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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어단 Mar 23. 2022

80년대로의 끝없는 부유

Macintosh Plus의 Floral Shoppe를 듣고

https://youtu.be/aQkPcPqTq4M


베이퍼 웨이브가 하나의 밈으로 자리 잡은 2010년 이후, 빠른 추락세를 보이는 여타 인터넷 밈들과 달리 베이퍼 웨이브는 계속해서 인터넷 서브컬처 문화 전반에 그 입지를 점점 확고히 굳히고 있다. 과학 테크놀로지의 엄청난 진취를 이룩하고, 우리의 삶이 한결 편해진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나, 사람들은 어째서인지 과거로의 귀화 본능을 보이려 한다. 미래의 끝없는 수평선을 향해 끊임없이 진보하던 인간들이 제 다시 과거에 머무르게 된 것은 상당히 기묘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초장부터 직설적으로 표현하겠지만, 이 앨범은 이미 존재하던 음악을 길게 늘여 놓은 것일 뿐, 개인의 뛰어난 음악적 역량이 보인다던가 창의성이 돋보인다던가, 하는 앨범은 아니다. 요리로 따지면 3D 프린터가 만들어낸 요리다. 분명 맛도 있고, 보기에도 좋지만 이것을 훌륭한 요리라고 칭하기에는 난감하다. 그도 그럴 것이 다른 요리사들이 손수 제작한 요리를 깔보는 것이 되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곡과 베이퍼 웨이브 식으로 재창조해낸 곡은 엄연히 다르다. 예컨대 우리의 기억과도 같은 것이다. 기억이라는 것은 상당히 믿을 것이 되지 못하여 그 기억을 상기시킬 때마다, 당시에 품고 있던 관념들이 멋대로 기억에 필터를 씌어서 왜곡되어 버린다. 단일의 사건일지라도, 사람들마다 기억하는 바가 다르고, 영상이나 사진 같은 객관적인 과거의 기록물과 대조해봤을 때 그 치부가 더욱 명확히 드러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 멋대로 왜곡하고, 부풀리고, 재창조해낸 기억에 대한 굳은 신뢰처럼, 우리는 두 곡이 같은 것이라고 믿지만, 원론적으로는 전혀 다른 두 곡이다. 믿기 힘든 이야기이겠지만, 실제로 원곡과 2차로 편곡한 음악은 서로 각각 다른 심상을 지니고 있다. 어째서 냐면, 오리지널의 원곡을 부른 사람은 '과거의 추억을 되살리는 프로젝트의 일환' 으로써 곡을 만든 것이 아닌, 그저 당시 유행하던 음악적 흐름에 편승한 것이었겠지만은, 후대의 사람에 의해 새로 편곡된 곡은 당시 시대 상황에 대한 특별한 추억들이 녹아있고, 그것이 재창조 과정에도 은근한 영향을 끼쳐, 청취자들로 하여금 노스탤지어의 감성이 스며들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즉, 창작자의 의도도 다를뿐더러 그 노래를 소비하는 사람들도 바뀌었기 때문에 전혀 다른 심상을 전해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기억의 모호함과 불안정성에 보내는 나의 탐미적인 찬사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베이퍼 웨이브라는 용어의 근원에 대한 꽤 많은 설들이 오가지만, 나는 이 또한 기억의 특징에 기인했다고 생각한다. Vapor, 즉 수증기는 상당히 덧없으며 일시적이다. '행복했던 과거의 나날들'이라는 것도 한시적이다. 행복했던 순간들은 이토록 한정적이기에, 깊은 밤하늘의 심연 속 빛나는 별들처럼 더욱 특별하게 보일 수밖에 없고, 더욱이 기억으로는 분명히 존재하나 직접 만질 수 없기에 더욱 애틋한 마음이 든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베이퍼 웨이브의 미학이다.

기억의 무수한 편린들의 왜곡과 과장을 구체화시켰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는 작품이다. 기억에 대한 뇌의 독자적인 왜곡을 단순 정신 착란이라고 치부해버릴 수도 있겠지만, 감미료가 없으면 음식도 삼삼해져 버리듯이, 일종의 정신 착란이 있기에 우리의 과거가 휘황찬란하고 풍부했던 모습으로 남아있던 것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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