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 때 나는 인생이란 게 거대한 줄 알았다.
언젠가 커서 뭔가를 이루는 것,
무언가 대단한 사람이 되는 것,
그게 인생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서른을 지나 마흔을 향해 가면서
인생이란 건 생각보다 거창하지 않았다.
그저 오늘 하루를 어떻게 살아내느냐의 문제였다.
워킹맘으로 살던 시절엔 하루가 늘 전쟁 같았다.
출근길엔 아이의 울음소리를 모른 체하며 등원시키기 바빴고,
퇴근길엔 회사의 일들을 머릿속에서 지우지 못한 채 집으로 향했다.
하루를 버텨냈다는 안도감보다
‘이렇게 나도 아이도 힘든 삶이 맞나?’라는 의문이 머릿속을 떠다녔다.
멈추지 않고 달려야만 원하는 걸 얻는다고 믿었다.
잠시 멈추는 일은 다시 뛰기 위한 과정일 뿐,
멈추는 건 게으름이라 여겼다.
그러다 몸이 아파오자 ‘멈춤’ 버튼을 눌렀다.
하루 종일 집에 있으니 세상이 멈춘 것 같았고,
아침부터 밤까지 반복되는 집안일 속에서
‘나는 지금 뭘 하고 있나’ 싶은 날도 많았다.
글 한 줄 쓰면 괜스레 안도했고,
글 한 줄도 쓰기 싫은 날엔 소파에 누워 TV를 봤다.
그러다 하원하러 가면 또 죄책감이 밀려왔다.
‘시간을 허투루 보내면 안 돼.’
그 생각이 내 완벽주의를 건드리며 오히려 모든 걸 하기 싫게 만들었다.
휴직한 지 세 달,
육아와 살림, 글을 병행하며 ‘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늘 쉬고 싶었다.
또 다른 마음 한편에서는 ‘지금 뭐라도 해야 돼. 나중에 뭐 먹고살 거야?’
스스로를 다그치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긴 연휴 생활비를 아낀다며 외식을 자제하다가 답답함을 이기지 못해 가족과 고깃집에 갔다.
점원이 고기를 구워주는 곳이었는데, 돼지껍데기 기름이 갑자기 튀어
눈꺼풀과 눈 아래에 화상을 입었다.
너무 황당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그저 아이를 보고 있었을 뿐인데 일이 벌어졌다.
그때 생각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지금은 나대지 말고,
나와 아이를 돌보는 데 집중하자는 결심이 섰다.
결국 돈이 떨어지면 다시 움직이게 될 것이고,
그때 쉬어둔 시간이 오히려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그 대신, 나를 돌본다는 의미로 독서와 글쓰기를 꾸준히 하기로 했다.
인생은 ‘결정적인 한순간’보다
‘조용히 이어지는 수많은 순간’이 더 중요하다.
내 안의 변화는 거대한 사건보다
하루의 선택들이 쌓여 만들어지는 결과였다.
요즘은 자주 그런 생각이 든다.
“인생이 뭐길래 이렇게 어렵지?”
그러면서도 결국 눈앞의 하루를 처리하며 살아간다.
어쩌면 우리에게 인생이란,
그저 오늘 하루를 잘 살아내는 일일지도 모른다.
거대한 목표보다, 남의 시선보다, 오늘의 나에게 집중하는 것이
지금의 나를 가장 살리는 길이라는 걸.
돌이켜보면
내 인생의 가장 중요한 날은 특별한 날이 아니었다.
그저 평범했지만 무너지지 않았던 날들이었다.
무너지지 않는 날들을 하루하루 쌓다 보면
언젠가 다시 뛰게 될 용기를 얻을지도 모른다.
사는 건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어렵다.
그걸 잘 살아내는 건,
나답게 — 내가 원하는 걸 조금씩 해가며 해야 할 일을 해내는 것.
그게 어쩌면, 살아가는 정답이 아닐까.
사실 이번 연재의 제목인 '사는 게 무엇인가요?' 이건 전편 연재를 하는 와중에 불현듯 떠오른 제목을 메모해 놓고 머릿속으로 구상만 하던 연재입니다.
연휴가 끝나면 바로 연재해야지— 다짐했지만, 막상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만 더 쉬어도 돼.”라는 합리화가 고개를 들더군요.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무심하게 물었습니다.
“너, 글 안 써?”
그 한마디에 퍼뜩 정신이 들어 노트북 앞에 앉게 되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마음이 답답해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글쓰기는 그런 답답함을 조용히 풀어주는 가장 좋은 방법인 것 같습니다.
머릿속을 맴돌던 생각들이 문장으로 흘러나오면
묘한 해방감이 들고, 어딘가에서 나를 모르는 한 사람이
이 글을 읽어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조금은 설레기도 합니다.
모쪼록 단 한 문장이라도 누군가에게 위안이 되기를 바랍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