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인 줄 알았으나 그것은 내 결핍이었다.
나는 그를 사랑한 게 아니었다.
그저 나를 원하는 그 눈빛에 중독되었을 뿐이다.
관계가 끝난 후에야 우리는 깨닫는다.
그토록 격렬했던 감정은 사랑이 아니라 어쩌면 욕망과 불안이 뒤엉킨 혼란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걸.
심리학에서 말하는 성욕은 단순히 성적인 욕구만을 뜻하지 않는다.
프로이트는 이를 생의 에너지(생명)로, 융은 이를 삶의 에너지 전체로 보았다.
그 에너지는 사랑을 갈망하게도 하고, 창조성을 불러일으키며,
때로는 파괴적인 집착으로도 변한다.
한편 애착은 안전함을 갈망하는 본능이다.
유년기의 애착 스타일은 어른이 된 후의 연애에도 그대로 작동한다.
거절에 예민하거나, 상대의 관심에 과도하게 반응하는 이유는
‘버림받을까 봐’라는 무의식적인 두려움에서 비롯된다.
문제는 이 둘이 섞일 때다.
성욕은 에너지를 끌어당기고, 애착은 그 에너지를 붙잡는다.
그렇게 만들어지는 감정은 종종 ‘사랑’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은 자기 결핍을 상대에게 투사한 결과일 수 있다.
칼융은
우리는 무의식 속에 있는 ‘이상적인 이성상’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투사한다고 말했다.
그녀가 나를 구원해 주거나 나의 공허를 채워줄 거라고 믿으며
실제로는 상대가 아닌, 내 안의 환상을 사랑한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깨진다.
투사는 영원할 수 없기에 관계는 흔들리고 우리는 실망하거나
상대를 통제하려 하거나 혹은 과도한 집착에 빠지게 된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그림자가 만든 거울일 뿐이다.
에로스와 프시케.
이 이야기는 단순한 연애담이 아니다.
에로스는 사랑의 신이자, 욕망의 상징.
프시케는 ‘영혼’이라는 뜻을 가진 이름이다.
이 두 존재는 결국 서로를 알아가며 진짜 사랑에 이르지만,
그 여정은 수많은 시험과 내면의 성장 없이는 불가능했다.
욕망은 즉각적이다.
하지만 진짜 사랑은 시간을 요구한다.
상대의 실체를 마주하고도 여전히 사랑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소유’가 아닌 ‘존재’를 사랑하게 된다.
우리는 본질적인 부분을 잘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이 사람을 사랑하는 이유가 뭘까?
혹시 그가 내 외로움을 대신해 주는 존재는 아니었을까?
성욕은 자극적이지만 금세 꺼진다.
애착은 안정감을 주지만, 때론 나를 가두기도 한다.
이 두 감정이 뒤엉키면, 우리는
사랑이란 이름으로 상처를 주고받게 된다.
상대와 깊은 관계를 맺기 위해 내 감정의 근원을 들여다보자.
나는 그 사람을 사랑했는가?
아니면 나의 상처가 그를 필요로 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