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자무늬의 패턴

by 신재현

글을 취미 이상으로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내게 생긴 집요한 버릇은, 어떠한 현상을 늘 ‘열 걸음’ 물러나서 바라본다는 것이다. 주관성을 최대한 제거하고 현상을 그저 관찰자의 태도로 바라보면, 대부분의 경우 그 안에서 일정한 패턴이 드러난다. 대개 그것은 복잡하지 않고, 몇 줄의 문장으로도 충분히 설명 가능하다.

그러나 간혹 썩 복잡한 패턴이 눈에 띄기도 하는데, 그것은 마치 아직 풀리지 않은 수학의 난제와도 같다. 수학에서 2, 3, 5, 7, 11, 13, 17, 19, 23, 10037, 99999991과 같이 1과 자기 자신으로만 나누어지는 수를 ‘소수’라고 부른다. 소수는 무한하며, 오랫동안 그 분포에는 전혀 규칙성이 없다고 여겨져 왔다.

그러나 흩어져 보이는 소수들 역시 완전히 무질서한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가설이 제기되었다. 소수 그 자체를 바라볼 것이 아니라, ‘열 걸음’ 물러나 그 분포를 내포한 함수의 해 들을 복소평면 위에 올려놓았을 때, 모든 비자명한 영점이 “하나의 직선” 위에 놓여 있을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리만 가설이다. 수학자가 아닌 우리는 리만이 누군지, 복소평면이 무엇인지, 비자명한 영점이 대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무작위처럼 보이던 현상들 역시 더 거대한 틀 안에서는 결국 하나의 패턴으로 수렴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설명하기 어려운 감동과 묘한 만족감을 준다.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완전한 혼돈은 아니라는 이 믿음은 문장을 더욱 시적으로, 그리고 철학적으로 만든다. 그리고 내 모든 문장들의 어머니인 이 삶은, 그렇게 우주만큼 거대한 격자무늬 패턴으로 그려진다.


이틀 간의 휴무가 끝을 바라보는 때. 오후 3시의 햇살은 정말이지 딱 필요한 정도로 따스했고, 열어둔 창문 사이로는 초겨울의 차고 건조한 바람이 불었다. 이불 덮고 에어컨을 켜는 여름날의 과소비처럼, 따뜻한 햇살과 찬 바람이 동시에 몰려오는 소파에 누워 담요를 덮고 있자니 행복했다. 이 감정 역시 몇 걸음 물러나 바라보자면 ‘과소비의 도파민’에 닿아있다. 과소비가 도파민과 연결되는 이유는 단순히 많이 써서 기분이 좋아진다는 식의 설명으로는 부족하다. 도파민은 만족이나 행복을 담당하는 물질이 아니라, 보상이 예측을 얼마나 벗어났는지를 선호하는 신경전달물질에 가깝다. 인간의 뇌는 계획된 보상보다 계획을 살짝 벗어난 보상에 더 강하게 반응하도록 진화해 왔다. 그래서 필요 이상의 소비,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선택, 합리성에서 한 발 물러난 결정은 뇌에게 ‘예측 오류’를 발생시키고, 그 순간 도파민의 분비가 증가한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보상의 크기가 아니라 불필요성이다. 즉, 넓은 관점에서 과소비는 결핍을 채우는 행위가 아니라, 예측된 질서를 의도적으로 흔드는 행위에 가깝다. 에어컨을 켜고 이불을 덮는 행위, 초겨울에 창문을 열어둔 채 담요를 덮는 행위 역시 같은 범주에 속한다. 차가움과 따뜻함을 동시에 호출함으로써, 뇌는 이 상황을 단순한 온도 조절이 아니라 감각의 변주로 인식한다. 예측 가능한 쾌적함은 이만큼이나 강한 도파민 반응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이 모순된 감각의 공존, 차가운 공기가 얼굴에 닿는 동시에 몸은 따뜻하게 보호될 때, 뇌는 이것을 예상 밖의 일탈로 인식한다. 이는 과소비에서 나타나는 도파민의 분비와 논리적으로 동일하다.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선택한 사치, 합리성을 벗어난 결정이 만들어내는 ‘예측 오류’인 셈이다.

이렇듯, 고작 창문을 열고 이불을 덮는 행위마저도 열 걸음 물러나 바라보면 ‘도파민’이라는 더 거대한 틀 안에 놓이게 된다.

