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 전쟁은 어떻게 세계지도를 다시 그렸는가(알렉산더 미카베리즈지음)
파스칼은 말하기를,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낮았다면 세계지도가 바뀌었을 것이다”라고 했지만, 실제로 세계지도를 마치 떡 주무르듯 했거나 혹은 그 파동에 따른 여파로 온 세계에 거대한 지각변동이 초래된 사건이 있었으니 그 중심에 있는 인물이 바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이다.
나폴레옹(1769~1821)을 살펴보는 것은 18세기말에서 19세기 근대사를 이해하는 단초가 될 것이고, 오늘날 세계지도의 골격 형성과 함께 법률과 정치사상적 체계 또한 그 당시에 비롯되었음을 알게 된다.
저자인 미카베리즈는 나폴레옹에 대한 연구에 몰두함과 동시에 그로 인한 세계사적 지각변동이 어떻게 이루어졌는 지에 더욱 비중을 두고 동 작품을 저술하였다. 총 3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마지막 3권은 주석과 주해로만 채워져 있어 매우 철저한 고증을 통한 역작이었음을 알 수 있다.
시대가 영웅을 만들듯이 나폴레옹의 시대는 프랑스 대혁명(1789)이라는 역사적 사건으로부터 그 뿌리를 찾아야 한다.
프랑스 혁명이 발발한 동기를 요약하는 것은 비록 진부해 보이지만 되짚어 보지 않을 수 없고, 현재 우리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진보와 보수, 혹은 좌파와 우파에 대한 고전적 의미를 다시금 이해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
첫째, 영국과 프랑스의 7년 전쟁의 결과이다.
프랑스 혁명 이전 7년 동안(1756~1763) 두 나라 간의 충돌은 유럽, 북미, 인도, 카리브해 등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었으며, 결과적으로 식민지와 해양 패권을 둘러싼 경쟁에서 영국이 승리하게 됨에 따라, 프랑스는 북미와 인도에서 세력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막대한 재정 손실을 초래하게 되었다.
둘째, 게다가 1776년 발발한 미국 독립 전쟁에 있어 영국에 대항하여 독립 세력에게 지원을 하였으나 아무런 소득 없이 재정 지출만을 초래하게 되어 가뜩이나 힘든 경제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는 결과만을 낳았다.
셋째, 군주제에서 법치와 공화주의로의 변화를 꾀하는 계몽주의 철학의 확산은 프랑스 식자 계층에 널리 확산되었고,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과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은 자유주의 여론을 환기시켰다. 파리에서 이 여론은 살롱이라고 부르는 예술가와 작가, 귀족, 여타 엘리트의 일원들이 정기적으로 만나 논의하는 포럼으로 발전하여 여론 형성의 중심이 되고 있었다.
넷째, 미국의 독립선언서와 헌법 제정은 “예로부터 내려오는 권리와 자유”에 의존해 정치를 정당화하는 기존 관행과의 단절을 나타냈다.
상기의 흐름을 외면한 채 앙시앵 레짐(ancien regime 구체제)은 부족한 자금 란을 해소하고자 더 많은 세금을 부과하려 했으나, 심한 반발에 부딪히자 루이 16세는 삼부회를 소집하여 위기를 극복하고자 한다. 삼부회란 성직자(제1신분), 귀족(제2신분), 평민(제3신분)로 구성된 의결기구인데, 이 중에서 제3신분은 자신들을 국민의회로 선언하는 혁명적 움직임에 나서게 된다. 국민의회는 구체제의 상징이던 바스티유 감옥(실제로는 무기고의 성격이었음)을 습격하여 함락시키고 농민봉기(소위 대공포로 일컫는)로 한층 강화되어 간다.
국민의회는 귀족과 성직자 계급의 특권을 폐지해 귀족제도 전체의 토대를 실질적으로 허물었으며 인간과 시민의 권리에 관한 선언은 계몽주의의 보편적 이상을 끌어안았고, 인민 주권과 법 앞에서의 평등을 비롯해 양도 불가능한 권리와 자유를 선언했다.
