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중국을 찾아서 I
(조너선 D. 스펜서 지음)

- 아편전쟁에서 淸의 종말까지

by 이병철


- 아편전쟁에서 淸의 종말까지



청나라의 멸망 과정을 보면 문득 드는 두 가지 생각이 있다.

“3대 가는 부자가 없다”는 말과 “부자는 망해도 3대가 간다”는 말이다.

서로 상반되는 뜻을 갖고 있는데 청나라의 쇠망 과정을 보면 당장 망해도 전혀 이상할 것 같지 않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자강 노력으로 다시금 일어서고자 하는 지난한 과정을 밟아 나간다.

강희제로부터 시작하여 옹정제, 건륭제까지 3대에 걸쳐 청나라는 절정에 이르지만 건륭제의 임종으로 강건성세에 종말을 고하게 되고, 건륭제 말기에 일어난 백련교도의 난은 가경제의 시대로까지 이어져 10년 가까이 지속되었다.


그러나 청나라의 쇠망을 결정적으로 촉발한 계기는 아편전쟁이다.

아편전쟁은 당시 세계 최강국으로 자부하던 청나라를 나락으로 이끄는 분수령이었다.

건륭제 말기에 영국 사절단에게 했던 말 속에 여러 해석의 열쇠가 내포되어 있다.

“우리 천조(天朝)는 땅이 넓고 물산이 풍부하여(地大物博), 없는 것이 없으니 굳이 먼 곳의 물건을 들여올 필요가 없다." 이 한 마디가 어찌 보면 아편전쟁의 씨앗이 되었을까?


당시 영국은 청나라로부터 차, 도자기, 비단 등을 수입하고 있었고 이에 따라 멕시코에서 유입된 은(銀)이 대량 유출되고 있었다. 대외 무역 적자가 지속적으로 누적되고 있었고 자신의 주력 상품인 무기와 시계 등을 비롯한 여러 철제 제품의 수출은 전혀 이루어지기 않고 있었기에 심각한 무역 적자를 기록하고 있었고 이를 해소하고자 고심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착안한 것이 바로 아편이다.

당시 어지러운 시국에 관료들의 부패로 말미암아 민생에 시달리던 백성들이 아편에 의지하게 되고 이에 영국은 인도에서 값싼 아편을 들여오기 시작한다.


전쟁 발발의 과정은 아주 단순하다.

아편에 취한 백성을 방치할 수 없어 의기에 찬 관료 임칙서가 아편을 몰수해서 불태우고 영국정부에 항의 문서를 보내기도 하지만 영국에서는 오히려 자국의 재산권과 자유무역을 보호한다는 빌미로 군대를 파견한다.

애초에 영국은 청나라의 허술해진 군사를 이미 정탐하였고 그들이 종이호랑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건륭제 시절인 1793년 맥카트니의 외교 사절단을 통하여 이미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1840년 전쟁이 시작되자 증기선과 대포 등 현대식 무기로 무장한 영국군을 당해낼 재간이 없던 청나라는 항복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이로써 아편전쟁은 1842년에 끝나게 되며 난징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굴욕적인 난징 조약의 주요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5개 항구 강제 개항 : 광저우, 샤먼, 푸저우, 닝보, 상하이를 개항하여 서구 문물과 아편이 쏟아져 들어오게 된다.

2. 홍콩 할양 : 1997년 반환까지 150년 넘게 영국의 지배를 받게 된다.

3. 배상금 지불 : 청나라 재정에 치명타를 입힐 정도의 거액인 2,100만 달러를 배상한다.

4. 공행 폐지 : 무역을 통제하기 위하여 두었던 특권 상인 집단인 공행을 폐지하고, 영국 상인은 누구와도 자유롭게 거래할 수 있게 한다.

5. 관세 자주권 상실: 수출입 관세를 영국과 협의해서 결정하게 함으로써 청나라의 경제 주권을 박탈한다.

이듬해 체결된 부속 조약에서 더 치명적인 내용들이 추가된다.

- 치외법권 : 영국인이 중국에서 죄를 지어도 중국 법이 아닌 영국 법으로 재판받는다.

