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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병철 Jul 15. 2024

마스터즈 오브 로마 3.

제 3 부 포르투나의 선택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누미디아의 주술사로부터 받은 점괘는 7번의 집정관을 역임할 것이며, 후에 자신을 능가하는 자가 나타날 것이라는 두 가지였다.

규정상으로 집정관은 1년간의 임기를 마치고 나면 10년간 재임할 수 없도록 되어 있었으나 마리우스는 아프리카 누미디아 정벌이라는 전쟁 수행을 이유로 그리고 게르만 족의 침입이라는 시급한 상황으로 인해 6년간 연거푸 집정관이 될 수 있었고 그가 죽기 직전 7번째 집정관이 될 수 있었다. 점괘가 들어맞은 것이었다.

그렇다면 두 번째 점괘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마리우스가 망명 생활을 청산하고 7번째 집정관이 되었을 때 그는 자신의 처조카인 카이사르가 바로 그 인물이 되리라는 예감을 한다. 그리고 죽기 직전에 카이사르를 유피테르 대사제로 임명해버림으로써 카이사르의 정치적 군사적 앞날을 차단해버리고자 한다. (*이 부분은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이야기에 기술된 내용과 해석상 큰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별도로 비교 분석할 필요가 있다. 옳고 그름의 사안이 아니라 다양한 해석들 하나하나가 얼마나 개연성이 있는가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마리우스 사후 그의 후계자 킨나와 카르보 등이 집정관으로 당선되어 로마를 통치하고 있었으며, 반면에 술라는 그리스로 출병하여 미트리다테스 6세와 격렬한 공방전을 벌이고 있었다. 술라는 상대적으로 부족한 병력과 지원 속에서도 전세를 우세하게 이끌어 미트리다테스로부터  항복 선언과도 같은 다르다노스 조약을 체결한 후 이탈리아로 회군하게 된다.

그리고 마리우스의 세력을 제거하고자 킨나와 카르보의 군사와 일대 결전을 가지게 됨으로써 로마는 또 다른 내전에 접어들게 된다.

약 2년간에 걸친 내전 끝에 술라의 군대가 승리하게 되고 그에 따라 정권은 술라의 손으로 넘어간다. 술라는 마리우스 세력들의 군사적 위협을 제거한 후, 자신을 집정관이 아닌 독재관(Dictator)의 지위에 올려놓는다. 독재관은 왕에 버금가는 모든 권한을 거머쥔 절대 권력자를 의미하게 되는데, 술라는 살생부와 같은 공권박탈자 명단을 작성하여 마리우스의 잔당을 하나씩 정리하며 그들이 보유하고 있던 모든 재산을 국고에 귀속시키거나 싼 가격으로 입찰하여 그의 지지 세력들이 부를 축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민중파(포풀라레스)로 분류되는 마리우스와 달리 술라는 귀족파(혹은 원로원파, 옵티마테스)로 평가되는데, 독재관에 취임한 술라는 원로원 의원 수를 300에서 600명으로 늘리고, 무산 계급이 아닌 유산 계급의 이익을 보호하고자 했다. 군사적으로는 루비콘 강 이남으로 군대가 진입하지 못하게 했고, 호민관의 지위와 권한을 대폭 축소하였다.

술라는 여러 방면에서 열정적으로 국가개혁을 시도하지만, 술라는 미트리다테스와의 전쟁 동안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심한 당뇨와 피부염, 탈모 등으로 이미 엉망으로 무너진 육체적 상태였고, 마리우스 파와 치렀던 내전으로 그의 정신세계 또한 처참하게 피폐된 상황이었다.     


한편, 카이사르는 마리우스에 의해 유피테르 대사제로 임명될 당시 마리우스의 심복인 킨나의 딸 킨닐라와 혼인을 맺었는데, 킨나가 공권박탈자 명단에 포함됨으로써 술라의 처조카인 카이사르 자신의 목숨까지도 위험에 처하게 된다.

이에 술라는 카이사르에게 킨닐라와의 이혼을 강요하지만 카이사르는 이혼을 정면으로 거부하고 술라의 감시망을 피해 정처 없는 도피 생활을 감행한다.