이 같은 혁명의 불길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루이 16세는 프랑스에서 탈출하여 혁명에 대항하는 외세로부터 군사적 지원을 구하기 위해 도주(바렌 도주 사건)를 시도하지만 발각되어 체포된다. 국왕이 외국으로 도망쳐서 외세를 등에 업고 자신들을 처단하고자 했던 사건은 오히려 많은 이들이 군주정에 등을 돌리게 하는 정치적 패착이었고 민주공화정을 선호하는 중대한 방향 전환으로 이어지게 된다.
국민의회에서 국민공회로 명명한 혁명 세력은 1793년 1월 루이 16세가 국민을 배신하고 외국과 내통했다는 혐의로 반역죄를 선고하여 파리의 혁명광장(콩코르드)에서 단두대(Guillotine 기요틴)로 처형을 하기에 이른다.
이는 프랑스 부르봉 왕정의 종말과 함께 근대 시민사회로의 전환을 의미하며 군주제에 안주하고 있던 유럽 전역에 엄청난 충격을 전하게 된다.
유럽 군주제 국가들은 프랑스 혁명 사상(자유, 평등, 박애)의 전파에 불안을 느끼고 이를 견제하여 왕정을 복원하려는 목적으로 주요 국가들이 연합하여 대불동맹(對佛同盟 프랑스에 대항하기 위한 동맹)을 결성하기에 이른다.
대불동맹은 1792년~1815년까지 총 7 차례에 걸쳐 진행되었으며 이를 프랑스 혁명 전쟁으로 명명하였고 나폴레옹이 등장하면서 나폴레옹 전쟁으로 부르게 된다.
대불동맹을 다루기 전에 염두에 두고 있어야할 사항은,
영국과 프랑스는 철천지원수로서 대불동맹 이전과 이후에도 견원지간이라는 점과 당시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 등 주요 유럽 제국들은 이합집산과 합종연횡으로 서로가 물고 물리는 이해관계 속에서 치밀한 외교적 복마전으로 일관하고 있었고 그렇기에 이를 역이용한 나폴레옹 전쟁이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었다고 본다.
즉 당시 국가적 개념은 경계에 따른 통치 관할 지역이라는 인식이 강했고 민족주의적 단합이라든가 타민족 지배에 대항하는 독립 정신 같은 의지는 현재와 달리 매우 미약했다는 점을 미리 파악하고 있어야겠다.
그리고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좌파와 우파의 용어와 개념 역시 프랑스혁명으로 인해 구성된 국민의회에서 유래를 찾을 수 있는데 급진적 개혁을 주장하는 자코뱅파가 좌측에, 상대적으로 온건적 변화를 추구하는 지롱드파가 우측에 자리함으로써 좌파와 우파라는 용어가 파생된 것이다. 좌파든 우파든 군주제에 대항하여 공화주의를 주창하는 개혁이라고 하는 점에서는 같은 부류였으며 이에 대응하여 왕정복고를 추진하는 세력을 왕당파라고 하였다. 즉 좌파와 우파의 대립은 대척점에서 바라볼 사안이 아니라 같은 방향으로 향하되 급진과 온건적 지향 점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좌우를 대립 관계로 받아들여지게 된 요인은 바로 정치인들과 언론에서 조장한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다시 대불동맹으로 돌아와서, 7차에 걸친 대불동맹의 흐름을 이해하는 것은 나폴레옹 전쟁의 골격을 이루는 것으로서 아래와 같이 하나씩 나열하며 분석해 본다.
1. 제1차 대불동맹(1792–1797) :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영국, 에스파냐, 네덜란드 등 대다수 유럽 국가가 가담.
루이 16세 처형과 함께 프랑스 혁명 사상의 확산을 막고자 상기의 군주 국가들이 연합하여 프랑스와 교전을 벌인다. 프랑스는 내부적 혼란과 함께 외세에 대항해야하는 극도로 어지러운 상태가 지속되는데, 1792년 자코뱅파는 프랑스가 공화국임을 선포하고 왕당파가 끌어들인 외세 세력과의 전면전을 위하여 국민 총동원령을 내린다. 그 포고령은 “모든 프랑스 남성은 영구적으로 군대에 징발 된다”는 조항과 함께 공장과 광산이 전면 조업에 임하게 된다. 국민 총동원령을 왕당파와 그를 지지하는 외세의 위협에 맞서 조국을 수호하기 위한 애국적 의무로 치켜세운 자코뱅파는 “무기를 든 국민”을 국가적 선전 캠페인으로 창조함으로써 새로운 현대전의 출현을 알렸다.
