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까지 클럽일을 마치고 들어온 날은 당연히 오후 늦게까지 잠을 잘 수밖에 없어서 밤낮이 거의 뒤바뀐 채로 살았다. 선입견이란 정말 무서워서 지금까지도 대학시절에 홍대앞 클럽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었다고 하면 표정이 바뀌는 걸 제일 먼저 느껴야 할 정도로 시선이 곱지 않지만 그 시절 난 정말 클럽을 사랑했다. 특히 '흐지부지'를. 국민학교 시절 매주 토요일마다 전교생이 왁스를 바르던 바로 그 마룻바닥이 깔려 있고, 어수선한 입구를 지나 내려가던 컴컴한 지하였지만 나에겐 대낮보다 광명을 선사하던 곳이었다. 차별화된 그곳의 음악이 좋았고, 느낀 그대로 표현할 수 있는 춤이 좋았다. 그래서 돈주고 놀기보단 돈 벌며 놀아보자는 생각에서 아르바이트 공고가 붙자마자 지원했고 세상 태어나 처음으로 열심히 일했다. 하나밖에 없는 귀한 딸램이 그런 곳에서 일한다니 물론 엄마의 반대는 상상을 초월했다. 그러나 그런 부모님의 걱정은 정말 한 글자도 내 머리에 입력되지 않았다. 거스를 것 없는 젊음은 절절한 모정을 간단히 짓밟아버렸다.
그렇게 오롯이 나 혼자만의 즐거움에 빠져들어 허우적거리던 어느날 오후, 이제 일어나 일하러 가야겠다고 생각할 무렵 집전화가 울렸다. 침대에서 일어나 천천히 전화기가 있는 안방으로 가던 그 시간은 정말 이상할 정도로 또렷하다. 전화가 울리니 당연히 빨리 가서 받아야만 하는데 그날따라 지나가던 거실에 꽉찬 오후의 햇볕이 기분나빠서 천천히 걸었다. 5월말, 따스해야하고 이제 아침마다 반팔을 입을지 고민해야하던 계절에 유난히 으스스했다. 안방으로 들어가 전화기 쪽으로 다가갈 땐 분홍색 베개 위에 흩어져있던 엄마의 빨간 가디건이 유독 섬찟했다. 엄마는 워낙 부지런하고 깔끔한 사람이라 이부자리 위에 그런 것이 놓일리 만무했다. 그때서야 생각난 엄마의 부재, 엄마는 외할아버지의 기일에 맞춰 이모들과 다함께 경산에 있는 외할머니 집에 갔다. 엄마가 언제 돌아온다고 했더라, 내가 아직도 자나 싶어서 전화를 했나 생각하며 전화기를 집어드는 순간 머리속에서 갑자기 기분나쁜 북소리가 시작됐다. 낮게 깔린 어두운 북소리. 이제 시작이야, 단단히 각오하라는 경고처럼 느껴지던 울림들. 지금까지도 그 시간들이 또렷이 기억나는건 모든 것이 마치 바로 뒤 이 순간을 위해 준비된 것일지 모른다는 기분나쁜 예감을 적중시키던 이모의 첫 마디 때문이었다.
"지아야 너무 놀라지 말고 들어. 너 돈 있니?"
"응, 이모. 그런데 갑자기 왜?"
"엄마가 쓰러져서 병원으로 옮겼는데 니가 며칠 와있어야 할 것 같아. 좀 오래 걸릴 수도 있으니까 짐 잘 챙겨서 내려와. 기차 말고 비행기 타고 와. 그 정도 돈은 되겠어?"
"응, 그 정돈 있어."
"그래, 엄마 치료 잘 받고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바로 와, 가능한 빨리."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무섭게도. 그리고 젊음을 만끽하던 24살의 로지아는 자취를 감췄다.