그날의 감정을 조금 더 세밀하게 묘사할 필요가 있다. 당시 내 마음속에는 현재의 쾌적함이 주는 행복과 휴무가 거의 끝나간다는 사실이 불러오는 우울이 뒤엉킨 채 힘겨루기를 하고 있었다. 자연의 쾌적함이 주는 행복감과 휴무가 끝나가며 밀려오는 우울감은 오후 3시라는 심판의 호령에 맞춰 씨름 시합을 막 시작한 참이었다. 이렇게 매주 휴무의 마지막 날 오후 3시가 되면, 내 가슴속에서는 어김없이 씨름 시합이 열린다. 6일간 사이좋게 지내던 감정의 선수들은 심판의 호령에 맞춰 서로를 향한 끝나지 않을 힘겨루기를 시작한다. 이와 같은 감정을 흔히들 ‘월요병’이라 하던가, 나의 감정도 결국 매주 1회씩 찾아오는 흔하디 흔한 패턴에 속한다. 감정에 사로잡혀 괴로워하기보다, 몇 걸음 물러나 이것을 패턴으로 인식할 때, 우리는 돌파구를 발견할 수 있다. 몇 걸음 물러나는 행위는 주관성을 배제하는 행위와도 같다. 마치 유체이탈처럼 관찰자의 태도로 나를 바라보면, 월요병으로 고통받는 내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그 모습을 논리적으로 인식하고 인과관계를 파악한 순간, 그에 맞는 치료법 역시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내게 그것은 숨이 거칠어질 정도의 웨이트 트레이닝과, 거품이 잔뜩 이는 반신욕이었다. 이 치료법이 언제나 즉각적인 효과를 보이는 것은 아니다.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고, 거품이 가득한 욕조에 몸을 담근다고 해서 월요일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같은 날, 오후 3시마다 찾아오는 감정을 더 이상 정체 모를 불청객으로 맞이하지 않게 된다. 나는 그것이 언제 오고, 어떤 조건에서 증폭되며, 어떤 방식으로 가라앉히는지를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감정은 여전히 거기 있지만, 더 넓은 틀에서 이해를 끝마친 나를 더 이상 압도하지 못한다. 이 차이는 작지만 결정적이다. 이해되지 않는 고통은 혼돈을 남지만, 구조를 가진 고통은 관리의 대상이 된다. 삶에서 격자무늬 같은 패턴을 인식하는 순간, 삶의 고통은 나를 흔드는 파도가 아니라 예측 가능한 조류가 된다. 매주 같은 시간에 반복되는 이 작은 내면의 소란 역시, 무작위한 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생활 리듬으로 편입된다. 그리고 그 리듬 안에서 나는 더 이상 당황하지 않고 춤을 춘다. 그 리듬이 재즈가 되었든 탱고가 되었든. 그리고 내 춤이 어설픈 몸짓에 불구할지라도.


이러한 패턴을 발견하는 것은 내 직업, 수의사의 일이기도 하다. 보호자들이 마주하는 아이들의 고통은 대개 이해되지 않는 형태로 나타난다. 갑작스러운 기침, 반복되는 구토, 설명할 수 없는 무기력. 보호자에게 그것들은 원인도 방향도 알 수 없는 혼돈에 가깝다. 수의사의 역할은 그 혼돈을 단번에 없애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그 고통에 구조를 부여하는 일에 가깝다.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어떤 조건에서 심해지는지, 무엇을 하면 조금이라도 나아지는지. 흩어진 단서들을 모아 시간의 흐름 위에 올려놓고, 무질서해 보이던 증상들 사이에서 반복되는 양상을 찾아낸다. 그렇게 고통은 설명 가능한 현상이 되고, 두려움은 관리 가능한 문제로 바뀐다. 왜 이런지 모르겠다는 말이 이럴 때 이런 반응이 온다로 바뀌는 순간, 고통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혼돈은 물러난다. 그 차이를 만드는 것이 진단이고, 그 진단은 결국 패턴을 발견하는 일이다. 그래서 진료실에서의 나도 열 걸음 물러나 서 있는 사람이다. 눈앞의 증상에만 매달리지 않고, 그 증상에 놓인 더 큰 격자무늬를 바라보는 사람. 소수의 흩어진 숫자들 사이에서 보이지 않는 직선을 상상하듯, 보호자와 환자가 겪는 고통 속에서 반복되는 구조를 찾아낸다. 그 과정은 과학에 가깝지만, 동시에 깊이 인간적이다.


어쩌면 삶의 패턴을 발견하기 위해 애쓴다는 것은, 삶을 완전히 이해하거나 통제하려는 시도라기보다는 그것을 덜 오해하기 위한 연습에 가깝다. 우리가 고통 앞에서 쉽게 무너지는 순간들은 대개 그 고통이 너무 커서라기보다, 왜 지금 이 시점에, 왜 이런 형태로 찾아왔는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흩어진 사건과 감정들이 제각각 튀어 오를 때 삶은 혼돈처럼 느껴지지만, 열 걸음쯤 물러나 그것들을 시간의 흐름 위에 올려놓는 순간, 반복되는 리듬과 조건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오후 3시에 시작되는 마음속의 씨름 시합도, 진료실에서 마주하는 설명되지 않던 증상들도, 그렇게 하나의 격자 위에 놓인다. 완전히 설명할 수는 없더라도, 적어도 이것이 무작위는 아니라는 감각. 그 감각은 고통을 사라지게 하지는 못해도, 나를 압도하지는 못하게 만든다. 삶은 여전히 복잡하고, 감정은 여전히 흔들리지만, 나는 이제 그 속에서 반복되는 선 하나쯤은 알아본다. 그리고 그 선을 따라 당황하지 않고 한 걸음씩 움직인다. 우주만큼 거대한 격자무늬 위를 더듬듯이, 오늘도 그렇게 살아간다.


2026 0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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