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의 기대에 부흥하며 자신의 그림자를 더 짙게 만드는 사람들
연인의 뜻에 따르고 기대에 부흥하려 애썼지만 혼자가 되면 이유 모를 피로감이 밀려왔다.
감정이 고갈된 느낌.
나를 잃어버린 기분.
그러다 문득 깨닫는다.
나는 누구보다 감정에 민감한 사람이지만 정작 내 감정엔 둔감한 사람이었구나.
타인의 감정에 예민한 사람은 많지만 그만큼 자신의 감정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왜냐하면 타인의 감정을 먼저 읽는 능력은 결국 자기 감정을 억누른 결과로 생겨났기 때문이다.
상대가 불편해할까봐 화를 억누르고 부딪힐까봐 서운함을 감추고 거절당할까봐 눈치를 먼저 본다.
그렇게 살아온 시간동안
‘감정을 감지하는 능력’은 키우지만,
‘감정을 느끼는 힘’은 약화시킨다.
나는 늘 다 맞춰줬는데,
왜 내 마음은 이렇게 텅 비어 있지?
그건 상대만을 맞춰주면서 정작 중요한 나 자신은 빼놓았기 때문이다.
융은 자기 자신과의 연결이 끊어지고 타인의 감정이나 기대에 지나치게 몰입하는 현상을 페르소나 동일시로 보았으며 이는 자기상실 혹은 내적 연결끊김 상태로 볼 수 있다.
보편적으로 여성은 관계지향적이며 감정과 유대, 공감능력이 남성보다 발달하였다.
그래서 여성들은 항상 타인을 이해하고, 공감하고, 품어주지만 그럴수록 자신 안의 그림자, 억눌린 욕구, 분노, 불안은 무시되어 점점 짙어진다.
즉,‘좋은 사람’의 가면 아래에서 자신과의 관계는 점점 멀어지는 것이다.
연인의 기대에 부흥하려 노력하는 마음은 아름답지만 그 감정이 자기 자신을 소외시키는 방식으로 흘러간다면 결국 그 누구도 온전히 사랑할 수 없게 된다.
내가 지금 어떤 감정인지
내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는지
그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질 수 있어야 비로소 연인과의 공감도 자기희생이 아닌 자기 연결을 기반으로 할 수 있다.
타인의 감정을 너무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자신의 감정을 신경쓰지 않는다면 결국 내면의 공허함을 초래할 수 있다.
그러나 자기 감정을 외면한 공감은, 결국 연결이 아니라 고립을 만든다.
공감은 자기희생이 아니라 자기이해에서 시작된다.
내 마음에 먼저 닿을 수 있어야, 누군가의 마음도 진정으로 받아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