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mm 시네마스코프방식의 시원한 화면이 뉴욕의 맨해튼 전경을 보여주면서 거쉰의 '랩소디 인 블루'가 흐른다. 음악에 맞춰 카메라는 브로드웨이, 센트럴 파크, 타임 스퀘어 등 맨해튼의 명소를 빠른 속도로 훑어 나간다. 우디 앨런의 1979년 작인 영화 '맨해튼'은 이렇게 시작한다. 오히려 흑백의 화면이 오프닝에 등장하는 뉴욕의 정겨운 이미지를 보다 생생하고 사랑스러운 것으로 전달하고 있다. 영화 평론가 앤젤라 에리고는 영화 '맨해튼'의 오프닝 신을 두고 "거대하고 화려한 밸런타인 카드와 같다(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영화 1001, 마로니에북스)"고 했지만 내가 볼 때 이 영화의 오프닝은 밸런타인 카드를 받았을 때의 흥분에 더하여 형언할 수 없는 우아함마저 갖추고 있는 것이다.
아름다운 오프닝 씬에 뒤 이어 등장하는 "제1장. 그는 뉴욕을 사랑했다. 아니, 터무니없을 정도로 그곳을 우상화했다"라는 멘트는 스스로 방송국을 그만두고 실직의 상태에 있는 전직 방송작가 아이작(우디 앨런 扮 )이 소설을 구상하면서 첫 문장을 녹음기에 녹음하는 장면이다.
그리고 멘트는 "모르겠다. 뉴욕은 예전부터 도시였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이다"라고 끝을 맺는다.
이 영화의 주인공 아이작은 작가인 질(메릴 스트립 扮)과 이혼하고 42살의 나이로 17세의 고교생 트레이시(메리엘 헤밍웨이 扮)와 연인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전처와 이혼했으므로 불륜이랄 것은 없지만 결코 바람직한 관계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다.
또한 아이작의 친구 예일(마이클 머피 扮)은 그의 아내 에밀리(앤 바이른 扮)와 겉으로는 문제없는 부부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만 남몰래 메리(다이앤 키튼 扮)와 바람을 피우고 있다.
한편, 아이작은 동성애에 눈뜬 전처 질이 동성 애인과 동거하기 위해 자신과 이혼한 후에 질이 자신과의 결혼 생활에 대한 책을 쓰고 있다는 사실에 전전긍긍하고 있다.
그리고 이중생활에 대한 부담을 느낀 예일은 메리와의 불륜을 청산하기로 하고 아이작에게 메리를 소개해 준다. 트레이시와의 나이 차이에 대한 부담을 떨치지 못하고 있었던 아이작은 트레이시의 순수한 마음을 알고 있지만 오히려 그 순수함을 더 이상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 절교를 알리고 메리와 새로운 연애를 시작한다.
그러나 메리는 아이작과의 만남 속에서도 예일에 대한 감정을 정리하지 못하고, 예일 또한 메리를 잊지 못해 결국 에밀리와 별거하고 메리와의 동거에 들어가게 된다.
이처럼 메리에게 상처 받은 아이작은 마찬가지로 자신이 상처를 주었던 순수하고 매사에 긍정적이었던 트레이시에게로 돌아간다.
영화의 줄거리 만을 보아서는 한 편의 막장 드라마를 연상케 할 만큼 어수선하다. 어떻게 보면 로맨스 영화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코미디 영화 같기도 한 영화 '맨해튼'의 실제 주인공은 뉴욕이라는 도시라고 할 수 있다.
영화 속 인물들의 만남과 이별에 맨해튼이 배경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만남과 이별이 맨해튼을 설명하는 에피소드로 작용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이다.
영화의 엔딩에서 흘러나오는 아이작의 독백(아마도 감독으로서의 우디 앨런의 독백임에 틀림없을)을 통해 음악, 문학, 미술, 영화, 그리고 스포츠 등 뉴욕이라는 매혹적인 도시가 가진 자산을 열거하면서 뉴욕에 대한 찬사로 영화를 마무리하고 있다.
그리고 우디 앨런은 이 영화에 대하여 "내가 그토록 사랑하면서도 증오하는 도시에 대한 존경인 동시에 비판이 되기를 원했다"라고 말한 바 있었다.
비록 흥행 면에서나 영화제에서의 수상 성과는 전작인 '애니 홀'에 미치지 못하지만 뉴욕 지식인 사회를 유머스럽게, 그리고 신랄하게 풍자한 '맨해튼'을 우디 앨런의 대표작으로 꼽는데 이견을 가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만큼 매력적인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영화를 사랑스러운 영화로 만드는 것에는 영화 속 장면마다 절묘하게 스며드는 거쉰의 음악과 영화사에서 가장 뛰어난 촬영 감독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고든 윌리스의 훈훈하고 우아한 영상이 없었다면 이 영화가 그토록 매력적인 영화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뉴욕의 밤, 브루클린 브리지를 배경으로 아이작과 메리가 벤치에서 함께 하는 데이트 신의 아름다운 영상미는 오랫동안 잊히지 않는 것이다.
이 영화를 보다 보면 이 영화가 뉴욕이라는 도시에 대한 찬가이면서 동시에 사랑에 대한 찬가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크게 든다. 그만큼 우디 앨런의 영화 '맨해튼'은 영화 속에서 어지럽게 이루어지는 만남과 이별이 교차하는 사랑조차 이름답게 느껴지게 하는 마력의 영화가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