- 최혜국 대우 : 청나라가 다른 나라와 더 좋은 조건으로 계약하면, 영국에게도 자동으로 그 조건을 적용한다.

세계의 중심으로 자부하던 청나라의 화려한 날은 이렇게 저물어 간다. 소위 백년의 국치(百年國恥)가 시작되는 순간이다.


아편전쟁의 패배는 청나라 백성들의 자존감에 큰 상처를 내게 되었고 만주족의 지배에서 벗어나서 한족이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는 멸만흥한(滅滿興漢), 즉 "이민족인 만주족(청)을 몰아내고 한족의 나라를 세우자"는 구호는 도탄에 빠진 민중들로부터 지지를 받기 시작한다.

홍수전이란 자가 나타나 자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자 예수의 동생임을 자칭하면서 기독교적 사상과 만민평등사상을 주입하여 민중의 열렬한 호응을 받기에 이른다. 태평천국의 난(難)이 시작된다.

태평천국의 난(1851~1864)은 청나라 조정을 뒤흔들 정도로 큰 변란이자 오랜 동안 지속된 내란이었다. 기독교 정신을 가미한 영향으로 처음에는 유럽 국가들의 호의적인 반응을 얻었으나 급진적 사회주의 성격이 강하여 오히려 마르크스의 관심을 많이 받았던 사건이다.


마르크스가 아편전쟁이후 태평천국의 난이라는 내란 속에서 고통 받는 청나라에 대한 예측이 매우 흥미롭다.

1850년대 초반 마르크스는 "서구의 대포(아편전쟁)가 중국에 질서를 가져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잠자던 거인을 깨워 서구 자본주의를 위협하게 만들었다"면서, 중국의 혼란이 대영제국의 차무역과 세입에 타격을 줄 것이며, 이것이 결국 유럽 경제 위기로 이어져 유럽 내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재 점화하는 불씨가 될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내란의 성격이 사이비 종교적 색채를 띠면서 약탈, 방화, 파괴로 이어지자 ‘아무런 발전적 목적도 없는 추악한 괴물’이라 묘사하기도 한다.

더불어 청나라를 ‘화석화된 미라’라고 칭하면서 중국이 수천 년간 왕조만 바뀔 뿐 사회 구조는 변하지 않는 '역사가 없는 나라'라고 보았으며 청나라의 멸망이 목전에 있다고 예측하였다.

그러나 실제 청나라의 종말은 1912년 마르크스 예측으로부터 60년 후에야 이루어진다.

60년간 청나라에는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그리고 마르크스의 예측은 왜 빗나갈 수밖에 없었는지 생각해보는 것이 역사서를 읽는 재미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I. 중체서용(中體西用)과 양무운동(洋務運動)

외세의 도움을 받아 청나라 조정은 태평천국의 난을 간신히 진압하게 되었고, 비로소 시대에 뒤쳐져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로부터 문호를 개방하고 서구의 진일보된 기술과 과학적 제도를 준비하여 스스로를 개혁하고자 하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이를 중체서용(中體西用 : 중국의 전통적인 유교적 가치, 도덕, 정치 제도는 근본이므로 절대 변해서는 안 된다는 사상으로 중국의 것을 본체로 삼고, 서양의 것을 활용한다는 뜻) 정신에 따라 양무운동(洋務運動)을 전개한다.

양무운동이란 중체서용(中體西用)을 사상적 기반으로 삼아, 유교적 질서는 유지하되 서양의 '강한 군대와 기술'만 배우자는 취지에서 시작된 움직임을 의미한다.

이홍장을 중심으로 서양의 현대식 군사 공업과 민간 산업 육성, 해군의 창설 등을 의욕적으로 추진하여 나름 탈바꿈을 하고자 노력하지만, 그 한계는 1894년 조선에서 발발한 ‘청일 전쟁’에서 치욕적인 결과를 맞이하게 된다.

