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라 Feb 14. 2024

행복은 남편순이 아니잖아요


22살 즈음이었나? 아는 언니가 근무하던 성폭력상담소에 봉사겸 나들이겸 들락날락 거리던 중 ‘여성도 안심하고 밤거리를 다니자’ 는 취지의 캠페인을 한다기에 나도 따라나섰다.


도착하니 해당 상담소 뿐 아니라 지역의 여러 단체들이 함께 한 제법 규모있는 행사였다.

지나가던 시민들을 대상으로 스티커나 팸플릿을 나눠주다보니 어느새 어둠이 내려앉았고 우리는 가판대를 정리하고 대열을 맞추어 행진에 나섰다.

타 단체의 누군가가 선두에 섰고 그가 외치는 구호를 따라 외치며 우리는 밤거리를 걸었다.

당시 나는 밤거리를 걷는 일 자체가 별로 없었기에 밤에 집 앞이 아닌 광장을, 거리를 걷는다는 것 자체가 무척 설레고 신났다.


‘거리는 우리 모두의 것이다’

‘거리는 우리 모두의 것이다’

밤거리를 당당히 걸으며 따라 외치는 구호에 나도 모르게 힘이 잔뜩 실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 설렘과 신남은 오래가지 못했다.


‘내가 걷겠다는데 네가 왜 지랄이냐?’


응? 나는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지금 저 구호를 따라하라고?

친구들끼리 삼삼오오 모인 술자리도 아니고 공식행사에서 ‘지랄?’



‘내가 걷겠다는데 네가 왜 지랄이냐?’

구호를 따라 외치는 사람들까지 내 눈엔 너무 이상해보였다.

나는 차마 그 구호를 따라 외칠 순 없었다.


나는 여성도 당연히 밤거리를 걸을 권리가 있고, 그를 위협하는 ‘일부’ 나쁜 사람들이 존재하기에 그를 저지할 필요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특정 범죄자가 아닌 불특정다수, 어쩌면 한국남자를 향해 ‘지랄 하지마’라고 외칠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TV나 신문에서 성폭력, 가정폭력 이야기가 흘러나왔어도 실제 내 일상에서의 주변남자들은 무거운 물건을 들어주거나 출입문을 잡아주거나 내 일이나 공부에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심지어 나와 모르는 사이라 할지라도 스쳐지나가는 사이에서도 출입문을 잡아주는 남자들은 흔하고도 흔했다.  


그런데 ‘지랄’ 하지 말라니 이건 가도 너무 갔구나 싶었다.

그게 페미니스트에 대한 내 첫인상이었다.

그때 내 눈에 비친 ‘페미니스트’라는 여자들은 과격한 피해망상증 환자였다.  



첫인상이 강렬해서였을까? 나는 성교육강사, 젠더폭력예방교육 강사라는 직업을 가진 후에도 성(성별이나 성정체성 성적지향)에 의한 차별은 철폐되어야 한다 지지하면서도 내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정체화 하진 못했다.


내가 집안일의 대부분을 떠안아도 남편보다 내 근무시간이 유연하고, 특히 육체노동을 주로 하는 남편의 직업특성을 고려한 ‘배려’ 고 여겨왔다.

이를 지적하는 이에겐 멋쩍게 웃어보였지만 내심 속으론 부부간에 정 없게 어떻게 딱 반으로 가르나. 그게 룸메이트지 부부인가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업무 관련하여 욕심낸 만큼 성과가 따라오지 않고 가끔은 속상한 일들도 생겨 남편에게 하소연했더니 대뜸

“내 잘못이네”

라는 엉뚱한 답변이 돌아왔다.

“그게 왜 자기 잘못이야?” 하고 되물었더니


“네가 행복하다면,

  네가 이런 일로 고민할 필요도 없는 거니까”

라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할 답변이 돌아왔다.

이 문제로 우린 십여 분 간 더 대화를 했다.


남편의 말인 즉슨 내가 자신과의 결혼생활이 만족스러우면 이런 부차적인 문제로 골머리를 앓진 않을 거란 뜻이었다. 그래서 이 문제로 내가 힘들다면 그건 ‘남편인 자신이 나를 충분히 행복하게 만들지 못한 잘못’이란 거다.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결혼뿐만 아니라 자아실현, 돈, 우정, 건강, 배움 등 다양한 것이며 그 중의 하나를 이야기 하는거라고 아무리 말해도 그의 결론은 결국 하나였다.

‘내가 남편으로서 너의 행복을 채워주지 못했다’


그 작은 차안에서 나는 답답함에 복장이 터졌고, 남편은 ‘남자’로서의 자존심이 완전 구겨졌다.


그 날 이후 우리는 꽤 자주 ‘일’ 얘기로 충돌했다.

주로 남편은 일 얘기를 하지 않아서 문제, 나는 일 얘기를 해서 문제였다.