그런 와중에 카이사르의 어머니 아우렐리아는 술라와의 인간적 교분과 집안의 유대 관계를 바탕으로 카이사르의 사면을 간곡히 호소한다. 아우렐리아는 트로이 전쟁의 중심에 있었던 헬레나에 비견될 만큼 출중한 미모와 지적으로도 빼어난 여성으로 알려져 있었다.  

항시 아우렐리아를 흠모해왔던 술라는 마지못해 카이사르를 사면하게 되고, 어렵사리 죽음을 면한 카이사르는 아시아 속주(아나톨리아 반도)에 하급군관으로 파견되는데, 이는 정치적 야망이 가득했던 카이사르에게는 유피테르 대사제라는 종교적 굴레를 벗어남과 동시에 자신의 나래를 펼 수 있는 행운으로 작용하게 된다. 고진감래(苦盡甘來)란 말도 부족하고 무언가 포르투나(행운의 여신)가 계획하는 큰 그림을 향해 나아가는 모양새였다.

아니나 다를까? 카이사르는 타고난 군사적 재능과 정무적 감각을 바탕으로 모든 군관 중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여 특히 미틸리니 공성전에서 그는 큰 수훈을 세워 시민관을 수여받게 된다. 시민관 수여자는 자동으로 원로원에 입회를 하게 되고 그가 시민관을 쓰고 원로원에 들어설 때면 모든 의원들이 기립하여 박수를 치며 경의를 표하는 관례가 있을 정도로 매우 영광스런 훈장이었다.  

    

술라의 집정 기간 동안 로마는 동시다발적으로 외란과 내란을 겪게 되는데, 하나는 마리우스의 친척이자 술라의 옛 동료이기도 한 퀸투스 세르토리우스가 히스파니아로 건너가 독자적인 세력을 탄탄히 구축하고 있었고, 이탈리아 남부에서는 검투사 출신의 스파르타쿠스가 노예와 하류 계층의 민중을 선동하여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킨다. 이 같은 로마의 상황을 예의주시하던 폰토스의 미트리다테스가 다르다노스 조약을 위배하며 또 다시 로마의 아시아 속주들을 공격하기에 이른다.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는 말이 있듯이 이 같은 내우외환의 위기 속에서 여러 영웅이 탄생하게 된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이다.

그는 집정관 출신인 아버지 폼페이우스 스트라보의 영향으로 어릴 적부터 군사 문화에 젖어 성장하였고 피케눔 지역 일대와 이탈리아 북부에 광활한 토지를 소유한 기사 계급의 유명 인사였다. 또한 알렉산더 대왕에 비견되는 외모를 갖고 있었기에 민중의 호감도 역시 매우 높았다고 한다. 술라는 폼페이우스의 젊은 기백을 높이 사서 그에게 집정관급 임페리움(군사적 권한을 포함하여 다양한 분야에 대한 절대적 자치권한권)을 부여하고 히스파니아로 파견하여 퀸투스 세르토리우스에 대항하도록 한다. 약 7년간의 전쟁 끝에 세르토리우스를 처단한 폼페이우스는 당당히 개선식을 올리며 로마에 입성한다. 젊고 부유하며 외모도 출중한 영웅의 탄생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카이사르보다 6살 연상이다.    

 

다른 한편, 스파르타쿠스의 내란을 진압하기 위해 술라는 로마 최대의 부호(富豪)인 크라수스에게 권한을 주어 스파르타쿠스를 제거토록 한다. 아시아 속주에서 돌아온 카이사르는 이 당시 크라수스 휘하로 파견되어 그의 참모로서 함께 생활한다. 그는 카이사르 보다 15년 연상이다. 크라수스는 돈 버는 재주는 당대 최고였으나 군사적 재능은 그에 훨씬 미치지 못했던 것으로 평가되는 인물이고 정치적 감각 또한 뛰어나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참모인 카이사르의 조언에 많은 것을 의존하게 된다. 아무튼 스파르타쿠스의 난을 어렵사리 진압한 크라수스는 폼페이우스와 대등한 개선식을 요구할 자격을 얻게 되고, 부와 명예를 동시에 가진 영웅으로서 등극하게 된다.

외란과 내란을 동시에 극복한 두 영웅은 집정관 선거를 앞두고, 군사적 시위를 하며 자신들의 군대를 해산하지 않고 대치 국면으로 접어들게 된다. 두 영웅의 정치적 야망으로 인하여 어쩌면 또 다른 내전이 발발할 수 있는 위기 상황이 전개되는 것이다.