일본에 패배한 청나라는 1895년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하게 되는데 그 내용은,

1. 조선의 독립 확인: 실제로는 조선에 대한 청의 종주권을 박탈하고 일본의 영향력을 공고히 함.(동아시아의 패권이 중국에서 일본으로 넘어가게 됨을 의미)

2. 영토 할양: 요동(랴오둥) 반도와 타이완을 일본에 할양.

3. 배상금 지불: 당시 일본 국가 예산의 몇 배에 달하는 거액(2억 냥)을 지불. (이 자금은 일본 산업 혁명과 군비 확장의 기초가 됨)

중체서용이라는 사상으로 정치 제도와 교육 시스템은 낡은 그대로인데 기술만 도입하려다 보니 효율성이 극도로 떨어졌고, 이와 대조적으로 일본은 메이지 유신(제도까지 바꾼 개혁)으로 국가의 체질을 통째로 바꾸고 현대식 군비로 무장한 까닭에 청나라의 참패는 당연한 귀결일 수도 있다.

비로소 "기술만으로는 나라를 구할 수 없다"는 깨달음을 터득한 청나라는 이후 제도 자체를 개혁하려는 변법자강운동(變法自疆運動)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된다.


II. 변법자강운동

변법자강운동은 캉유웨이(康有為)와 량치차오(梁啓超)를 중심으로 한 변법파가 주도한 운동으로서 핵심 강령은 다음과 같다.

1. 입헌군주제 지향: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모델로 삼아, 황제의 권력을 헌법으로 제한하고 의회를 개설하는 입헌군주제로의 전환을 지향한다.

2. 과거제의 개혁: 공자 말씀만 외우는 과거 시험 대신, 실용적인 서구의 학문과 근대적 교육 체제 도입을 강조한다.

3. 경제 및 행정 개혁: 불필요한 관청을 없애고 민간 기업 육성과 상공업 진흥을 꾀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 젊은 황제였던 광서제는 캉유웨이(康有爲)의 사상에 감명 받아 전격적인 개혁안을 발표하고 약 100일 동안 수많은 개혁 법령을 발표하는데, 이를 '무술변법'이라 부른다.


그러나 광서제의 고모였던 서태후를 비롯한 수구 세력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위협하는 개혁에 강력히 반발하였고, 이에 개혁파는 무력을 쥐고 있던 위안스카이(원세개로 알려진 인물로서 청일전쟁 당시 대표적인 군벌)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그는 오히려 보수파인 서태후에게 이 사실을 밀고하면서 보수파의 편에 서게 된다.

그 결과 서태후는 광서제를 유폐하고, 개혁파를 처형하거나 추방하는데 이를 무술정변이라 부른다. 캉유웨이와 량치차오는 일본으로 망명하며 개혁은 막을 내리게 된다.


변법자강운동은 비록 실패했지만,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전제 군주제를 부정하고 근대적 정치 체제를 도입하려 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가진다.

이는 민중의 지지를 기반으로 한 아래로부터의 혁명이 아니라, 황제(광서제)의 권위라는 상층부에 의존한 개혁이었기에 기반이 약할 수밖에 없었고 실질적으로 군부 세력의 포섭이 없이 의식 있는 자들의 결기어린 외침으로 남겨지고 만다.

하지만 이들의 실패는 이후 "개혁으로 그쳐서는 안 되고 아예 왕조를 무너뜨려야 한다“는 신해혁명(공화정을 향한)의 기폭제가 되었다.


신해혁명 이전인 1900년 의화단 운동이 일어난다.

의화단은 "부청멸양(扶淸滅洋 청나라를 돕고 서양 세력을 몰아내자는 의미)"을 기치로 내세우고 북경에 있는 외국 공관을 공격하는 등 외세에 대한 거센 항전을 특징으로 한다.

당시 실권자였던 서태후는 처음에는 의화단을 진압하려 했으나, 이들의 기세가 커지자 오히려 이들을 이용해 서구 세력을 몰아내고자 선전포고를 감행한다.