그 후 난 태어나 한번도 장착해보지 못했던 모드로 돌입해 마치 그 일을 매일 수행하는 회사원처럼 일사천리로 일을 진행했다. 대구까지 가는 비행기 시간표를 알아보고, 공항까지 가는 시간을 고려해 가장 빠른 티켓을 끊었다. 오분도 안 되는 시간에 가방을 싸고 옷을 갈아 입은 후 다시 언제 돌아와 열지 모른다는 기시감에 오싹하며 집의 모든 창과 문을 잠궜다. 처음 타보는 국내선 비행기가 어색하다는 생각은 할 틈도 없이 대구공항에 도착했다. 택시를 타면 정말 위기상황임을 인정하는 것 같은 어린 마음에 치기어리게도 버스를 탔다. 대구 변두리에 있는 공항에서 더 변두리인 경산 시내에 있는 병원까지 가던 버스 안에서의 시간은 짧지 않았다. 대략 한시간 좀 넘게 걸렸던 것 같다. 그런데 거기서부터 내 인생의 타임테이블은 블럭아웃됐다. 자, 하나의 시즌이 끝났다. 그리고 이제 새로운 시즌이 시작됐다. 엄마가 없는. 전혀 또 다른 시즌.
평범한 입원실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엄마는 응급실도 아닌 중환자실에 있었다. 태어나 또 처음으로 중환자실은 아무때나 방문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오전 오후 하루 두 번만 출입이 허용됐고, 병원에 도착해 그 시간까지 기다려야 엄마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의아해서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렇게 오후 면회시간에 만난 엄마는 또 태어나 처음 보는 모습으로 누워있었다. 당장 의사를 만나고 싶었지만 보호자인 아빠가 함께 와야 설명을 해준다고 했다. 아빠도 일하다가 이모의 전화를 받고 급하게 오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아, 왜 아빠와 함께 와야 한다고 생각하지 못했지? 아빠는 옷도 챙겨오지 않았을텐데?
정말 아무것도 없이 도착한 아빠와 같이 의사를 만났을 땐 또 태어나 처음으로 죽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심폐부전으로 쓰러졌고 심폐소생술로 잠시 심장이 뛰고 있지만 소생할 수는 없다고 했다. 받아들일 수 없는 이상한 말들의 조합을 살아날 수 있다는 희망으로 바꾸기 위해 이렇게도 물어보고 저렇게도 물어보니 우리의 그런 모습이 어찌나 답답했던지 의사가 화를 냈다.
"환자 죽는다고요!"
그땐 그렇게 말하는 의사에게 화가 나지 않았다.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빨리 인지하는 것이 먼저였다. 모르는 사람의 고함소리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지금에서야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던 의사도 참 속상해서 그랬겠지 싶지만. 아무튼 그 말이 상황의 전부였다. 우리 엄마는 다시 살아날 수 없다. 반드시 죽는다고 했다. 그런데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엄마가 죽는다고?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거야? 에이... 내가 이렇게 멀쩡한데 날 두고 엄마가 없어진다고? 엄마는 내가 살아있는 한 날 두고 절대 어디 갈 사람이 아닌데?
중환자실 바로 옆에 딸린 보호자실에서 쪽잠을 잘 때에는 중환자실 안에서 나는 소리에 번뜩번뜩 놀라 깼다. 영화나 드라마처럼 갑자기 손가락이 움직이고 눈을 떠서 환자가 살아났다고 간호사들이 부산을 떨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면회할 때 갑자기 손가락이 움찔거릴 때도 있긴 했다. 정말 실낱같은 희망이란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이다. 그런 희망을 붙잡고 간호사에게 눈을 반짝거리며 물어보면 여지없이 차가운 대답이 돌아온다. 근육 경련이라는. 소생의 불빛은 아니다. 그렇게 일주일쯤 지나자 이제 엄마는 눈이 떠지기 시작했다. 안구가 부어오르면서 눈이 감기지 않았다. 수분이 마르지 않도록 깨끗한 거즈로 눈을 촉촉히 덮어놔야 했다. 어느날인가 부터는 배에 멍이 들기 시작했다. 내장이 괴사하기 시작한 것이라고 했다. 절망밖에 보이지 않지만 아직 닥치지 않았기에 절망스러울 틈이 없었다. 그런 상황은 상상속에서도 생각해보지 않은 일들이기에 머릿속에서 더 이상 전개되지도 않았다.