코르시카 섬 출신의 무명의 포병 소령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등장하여 1793년 프랑스 남부 지중해에 접한 툴롱에서 영국군을 격파한다. 그의 주된 전략은 항시 연합군으로 형성된 적의 진지 중앙을 공략하여 2분내지 3분으로 나뉘게 하고 후에 하나씩 섬멸하는 전략을 썼다. 연합군이 비록 수적 우세에 있다할지라도 조직의 단결과 응집력에 허점이 있음을 간파한 것이다.
그 후 이탈리아 원정에서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며 승승장구함으로써 그의 명성을 드높이게 된다.
1793년 이 시기에 프랑스와 영국, 에스파냐는 신대륙과 카리브 해에서 각축전을 동시에 벌이고 있었는데 특히 프랑스와 에스파냐는 에스파뇰라 섬을 공동으로 차지하고 있었고 이 지역이 가지는 전략적 점령을 위한 쟁탈전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아메리카 대륙과 카리브 해를 포함한 신대륙에 관련된 나폴레옹 전쟁의 여파는 별도로 정리할 필요가 있다. 참고로 에스파뇰라 섬은 콜롬부스가 처음으로 발견한 신대륙이었고 섬의 규모가 남한의 3/4에 이르는 바 당시 콜롬부스는 동 섬이 인도의 일부로 생각했던 것으로 보이고, 에스파냐 왕실에 바치는 의미로 라 에스파뇰라(La Espanola)라고 명명한다. 이 곳은 유럽인이 처음으로 정착한 지역으로, 에스파냐 식민지 개척의 시작점이 된 카리브 해에서 쿠바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섬이다. 현재 에스파뇰라 섬에는 아이티와 도미니카 공화국이 공존하고 있다.
2. 제2차 대불동맹(1798–1802) : 오스트리아, 러시아, 영국, 오스만 제국 등이 가담.
나폴레옹은 1798년 영국 해양 세력을 약화시키고자 인도와 동방의 진출을 위한 거점인 이집트로 원정을 떠난다.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으로 군사적 공백이 생기자 유럽제국들은 잃어버린 영토를 회복하고자 2차 대불동맹을 결성한다.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은 결과적으로 성공적이지 못했지만 그와 함께 동반한 학자와 과학자들이 로제타석을 발견하게 되어 이집트 상형문자 해석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게 될 뿐만 아니라 이집트의 고대 문명, 지리, 생물, 문화 등을 연구하여 《이집트 기행(Description de l'Égypte)》이라는 방대한 저작을 남김으로써 이집트학(Egyptology)의 기초를 마련하게 된다.
나폴레옹이 이집트에 머무는 동안 프랑스 전시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민중은 영웅 나폴레옹의 귀환을 요청한다. 비밀리에 이집트를 빠져나온 나폴레옹은 그를 정계에 등용하고자 지원하던 조제프 시에예스와 함께 쿠데타를 시도한다.
쿠데타에 성공한 나폴레옹은 5인 총리체제로 운영하던 국정을 3통령제로 바꾸면서 실제적으로 총통의 권한을 갖는 제1통령으로 취임한다.
프랑스 혁명으로 인한 혼돈의 시대를 끝내고자 강력한 중앙집권제를 수립하여 내적으로는 나폴레옹 법전과 교육제도 개혁으로 내실을 기하고 외부 정복을 통하여 프랑스 혁명 사상의 확대와 국가적 발전을 도모하게 된다.
1797년부터 1802년까지 5년간은 유럽 지도를 다시 그리는데 결정적인 시간이었다. 나폴레옹의 지휘하에 프랑스는 승승장구하였고, 프랑스는 소위 해방(프랑스 혁명 사상의 전파)을 구실로 내세워 급속한 영토 팽창에 착수하여 “신 세계질서”를 구축하기에 이른다. 이런 라 그랑 나시옹(la Grande Nation)이란 관념이 프랑스의 외교정책으로 자리매김을 하게 된다.
라 그랑 나시옹은 타민족을 압제에서 해방시킨다는 발상과 프랑스의 국익을 보호한다는 발상을 조화시키려는 관념이었지만, 프랑스의 국익은 현지 애국자들의 열망과 갈수록 멀어지고 있었다. 즉 자유와 공화주의라는 초기의 혁명 원칙들을 암묵적으로 뒤엎고 그 대신 프랑스의 더 폭넓은 지정학적 이해관계와 제국적인 힘의 정치를 추구하는 셈이었다.