그러나 영국, 미국, 독일, 프랑스, 일본, 러시아,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 8개국이 연합군을 결성하여 베이징을 함락시키고 의화단을 무력으로 진압한다. 또 다시 전쟁에서 패한 청나라는 1901년 신축조약을 체결하는 등 궤멸적인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게 되는데, 신축조약은 당시 청나라 1년 예산의 몇 배에 달하는 4억 5천만 냥의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고, 외국 군대가 베이징에 주둔할 권리를 허용함에 따라 주권이 크게 훼손되었다.

서태후와 청 정부가 외세 앞에 무력하게 무너지는 것을 본 지식인들과 신군(신식 군대)은 "개혁이 아닌 혁명만이 답이다"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고 더불어 체제를 유지하며 기술만 배우려던 온건 개혁론이 힘을 잃고, 쑨원(孫文) 같은 혁명파들이 본격적으로 힘을 얻기 시작한다.

게다가 엄청난 배상금을 갚기 위해 세금을 가혹하게 걷으면서 민심이 완전히 돌아서게 되었다.



III. 신해혁명

1911년 이런 시대적 환경에서 역사적인 신해혁명이 봉기하게 되는데 혁명의 근본 이념은 쑨원(孫文)이 주창한 삼민주의(三民主義)이다. 삼민주의는 근대 중국을 건설하기 위한 세 가지 핵심 원칙인 민족(民族), 민권(民權), 민생(民生)으로 이루어진다.


1. 민족주의 (民族主義) - "독립과 평등"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한족의 나라를 되찾자는 '구제달로(驅除韃虜, 만주족 괴뢰를 몰아내자)'의 성격이 강했다.

국민이 주인이 되는 중화민국 성립 이후에는 중국 내 여러 민족(한, 만, 몽, 회, 장)이 평등하게 단결하여, 서구 제국주의의 압박으로부터 중국의 완전한 독립을 이루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2. 민권주의 (民權主義) - "민주 공화정"

국왕 한 사람의 나라가 아니라 국민이 주인인 나라를 만드는 것이다. 쑨원은 국민이 선거·파면·창제(법안 발의)·복결(재결계)의 4권(政權)을 가지고, 정부는 행정·입법·사법·고시·감찰의 5권(治權)을 행사하는 '오권분립' 체제를 제안했다. 이는 서구의 삼권분립에 중국 전통의 관리 선발(考試)과 감찰 기능을 더한 독창적인 모델이었다.

3. 민생주의 (民生主義) - "경제적 균등"

자본의 독점을 막고 국민 전체의 생활을 안정시키는 것이다.

'지권평균(地權平均)'이라 하여, 지가 상승에 따른 이익을 국가가 환수해 공공의 복지에 사용하고, 철도나 해운 같은 주요 산업을 국가가 관리하여 빈부격차를 줄이려 했다. 훗날 농민들에게 땅을 돌려주자는 '경자유기전(耕者有其田)' 사상으로도 이어지게 된다.


신해혁명의 발단은 우연한 사고에서 시작되었다.

후베이성 우창에 있던 신군(신식 군대) 내의 혁명파들이 폭탄을 제조하다가 사고로 폭발이 일어났다. 명단이 발각되어 체포될 위기에 처하자, 혁명파 군인들이 전격적으로 봉기하여 우창을 점령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신해혁명의 시작이다

우창 봉기의 소식이 퍼지자 전국적인 호응이 이어졌고 불과 한 달여 만에 중국 24개 성 중 15개 성이 청나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고 혁명군에 가담했다.



IV. 중화민국 성립과 청나라 멸망 (1912)

1912년 1월 1일, 난징에서 쑨원(孫文)을 임시 대총통으로 하는 중화민국이 선포되었다.

청나라는 실권자 위안스카이를 보내 혁명군을 진압하려 했으나, 위안스카이는 오히려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혁명군과 협상하였고 쑨원은 내란을 피하고자 군부를 장악하고 있는 위안스카이에게 대통령 직을 양보하게 된다.

결국 위안스카이의 압박으로 1912년 2월,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푸이(선통제)가 퇴위하며 청나라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마르크스로 하여금 청나라의 멸망을 단언하게 한 태평천국의 난이 발발했던 시기가 1851년이었다. 정확히 육십갑자가 지난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의 시대는 막을 내린다. 마르크스의 예측이 맞았다고 할까 빗나갔다고 할까?