오늘 내일 좀 어려울 수 있겠다는 말을 들은 아침에도 최악의 상황이 바로 닥치리라고는 정말 꿈에도, 한치도 예상이 되지 않았다. 혹시 모르니 싶어 아빠에게 밥을 든든히 먹어두라고 일렀고, 이모에겐 우리도 맛있게 밥을 먹어보자고 힘차게 제안했다. 면회시간을 기다리며 읽을 책을 골라두었고, 보호자들이 사용하는 욕실에서 샤워도 했다. 그리고 점심시간이 되기 전, 우리는 영화처럼 중환자실로 불려들어갔다.
이모는 이런 상황을 예상했었는지 며칠 전부터 나에게 이런저런 일들을 당부해놓았었다. 사람이 죽을 때 옆에서 너무 큰 소리로 울면 안 된다고, 지나치게 슬픔을 표현하면 혼이 이승에 붙잡혀 떠날 수 없으니 너무 소란스러우면 안 된다고 말이다.
그리고 이제 나에게 정말 그 시간이 찾아왔다. 엄마... 라는 말 말고는 어떤 소리도 뱉지 못했다. 도대체 이게 다 뭔가 싶었고, 엄마의 모습에서 죽음의 흔적을 찾아보고자 애썼지만 13일간 중환자실에서 내내 보던 똑같은 모습이라 이성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무언가 다르긴 달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받아들일 수 없는 마음을 가진 자에게는 그런 징후들이 보이더라도 보이지 않았다.
이모는 부지런히 엄마에게 말을 했다. 밝은 곳으로 가라, 그동안 고생 많았다, 사랑한다 언니야... 아빠도 엄마를 쓰다듬으며 짧게나마 애써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나는... 정말 신기할 정도로 울지 않았다. 이모의 당부가 귓속에 박혀서인지 아니면 처음 맞닥뜨리는 상황이 받아들여지지 않아서인지 눈물이 나지 않았다. 그냥 머릿속이 너무 복잡했다. 이제 끝인가, 이제 이 세상에 정말 엄마가 존재하지 않게 된 건가, 사람 끝이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건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곤 어떡해밖에 없었다. 다른 환자들과 함께 있는 중환자실 특성상 우리에게 주어진 마지막 시간도 그리 길지 않아서 그 짧은 소중한 시간을 허무하게 흘려보냈고, 이제 가야한다는 간호사의 말과 함께 침대가 움직이기 시작할 때에야 겨우 엄마에게 한 마디를 해냈다. 사랑한다고. 엄마는 빠르게 영안실로 옮겨지기 시작했고 우리는 드라마에서나 보던 장면처럼 졸졸 침대를 따라갔다.
세상은 정말 냉혹하다. 사망이 확인되지마자 엄마는 영안실 냉동고로 옮겨졌다. 음식도 물건도 아닌, 사람이 냉동실이라니 태어나 또 처음 겪는 일이 연속으로 펼쳐지고 있다. 어른들이 부산하게 움직이고 연락하는 모습에 나도 누군가에게 연락을 해야하나 싶었다. 제일 자주 만나는 학교 친구들 한 두 명에게 연락하고나서 가장 오래된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바로 오겠다는 친구. 그 친구도 나도 이전에 전혀 해본 적이 없던 말들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전혀 해본 적 없던 장례식장에서의 일들이 시작됐다.