나는 저녁식사를 하며 항상 물었다. 오늘 일이 어땠는지, 힘든 일은 없었는지 특별한 일은 없었는지. 그 때마다 남편은 ‘매일 똑같지 뭐’ 라거나 ‘별일 없었어’ 하며 넘기기 일쑤였다.


그런데 이게 왜 문제냐.

항상 별일 없었다던 남편이 친구나 형제를 만나면 일터에서 있었던 각종 에피소드들을 풀어놓는다는 점이었다.

동료가 사고친 이야기나 거래처 사람이 열 받게 한 것들 말이다. 내가 매일 물었고 나누고 싶어 했던 그 일 얘기를 남편은 항상 나만 뺀 다른 사람들과 나눈다는 것이 문제였다.

나는 그럴 때마다 소외감을 느꼈고 심지어 나를 동등한 관계로 배우자로 보지 않는구나 하는 절망감까지 느끼기도 했다.


반면 내가 일 얘기를 하면 그 중에서도 속상한 일을 얘기하면 남편은 열에 아홉은 이렇게 대꾸했다.

‘그럼 그만 둬, 일은 네가 재밌을 만큼만 해’


누군가는 ‘와~ 좋겠다. 부럽다’ 할지도 모르겠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 가정은 생존을 위해 ‘맞벌이’를 해야 하는 상황이라는 거다.

내가 일을 하지 않으면 우리는 매달 생활비가 모자라 대출을 받거나 남에게 손을 벌려야 하는데 재밌을 만큼만 일을 하라니. 그게 가당키나 한 소리인가.


남편의 행복론에 이상한 점은 이 뿐만이 아니었다.

‘조아라, 성공했네? 이게 다 내 덕분이지?’

이게 무슨 말인고 하면, 남편과 나는 나이차가 꽤 많이 난다. 그래서 시동생이나 남편의 후배들도 나이가 나보다 한참 많다. 그런데 내가 남편과 결혼을 하게 되니 그 나이 많은 분들이 내게 깍듯이 ‘형수님’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남편이 자신 덕분에 내가 성공했다고 말하는 것이 고작 나이 많은 사람들에게 ‘형수님’하며 존대를 듣는 것이었다.


형수님 소리를 들으면 뭐하나

나는 시동생을 ‘도련님’이라고 부르는데.

도련님이라고 부를 때마다 한 오백년 전쯤의 ‘언년이’가 되는 내 기분을 아는지 모르겠다.


그 뿐만 아니다. 똑같이 결혼으로 맺어진 자식이지만, 시어머님은 며느리인 내게 사위가 먹을 것이 부족하지 않도록 음식을 준비하라 하신다.

내 아들과 남의 딸 차별이라면 오히려 덜 서러울 텐데 똑같이 결혼으로 맺어진 자식이라도 며느리는 사위를 대접해야 하는 위치다.


20대에 물건을 들어주고 문을 잡아주던 수많은 남자들이 내가 40대가 되고나니 눈 녹듯 사라졌다. 그때의 그 다정한 남자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아마 어느 20대 여성의 짐을 들어주고 문을 열어주고 있지 않을까.


실제로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이 전체 국민의 몇 퍼센트나 될까.

아주 미미한 숫자일 것이다.

이젠 예전처럼 ‘여자가 말이야’ 하고 면전에 대놓고 비하하거나(인터넷에 익명에 기대선 있을지 몰라도)

놓고 직장에서 ‘미스 김이 커피내와’ 하는 시대는 아니지만,


아내가 혹은 여성이 하는 일은 부차적인 것으로,

그저 자기만족을 위해 자아실현을 위해 하는 일 정도로 치부하거나 혹은 아내와 딸을 보호하기 위해 ‘힘든 사회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다독이는 '온정적인 차별'은 현재도 진행 중이다.


오히려 적대적 차별보다 온정적인 차별은 그 표면의 온기 때문에 깊은 곳의 차별을 캐치하지 못하고 넘어가는 때가 많다.


어쩌면 전 국민이 남자는 여자를 배려하고, 여자는 그 배려에 고마워해야 한다는 ‘가스라이팅’을 당하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지금도 밤거리를 걷는 것은 내겐 쉽지 않다.

안전이 명쾌하게 차오르진 않는다.

하지만 지금은 적어도 ‘내가 밤거리를 걷는데 네가 왜 지랄이냐’ 는 말이 여자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실제론 인구의 절반을 가두려하는 생각 혹은 두려움 그 자체를 향하는 말임을 안다.


여튼

나의 행복은 남편에게 달려있지 않다.

그 누구에게도 달려있지 않다.

그래서 나를 위해서 나를 가두려고 한다면 나는 외치려 한다.

‘지랄하지 마’


행복은 남편도 그 무엇도 아닌 내가 만드는 거니까.

작가의 이전글 만렙말고 쪼렙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