3. 제3차 대불동맹(1805) : 영국, 오스트리아, 러시아 등이 가담.
1802년 프랑스와 영국은 아미앵 강화조약에 서명을 한다. 동 아미앵 강화는 혁명전쟁의 공식 종결을 의미하는 것이다. 영국의 입장에서는 이미 2차 대불동맹의 실패로 더 이상 프랑스를 공략할 방안이 없었으며, 프랑스가 보유한 저지대 지방(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과 라인란트(현 독일의 여러 주로서 쾰른, 뒤셀도르프, 마인츠, 본 등이 있는 지역), 이탈리아에서 정복한 땅을 계속 보유하는 것을 용인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메리카 대륙 루이지애나까지 되찾게 되자(1800) 프랑스는 역사상 가장 광대한 영토를 보유하게 되었다(*루이지애나의 역사는 매우 흥미로운데 이 또한 별도로 다루고자 한다).
1804년 나폴레옹은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고 다른 유럽 왕정 국가들과 동등한 지위가 필요하다는 명분으로 황제 즉위를 국민투표에 붙인다. 99.9프로가 넘는 찬성으로 황제에 즉위하는데 그 유명한 왕관 책봉식의 해프닝이 일어난다.
통상적으로 교황으로부터 왕관을 받는 전통에서 벗어나 자기 스스로 왕관을 쓰는 모습을 연출한 것이다. 이는 자신이 교황이란 자리보다 아래에 위치하는 것이 아님과 동시에 왕의 자리는 국민과 자신의 힘에서 나오는 것임을 표현한 것이다.
나폴레옹의 황제 즉위는 전통적인 왕정국가들에게 큰 충격이었으며 그는 이탈리아 왕위를 동시에 겸하면서 주변으로 세력을 확대하고자 했다. 이에 가장 큰 위협을 느낀 오스트리아는 프랑스를 견제하고자 영국과 러시아를 끌어들여 나폴레옹에 대항한다.
이 당시 유명한 2개의 전투가 있었으며 하나는 트라팔가르 해전과 아우스터리츠 전투이다.
트라팔가르 해전은 영국의 호레이쇼 넬슨이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를 대파하지만 나폴레옹의 대륙지배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울름전투에서 패배한 오스트리아는 러시아군과 연합하여 아우스터리츠에서 다시 격돌하지만 무참히 무너짐으로써 오스트리아는 이탈리아와 독일 내 보유하고 있던 영토를 잃고 프랑스의 영향권에 속하게 된다. 아우스터리츠 전투는 나폴레옹의 가장 위대한 승리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으며, 달리 "3황제의 전투"라고도 불리는데 나폴레옹,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2세 등 3명의 황제가 맞붙은 점에서 유래한 명칭이다.
4. 제4차 대불동맹: 프로이센, 영국, 러시아, 스웨덴 가담.
3차 대불동맹 전쟁 동안 신성로마제국이 해체되자 프로이센은 프랑스의 독일로의 확장에 위협을 느끼고 이에 대응하고자 러시아, 영국 등과 4차 대불동맹을 결성한다.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은 파죽지세로 프로이센군에 큰 손실을 입히고 심지어 프로이센의 베를린을 점령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러시아군과는 일진일퇴의 양상을 보이다가 틸지트 조약을 맺게 된다. 틸지트 조약은 프랑스와 러시아, 프로이센 3국이 체결한 것으로서 주요 내용은 러시아가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나폴레옹이 발의한 대륙봉쇄령에 참여하기로 합의한 것이며, 프로이센은 3차 대불동맹의 오스트리아처럼 영토 상당 부분을 잃고 프랑스의 영향권에 들어가게 된다.
대륙봉쇄령이란 프랑스가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영국에 대패를 당한 이후 해군력이 막강한 영국을 제압할 방도가 없음을 깨닫고 1806년 베를린 칙령으로 유럽 대륙의 모든 국가들에게 영국과의 무역을 금지하고 심지어 중립국 선박도 나폴레옹 세력권 내 항구들에 출입을 금지한다는 내용이다.
