 물이 허리까지 차는 장소에서 침수 세례를 받도록 되어 있었다.
설렘과 흥분 속에서 가장 예쁜 옷을 골라 입었다.
세례 받는 자리에서 안대를 벗었다.
불필요한 모든 겉치레를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나아갔다.
눈 주위에 남은 깊은 멍 자국은 중요하지 않았다.
사람들의 시선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 서는 나 자신이었다.
세례를 마친 뒤, 모두 물가에 모여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세상을 다 얻은 듯한 충만한 기쁨과 감사에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목사님의 축복 기도를 받는 동안,
내 안타까운 기도 속에 그는 자연스레 자리했다.
그가 속히 진리 안에서 자유를 누리며,
주님을 만나 세례를 받는 날이 허락되기를 간절히 간구했다.
그렇게, 내 삶의 한 조각이자 간절히 갈망해온 세례를 받고 난 뒤, 며칠 후 꿈을 꾸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꿈은 늘 칼라이며, 한 장면도 흐릿함이 없었다.
그 내용은 놀랍도록 질서가 있었고,
잠에서 깬 뒤에도 사라지지 않는 명확한 메시지로 남았다.
그래서 성경 속의 선지자들이 본 광경을
‘마치 현실에서 본 것처럼’ 기록할 수 있었던 이유를, 나는 이따금 허락되는 영적 꿈을 통해
깊이 공감하게 된다.
그리고 나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세곳의 장소로 초대되었다.
그 중,오랜동안 이해되지 않고, 아직도 확정할 수 없는 한 곳.
나는 지금도 문득 문득 주님께, 그 곳이 어딘지, 그 환경의 의미를 무거운 마음으로 여쭙곤 한다.
성경 말씀을 비추어 조심스레 짐작해보기도 하지만,
그 해석은 어디까지나 멈칫하게 되는, 너무나 조심스러운 영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