장례식에서의 일들은 간간히 기억이 난다. 친지들, 친구들이 속속 도착했고 그들 모두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던 표정으로 나를 대했다. 아직 사회생활을 접해보지 않은 24살의 나는 너무 어리다고 느껴서인지 대부분의 일들은 어른들이 했지만, 그래도 뭔가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에 거의 자지 못했다. 그래도 밥은 열심히 먹었다. 몸이 약한 우리 엄마는 언제나 내 건강이 최우선이어서 무슨 일이 있어도 꼭 따신 밥을 지극정성으로 먹였고 그런 엄마를 위해서라도 일단 나는 잘 먹어야만 했다. 염을 할 때는 어른들이 보기 싫으면 보지 않아도 된다는 말에 알겠다고 밖에서 기다리다가, 끝나기 5분 전쯤 갑자기 막 뛰쳐들어갔다. 다시는 못 볼 엄마의 얼굴. 지금이 아니면 나에게 기회는 더 없을거라는 생각이 정말 갑자기 들었다. 맞았다. 얼어 푸르딩딩한 얼굴에 입안 가득 무언가를 넣어서 인위적으로 잔뜩 부풀려진 양 볼, 처음 보는 이상한 옷에 둘둘 말려있다시피 꼭 동여매여진 몸. 그래도 우리 엄마다. 엄마의 마지막 모습. 가만히 보다가 사랑해, 미안해 말만 하고 나왔다.
그렇게 장례식이 끝났고 평소 엄마의 바람과 달리 엄마는 선산에 묻혔다. 죽으면 화장해서 넓은 곳에 흔적도 없이 뿌려달라고 엄마는 몇 번이나 말 한 적이 있었다. 당연히 화장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납골당을 알아보던 나에게 집안 어른들이 경악했다. 그리고 어른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익숙하게 선산으로 엄마를 데려갔다. 버스를 타고 경북 경산에서 경기도 오산까지 엄마를 모셔왔다. 포크레인이 이미 파놓은 자리에 엄마가 내려졌다. 집안 남자들이 익숙하게 봉분을 만들었다. 사람들이 봉분을 에워쌌다. 아빠와 나, 내 친구 2명, 아빠의 친척들 몇 명, 그리고 엄마 쪽에서는 이모 한 분과 삼촌이 왔다. 1남4녀인 엄마의 나머지 두 이모는 엄마가 병원에 들어간 날부터 땅에 묻히는 그날까지 오지 않았다. 언니의 그런 모습을 보면 자기들도 죽을지 모른다는 말을 했다고 들었다. 그리고 그 이모들은 지금까지 나만 보면 그들의 언니를 떠올리고 운다. 그 언니가 어디 묻혀있는지도 모르면서. 그 이모들은 과연 엄마를 보지 않아서 지금까지 살아있는 걸까? 그래도 내가 마흔살이 넘으니 이제는 좀 이해해봐야겠다는 생각이 간헐적으로 들기는 한다. 살아있으면 됐지 뭐. 적어도 우리 엄마 때문에 죽었다는 말은 안 들었으니.
아빠는 큰아빠 집으로 갔고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형제자매가 없으니 혼자 집에 가면 안 된다고 친구가 굳이 따라왔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내가 집에 돌아오기 전, 다른 친구 하나가 집을 깨끗이 청소했다고 들었다. 친구 말에 따르면 초여름 보름 가까이 방치된 집은 문 열자마자 파리떼가 동굴 속 박쥐만큼 많았다고 했다. 그리고 세 식구의 단촐한 살림살이, 알뜰살뜰하던 엄마의 부엌을 청소하며 우리 엄마가 해주시던 밥상이 생각나 한참 동안을 목놓아 울었다고 털어놨다.