이 같은 조치는 영국 경제에 일시적인 타격을 입혔지만 영국은 자신의 식민지 국가들과 아메리카, 아시아 등 다른 지역과의 무역을 확대하며 이를 극복해 간다. 반면에 영국 수입 상품에 의존하던 유럽 국가들은 극심한 경제 침체에 시달리게 되었고 몇몇 프랑스 자국 산업들은 한동안 활기를 띄었지만 상품 경쟁력이 떨어져 시간이 지날수록 유럽 전체가 경기불황에 힘겨워하게 된다. 당시 영국은 18세기 중반 시작된 산업혁명에 힘입어 기계화된 산업화가 급속히 이루어지던 시기여서 농업 생산성은 물론 공업 분야에서 현격한 제품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전통적으로 영국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해오던 포르투갈은 대륙봉쇄령에 반발하여 영국과의 교역을 지속하자 1807년 나폴레옹은 에스파냐와 힘을 합쳐 포르투갈 정벌에 나선다. 프랑스 군대가 리스본으로 몰려오자 포르투갈 왕실은 영국 해군의 도움으로 자신의 식민국가인 브라질로 피신하여 리오 데 자네이로에 왕실을 마련하게 된다.
포르투갈을 점령한 나폴레옹은 자신의 개인적 야욕에 사로잡혀 에스파냐 왕실 내부의 권력 투쟁을 해소한다는 명분으로 1808년 권력 투쟁의 당사자들인 카를로스 4세와 페르난도 7세를 강제 퇴위시키고 자신의 형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에스파냐의 왕으로 앉힌다. 이는 에스파냐에 내려오던 전통적인 부르봉 왕조의 종말을 의미하게 되는데, 여느 나라와 달리 에스파냐는 국민적 자존심에 크게 상처를 받았고 이때부터 에스파냐 전국적으로 반발과 게릴라 전쟁이 시작된다.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에서 일어난 사건을 이베리아 반도에서 발생한 것이라 하여 반도 전쟁(Peninsular War)이라고 부른다.
영국의 지원을 받은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는 1813년까지 대항을 지속하였고 3국(영국, 포르투갈, 에스파냐)의 군대가 빅토리아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프랑스 군대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완전히 철수하였고 조제프 보나파르트는 왕위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이는 나폴레옹이 1812년 러시아 원정으로 위해 병력을 북으로 이동함에 따른 영향도 컸다.
에스파냐는 페르난도 7세가 복위했지만 전쟁으로 인해 경제적, 정치적 혼란이 지속되었으며 이 틈을 이용하여 1810년도부터 중남미 대다수 국가들이 독립을 선언하면서 하나씩 둘씩 자신의 지배권에서 멀어져 갔다.
포르투갈의 경우 브라질로 피신한 왕실이 1821년 돌아왔지만 브라질의 독립 운동이 촉발되는 계기가 된 전쟁이었다.
나폴레옹 자신도 “에스파냐 전쟁은 위궤양과 같았다”라고 했듯이 반도 전쟁의 시작은 나폴레옹 정권의 몰락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데, 피지배국의 민족주의와 민중 저항의 힘을 보여준 사례로 평가받는다. (**반도 전쟁의 여파에 따른 중남미 독립 운동은 별도로 다루기로 한다).
5. 제5차 대불동맹(1809년) : 오스트리아와 영국
상기에 언급한 반도 전쟁 특히 에스파냐 게릴라들의 반발은 예상을 벗어나 강력하고도 집요한 것이었고 프랑스군은 극심한 어려움을 겪는다. 이처럼 프랑스군이 에스파냐에 몰두하는 사이 아우스터리츠에서 대패하여 많은 영토를 잃은 오스트리아는 복수의 기회로 삼아 영국과 함께 나폴레옹에 대항하여 전쟁을 발발한다.
그러나 나폴레옹에게 또 다시 고배를 마신 오스트리아는 쇤브룬 조약을 맺게 되어 전보다 더 많은 영토를 잃게 되고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게 된다. 또한 오스트리아의 마리 루이즈 공주가 나폴레옹과 결혼하는 조건을 수용하기도 한다. 이때부터 오스트리아는 유럽 무대에서 완전히 쪼그라든 나라로 추락하게 되는데, 나폴레옹과 맞선 수차례 전쟁에서 단 한 번도 이겨보지 못하는 비참한 신세가 된다.