60년의 기간은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매우 짧은 시간이지만 마르크스의 예측은 성급했다고 평가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그의 예상이 어긋난 것은 중국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인데 그가 간과한 점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1. '천하(天下)'라는 도덕적 우월감

중국인들에게 청나라는 단순한 '국가'가 아니라 문명 그 자체였다.

마르크스는 중국이 서구의 압도적인 기술 앞에 항복할 것이라 봤지만, 중국 관료들은 "기술은 빌려올지언정 우리 문명의 도덕적 근간(유교)은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는 강력한 자존심을 가졌다. 바로 중체서용(中體西用)의 정신이다.

2. 향신(鄕紳)층이라는 견고한 사회적 지탱 세력

마르크스는 중앙 정부가 무너지면 사회 전체가 무너질 줄 알았지만 중국에는 지방의 지식인 사회인 향신(지주-사대부)층이 있었다.

이들은 중앙 정부가 외세에 휘둘릴 때 스스로 의병(상군, 초군 등)을 조직해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했고 외세에 대항하였다.

이들은 "공맹의 도(孔孟之道)가 무너지는 것을 차마 볼 수 없다"는 문화적 사명감으로 청나라를 지탱했으며 마르크스는 이들이 가진 전통 수호 의지가 근대 자본주의의 파도보다 끈질길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3. '중화'라는 민족의식의 부활

역설적으로 서구의 침략은 중국인들의 자존심을 자극해 새로운 형태의 자강 노력을 낳았다.

마르크스는 외세의 침략이 중국을 분해할 것이라 봤지만, 오히려 그 침략은 흩어져 있던 중국인들에게 '민족주의'라는 현대적 자각을 일깨우는 불씨가 되었다.

"5천 년 문명을 지킨 민족"이라는 자긍심이 자강운동(양무운동)과 변법자강운동으로 이어지며 끈질긴 저항력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는 우리 조선 구한말 시대 의병 활동에 앞장선 사대부들의 문화적 자긍심과 매우 흡사하다.

4. 중국 영토의 광활함.

영국을 비롯한 세계열강들이 조차지(租借地)의 형태로 국토를 유린했지만 중국의 광대함은 이를 감내하고도 남을 만큼 크고 넓은 땅덩이였다.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정복하지 못한 것과 1930년대 중일전쟁으로 일본이 그토록 악랄하게 공격했어도 점령이 어려웠던 것과 흡사하다 하겠다.


중화민국으로 새롭게 태어난 중국...

그의 미래는 지난 시간보다 더욱 세찬 격동의 세월을 맞이하게 된다




* P/S

21세기 들어 세계지각 변동의 핵심적 원인은 美中 패권 다툼에 기인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금 진행 중인 미국과 이란 간의 전쟁도 중국과 무관하지 않다.

약 200년 전의 아편은 오늘날 펜타닐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이는 아편전쟁의 아픔을 기억하고 있는 중국의 반격일까?

19세기 영국이 동인도 회사를 앞세워 아편을 밀수출하며 청나라의 국력을 마비시켰던 사건은 중국 역사에 있어 잊을 수 없는 치욕일 것이다.

현대의 펜타닐 원료가 중국에서 미국 혹은 제 3국을 통하여 미국으로 유입되어 젊은 층과 노동력을 파괴하는 현상을 두고, 서구 언론이나 정치권에서는 “역(逆) 아편전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중국이 의도적으로 조장한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과거 자신들이 당했던 수법을 그대로 되돌려주는 듯 한 느낌을 받는다.

아편전쟁으로부터 시작된 중국의 백년국치(百年國恥)에 대한 복수전은 비단 펜타닐만이 아니다. AI시대를 맞아 미중 간의 혈투는 더욱 심화될 것이고 우리가 취해야 할 외교 노선은 더욱 복잡미묘(複雜微妙)해져 가기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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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조계지도.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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