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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 (도스토예프스키 작)을 읽고.

- 누군가에게 일독을 권하고자 한다...

by 이병철


얼마 전 [나폴레옹 세계사]를 읽고 난 후,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접하게 되었다. 나폴레옹이란 존재가 죄와 벌의 사상적 문학적 모티브이자 모티프라는 사실이 흥미로웠고 어릴 적 이해하기 힘들었던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을 다시금 찬찬히 읽어보고자 했다.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침공한 것은 1812년이었고 러시아는 청야전술(淸野戰術/Scorched Earth Tactics 초토화 전술이나 청야 전술이나 서로 비슷한 뜻이지만 초토화 전술이란 말은 대체로 공격입장에서 쓰이고 수비의 입장에선 청야 전술이 적절하다)로 대응하여 나폴레옹 대군을 피폐하게 만들어 50만 명의 전사자를 기록한 것으로 알려진다(참고로 6.25전쟁의 사망자 수는 137만 명으로 추정된다). 러시아는 비록 승리를 거두었고 이는 나폴레옹의 몰락으로까지 이어지게 되지만, 청야전술에 따른 러시아의 인적 물적 피해도 매우 심했던 것이다. 동 작품은 1860년대 집필한 것이지만 나폴레옹의 존재감이 그만큼 강렬하게 각인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이고, 당시의 러시아는 농노 해방과 산업화에 따른 사회적 변화기이자 니힐리즘과 유물론 등이 팽배하는 정치적 불안기에 처해 있었다.

작품에 등장하는 라스콜니코프는 페테르부르크의 가난한 대학생으로서 현실적으로 무력하고 빈곤하지만 강인한 개성을 지닌 이지적이고도 사색적인 청년이다. 그는 인간을 범인(凡人)과 비범인(非凡人), 즉 평범한 인간과 천재적인 인간 두 종류로 나누어 생각했다. 그리고 범인은 기성의 법률과 도덕에 복종할 의무가 있으나, 비범인은 그러한 법률과 도덕을 초월한 권리를 가진다고 확신했다. 특히 인류 전체의 이익을 목적으로 할 때 그 일부분을 희생시킨다는 것이 불가피하고 또 마땅히 허용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마키아벨리즘과 니체의 초인사상과 비슷한 사회정치 철학을 갖고 현실적 고뇌 속에서 방황을 거듭한다.


라스콜니코프는 생각한다. ‘누가 나폴레옹의 살인죄를 물었던가? 나폴레옹은 사상 최대의 살인자인데도 사람들은 그를 영웅으로 존경하고 있지 않은가! 그것은 나폴레옹이 범인(凡人)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하숙집 근처에서 전당포를 운영하며 사회에 전혀 기여도가 없는 노랑이 노파를 살해하여 그의 금품을 강탈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 자금으로 세상을 구할 자신과 같은 인물의 학비와 생활비로 사용하는 것이 대의에 부합하는 것이라 착각을 한다. 이 같은 무시무시한 시도를 감행하는 도중 마침 집에 돌아온 노파의 여동생까지 살해하게 된다. 막상 노파의 재물을 허둥지둥 챙겨왔지만 이를 사용할 엄두도 못 내고 공터 어딘가의 큰 돌덩이 아래 묻어 버린다.

여기서부터 라스콜니코프의 내면에 두 가지 갈등이 발생한다.

초인사상에 사로잡힌 이성적 논리와 인간 본성에 기인하는 양심의 가책 속에서 정신착란과 같은 기이한 행위와 살인에 대한 죄책감으로 종잡을 수 없는 행보가 반복된다.

이때 등장하는 소냐라는 인물이 있다.

그녀는 실직한 하급관리의 딸로서 가족의 생계를 위해 자신이 가진 유일한 자본(그녀를 동정하는 레베쟈트니코프의 표현에 따르면)인 육체를 팔아 근근이 생활을 유지하는 소녀가장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선술집에서 우연히 알게 된 소냐의 아버지 마르멜라도프의 사고사(事故死)를 목격한 라스콜니코프는 고향에서 어머니와 누이동생이 어렵사리 보내준 생활비 모두를 소냐의 가정에 장례비용으로 던져주고 만다.

장례식 전날 감사 인사를 하려고 온 소냐와 만난 라스콜니코프는 그녀와의 대화에서 그녀의 깊은 신앙심과 가족을 위한 희생에 감화를 받는다.

라스콜니코프는 자신도 모르게 소냐의 순수한 영혼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게 되고 소냐의 헌신적 인도에 힘입어 스스로 경찰서의 문을 두드리게 된다. 자수의 길을 찾는 것이었다.


라스콜니코프가 시베리아에서 8년의 수감 생활을 하는 동안 소냐는 바느질 등 허드렛일을 해가면서 그의 옥바라지를 한다.

감옥에 있으면서 비로소 ‘자유의 몸(?)’이 된 라스콜니코프는 자기 과거의 행위를 다시 한 번 되씹어 음미해보았으나 그렇게까지 추악한 것으로 생각되지 않았다.

“그것이 나쁜 짓이기 때문일까? 그러나 나쁜 짓이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의 양심은 어디까지나 평온하기만 하다. 물론 형법상 범죄는 저질렀다. 물론 법의 조문은 유린되고 유혈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법의 조문에 따라 내 목을 자르면 된다. . . 그러면 되는 거야!

물론 그렇게 되면 권력을 계승하지 않고 스스로 그것을 탈취한 수많은 인류의 은인들도 그 첫걸음에서 의당 처벌되었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끝내 자기의 걸음을 버티어 나갔다. 그러기에 ‘그들은 정당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끝까지 버티지 못했다. 그러고 보면 나는 그 첫걸음을 자신에게 허용할 권리가 없었던 것이다.”