하룻밤 같이 자고 나서 친구가 돌아가고 아빠가 다시 집으로 돌아오시기까지 거의 삼 사일을 나는 내내 잠만 잤었나보다. 거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빠가 집에 오고나서 처음으로 밥상을 차렸다. 냉장고엔 아직 엄마의 김치와 된장이 남아있다. 마지막 엄마의 김치. 내가 좋아하던 엄마의 된장찌개. 삼키고 삼키며 밥상을 차렸다. 그리고 밥상에서 나는 아빠에게 말했다. 아빠 우리 둘이 한 번 잘 살아보자. 웃으며 삼겹살을 구웠는데 아빠가 밥을 입에 넣다가 입술을 떨며 갑자기 숟가락을 내려놨다. 처음 보는 아빠의 모습. 그리고 아빠에게 처음으로 듣는 말. 엄마는 태어나 나에게 처음으로 사랑을 알려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아! 그렇구나. 진작 좀 잘하지 그랬어, 라고 웃으며 먼저 밥을 먹었다. 한 번도 따뜻한 대화를 해 본 적 없던 부녀가 서로를 위해서 처음으로 열심히 밥을 먹었다.
그리고 나서도 며칠을 나는 집에만 있었다. 친구들도 눈치를 보는지 연락이 없다. 그러다가 처음 온 친구의 전화를 받고 나선 거리. 그것도 생전 처음 보던 풍경이었다. 엄마가 없어진 세상이어서가 아니었다. 그건 나에게만 태어나 처음이 아닌, 전 국민이 태어나 처음 본 월드컵 4강진출 때문이었다. 거리가 온통 붉었다. 장례식으로 검은색과 흰색만 보이던 나에게 새빨간 세상은 너무 낯설다. 아직 머리에 흰 리본을 달아야 하는 시기에 온 나라가 새빨갛다니. 엄마가 세상에서 사라져도 세상은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축제였다. 8강, 4강 같은 단어가 우리나라에 하사된 전 국민의 축제. 평소 같았으면 친구들과 광화문에 사느라 집에 옷만 갈아입으러 왔었겠지만 지금의 나는 그냥 엄마 잃은 사람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티브이로 축구를 봤다. 사실 알고는 있었다. 중환자실 옆 보호자실에도 티브이는 있었으니까. 그런데 거기에선 누구도 골을 넣었다고 좋아하지 않았다. 하긴 기뻐하는 사람이 있었어도 몰랐겠지만. 그게 2002년 사상 유례없이 우리나라가 월드컵 최고 성적을 내고 온 나라가 점입가경의 축제를 즐기고 있던 시기의 나였다.
그리고 이제 20년이 지났다. 우리나라는 다시 월드컵 16강에 올랐고 20년 전을 회상하며 8강을 염원했다. 초등학교 4학년인 내 둘째 아들은 유튜브로 하루종일 20년 전 월드컵 영상을 돌려본다. 그렇게 난 계속 20년 전으로 강제 소환됐다. 그동안 나는 엄마 없이도 학교를 졸업하고 취직을 하고, 좋은 사람 만나 결혼해 두 아들을 낳았다. 4년 전 아빠가 돌아가시며 우리 시어머님의 말 그대로 '고아'가 됐지만 시부모님이 울 엄마아빠 역할 대신 해주시고 남편 역시 한결같다. 엄마가 정성스레 키워준 탓일까, 다행히도 20년 전 빨간 거리에 대해 나만의 애도를 묵살하는 것이라 비꼬아 생각해 본 적은 없다. 그래도 2002 월드컵은 나에겐 아직 너무나 잔인하다. 월드컵은 죄가 없지만 계속 떠올려야만 한다는 것, 그리고 철없던 나까지. 엄마에게 잔혹했던 그 시절. 후회할 짓은 안 하는게 맞는 거였다. 4년마다 복기되는 각인된 죄책감은 나만을 위한 온전한 그 사랑을 이렇게 기억하게 만들었다. 평생 해도 모자란 말, 미안하다는 말과 사랑한다는 말. 더 이상의 죄책감을 만들지 말자는 다짐을 다시 새기며 엄마와의 이별을 꼭 글로 남기고 싶었다. 이제 나에게 남은 과제, 나의 두 아이들에게 마지막까지 나의 모습을 기분좋게 떠올릴 수 있는 기억을 만들어주는 것, 사랑하는 사람을 외면하지 않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