이때 크라수스 휘하에 있던 카이사르는 정치적 기지를 발휘하여 양 진영을 오가며 중재를 시도한다. 그리고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가 밀약(密約)을 맺도록 유도하고 나란히 집정관 선거에 출마하여 두 사람 모두 무난히 당선이 된다.    

 

카이사르와 동 시대 인물로서 폼페이우스, 크라수스 외에 키케로를 빼놓을 수 없다.

어릴 때부터 달변과 천재성을 타고난 키케로는 한때 아버지 폼페이우스 스트라보의 휘하에서 군복무를 한다. 나약한 체격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지만 아들 폼페이우스의 배려에 힘입어 이를 극복해나가는 과정에서 둘만의 우정을 쌓는다. 키케로는 군복무후에 변호사로서 명성을 얻게 되고 카이사르 또한 변호사로 활동하며 저변 확대에 주력한다.     

그리고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의 집정관 당선을 지켜본 카이사르는 히스파니아로 진출하여 군인으로서의 더 큰 위업을 세우고자 결심한다. 군사적 명망을 얻는 것이 바로 집정관이 되기 위한 지름길임을 잘 알고 있기에...   



            

*P/S

1. “루비콘 강을 건넜다”라는 말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발생했거나 이미 내친걸음이라 되돌릴 수 없는 경우에 자주 인용되는 말이다. 술라가 2번째 쿠데타로 집권한 이후, 그는 루비콘 강(이탈리아반도 북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탈리아 갈리아 지역과 이탈리아의 경계선임)이남으로 병력을 진입시키지 못하도록 규정을 만들었고, 이를 어길 시에는 반역죄로 처벌을 받도록 했다. 후에 카이사르는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루비콘 강을 건너게 된다. 전언한 바와 같이 카이사르는 큰 고모부 마리우스의 저주(유피테르 대사제라는 굴레)에서 벗어났으며, 나중에는 작은 고모부 술라가 마련한 쿠데타 방지책도 몸소 격파하게 되는 것이다.  


2. 히스파니아는 현 스페인 지역을 지칭하는 것인데 스페인 영토를 동서로 구분하여 로마에서 가까운 동부 지역을 가까운 히스파니아, 상대적으로 더 서쪽에 있는 지역을 먼 히스파니아라고 불렀다. 그리고 현 스위스와 프랑스 지역을 갈리아 지역이라고 했으며 이탈리아 북부 루비콘 강 이북을 이탈리아 갈리아라고 했다.     

   

3. 술라가 마리우스 파(포풀라레스)를 척결한 수단은 소위 공권박탈이었다. 공권박탈자 명단에 기입되는 순간 폐족이 되며 목숨과 재산을 모두 잃게 되는 것이다. 호가호위(狐假虎威)하는 자들은 예나 지금이나 존재하기 마련이다.

크리소고노라는 자는 그리스 출신으로 술라의 노예였다. 술라는 그를 노예에서 해방시켜 신분을 상승시키고 국가 여러 중요한 사업을 맡겼는데 그 중에 공권박탈 조치의 총괄책임자로도 활동을 했다.

크리소고노는 자신의 권세를 악용하여 개인적 복수는 물론 탐나는 재산을 가진 자들의 명단을 이런저런 명목으로 끼워 넣어 자신의 탐욕의 그릇을 끝없이 채워가고 있었다. 나는 새도 떨어뜨릴 위세를 가진 크리소고노를 상대로 키케로는 그를 기소하여 법정에 세운다. 그의 횡포를 낱낱이 고발하여 무고한 피해자들을 구제하는데 앞장을 선다. 법정에까지 나온 술라는 크리소고노의 유죄가 판결되자 오히려 키케로를 치하한다.

“안 그래도 어떻게 해야 크리소고노를 제거할 수 있을지 전부터 궁리하던 차였지. 내가 그렇게 바보는 아니거든. 단지 가끔 해결이 까다로운 경우가 있지.”

이로써 키케로는 갑자기 큰 명성을 얻고 영웅이 된다. 공권박탈 조치에 대항해서 이긴 자는 키케로가 유일했다.  



               

---------- 제3부 포르투나의 선택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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