옥중에서 조차 내면의 갈등에 휩싸여 방황하던 라스콜니코프는 자신의 행위에 대한 정당성을 찾고 자신의 행동에 대한 합리화를 위한 고민을 거듭하던 중, 그는 예사롭지 않은 악몽에 시달린다.

그 내용은,

“아시아 대륙에서 유럽을 향해 오는, 지금까지 듣도 보도 못한 어떤 가공할 만한 전염병 때문에 전 세계가 희생될 운명에 직면했다. 극히 소수의 선택된 몇 사람을 제외하고 인류는 죄다 멸망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인체에 파고드는 현미경적인 존재인 일종의 선모충이 출현한 것이다. 그런데 이 생물은 지능과 의지가 부여된 정령이었다. 그래서 이것에 걸린 사람들은 이내 귀신에 홀린 듯이 미쳐버리고 말았다. 인간은 여태껏 이것에 전염된 환자들만큼 자기 자신을 확고부동한 진리를 파악한 현인처럼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들만큼 자기의 판단이나 학술상의 결론, 도덕적인 확신과 신앙 등을 움직일 수 없는 진리인 양 생각한 사람은 전무후무했다. 국민이란 국민이 차례차례 그것에 전염되어 미쳐버렸다. 서로 이해하려 하지는 않고 저마다 자기 한 사람이 진리를 파악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면서, 남을 보고는 번민하고 자기 가슴을 두드리고 손을 비비면서 울었다. 그리고 누구를 재판해야 할지도 모르고, 무엇을 악으로 삼고 무엇을 선으로 삼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의견 일치를 보지 못했다. 또 누구를 유죄로 하고, 누구를 무죄로 할 것인지도 몰랐다. 일상적인 일들은 모두 내던져버렸다.

저마다 제멋대로 의견과 수정안을 내세우지만 일치를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멸망해갔다. 세상에서 이 재액을 모면한 사람은 불과 몇 명밖에 없었다. 그것은 새로운 종족과 새로운 생활을 창조하며 이 지상을 갱신하고 정화할 사명을 띤, 선택된 순결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리고 어디서도 그러한 자를 본 사람은 없었고, 그들의 말이나 음성을 들은 사람도 없었다."


소냐의 옥바라지를 그리 탐탁지 않게 생각하던 라스콜니코프는 악몽에서 깨어난 어느 날, 불현듯 소냐의 모습에서 위대한 사랑의 힘을 느끼고 전율에 휩싸인다. 그들을 부활시킨 것은 사랑이었다. 새로운 미래로의 서광, 새 생활에 대한 희망의 빛이었으며, 도스토예프스키의 표현에 의하면 논리적 변증법 대신에 생활이 온 것이다.

그들은 남은 형기 7년을 7일 맞잡이로 보고자 했다. 형벌을 달게 받고 재생의 의지를 다짐하는 것이다. 이 새로운 생활이 거저 얻어지지 않으며 앞으로 얼마나 많은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 그들에겐 중요치 않았다.


*P/S

1. 이 작품의 키워드는 행위의 정당성과 라스콜니코프 악몽의 내용처럼 사회 시스템의 존속이다.

자신의 일방적인 확신에 따른 행위를 어떻게 정당화할 것인가? 사회적 합의가 없는 일탈적인 행위일 뿐만아니라 사회시스템의 존속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독단적인 돌발행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이다. 게다가 유토피아를 갈구하는 개개인의 염원은 왜곡된 영웅주의의 팽배를 유발하는 파라독스에 빠지게 된다.

자기 행위에 대한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중요한 요건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요건들이란 법적, 윤리적, 사회적 관점에서 다양하게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라스콜니코프의 경우 법적인 권한을 위임받은 바도 없었고 그렇기에 윤리적 도덕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행위에 지나지 않지만, 라스콜니코프가 시름했던 치열한 내면의 갈등은 우리 모두가 한 번 쯤은 상상해봤거나 시도하려 맘먹은 적이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위대성은 소냐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감성적 흐름으로 빠져들기 쉬운 스토리를 그의 탄탄한 철학적 사상을 바탕으로 전반적인 이야기의 흐름을 인간승리로 승화시킴으로써 작품의 차원을 드높이는 데 있다할 것이다.

2. 동 작품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 중에 스비드로가일로프의 캐릭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자본과 육욕의 화신으로 그려지는데, 핸섬한 인물로서 50대 중년이지만 자녀의 가정교사로 들어온 두냐(라스콜니코프의 여동생)에게 흑심을 품고 접근한다. 전처를 이용하였고 부유한 아내를 새로 맞아들이지만 그 또한 독살하여 자산을 독차지한다. 그리고 두냐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한 채 위선적 호혜를 베풀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자 자신의 지난 삶에 깊은 회의를 느낀다. 그 또한 인간으로서 어찌할 수없는 내면적 고뇌에 힘들어하며 구원의 손길을 갈구하지만 결국 권총으로 자살함으로써 부질없는 생을 마감한다.

3. 약 160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의 현재는 법치주의가 무너지고 공화정이 위협받는 시국에 있다. 어줍잖은 영웅주의와 기득권 유지에 초점을 맞춘 엘리티즘, 그리고 이에 상응하는 포퓰리즘이 대치하는 형국이다. 수감 중인 라스콜니코프가 시달렸던 악몽은 비단 그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우리의 현실을 예견한 것처럼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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