6. 제6차 대불동맹(1812~1814) :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영국, 스웨덴 가담
나폴레옹의 지속된 대륙봉쇄는 유럽 대륙의 경제를 어렵게 하였고, 특히 프랑스와 탈지트 조약을 체결한 러시아는 영국과의 교역의 필요성이 지대했지만 성실히 임하고자 했다. 그러나 러시아 자신의 상품의 판로가 막히고 필요한 물자 구입이 갈수록 어려워지자 자국 경제에는 밀수가 성행하게 되고 심지어 브라질 선박에 영국 상품을 실어 수입하는 사태가 일어나기도 한다. 이 같은 눈속임에 나폴레옹은 격노하게 되고 러시아로서도 반발을 하게 되어 양국 간에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1812년 나폴레옹은 대규모 군단을 꾸려 러시아 정벌에 나서게 되고 우여곡절 끝에 모스크바까지 점령하게 되지만, 러시아의 청야전술(淸野戰術: 적군이 진군하는 지역의 자원을 파괴하여 물자와 식량을 확보하지 못하게 하는 방어 전술)을 감당하지 못하고 대다수 군사들이 굶어 죽거나 동상에 걸려 괴멸하는 심각한 패배를 당하게 된다. 러시아 원정에서 프랑스와 연합군의 군사는 400,000 명 이상의 사망자를 기록했다고 한다. 나폴레옹이 자랑하는 대육군(그란 다르메 Grand Armee)은 초라한 형상을 유지하는 수준으로 변했고 군사적 위상이 크게 흔들렸다.
이를 기화로 유럽 국가들이 나폴레옹을 진압하기 위해 조성한 연합군 결성을 제6차 대불동맹이라 부른다.
1813년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승리한 유럽 연합군은 기세를 몰아 1814년 파리로 진격하여 프랑스군의 항복을 받아낸다.
나폴레옹은 퐁텐블로 조약에 따라 퇴위하고 지중해 이탈리아 중서부에 위치한 엘바 섬으로 유배를 당한다. 유배라고는 하지만 나폴레옹은 엘바 섬에서 황제의 지위를 유지하면서 세습되지 않는 엘바 공국의 대공으로서 지내게 된다.
프랑스에는 망명 중이던 루이 18세가 즉위하게 되어 부르봉 왕조가 부활하게 된다. 루이 18세는 귀족과 자유주의 세력 간의 갈등을 해소하여 혼란한 정치 상황을 수습하려 하지만 자유주의자와 혁명세력으로부터 외면을 받는다.
1815년 엘바 섬에 있던 나폴레옹은 자신에 대한 민중의 지지가 여전하다는 소식을 접하고 자신의 지지자 1,000 여명과 함께 감시망을 피해 탈출에 성공한다.
이때 나폴레옹이 발표한 "프랑스인들에게"의 전문을 옮겨본다.
"프랑스인들에게(Aux Français)
프랑스인들이여,
나는 망명 생활 중에도 항상 너희의 목소리를 들었고, 너희의 고통을 느꼈다. 나는 너희가 나를 필요로 할 때마다 너희 곁에 있으리라 맹세했다. 나는 너희의 부름에 응답하기 위해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돌아왔다.
나의 이름은 너희의 승리와 영광의 상징이다. 나는 너희의 적들로부터 모욕을 받았고, 그들은 너희의 권리를 짓밟았다. 그러나 나는 너희의 자유와 행복을 위해 싸울 것이다.
나는 평화를 원한다. 나는 프랑스의 영광을 되찾고, 너희의 권리를 보호하며, 너희의 자유를 지킬 것이다. 나는 너희의 지지를 받아야 한다. 나는 너희의 황제로 돌아왔고, 나의 운명은 너희의 손에 달려 있다.
함께 일어서자. 우리의 적들은 우리의 단결을 두려워할 것이다. 우리는 다시 한번 프랑스의 영광을 빛낼 것이다. "
프랑스 남부에서 북부로 이동하면서 나폴레옹은 열렬한 대중의 지지를 받는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백일천하는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로 끝남과 동시에 그의 시대는 막을 내린다. 이 처럼 나폴레옹의 백일천하에 대응코자 진행된 연합군 결성을 제7차 대불동맹이라고 부른다.
패장이 된 나폴레옹은 아프리카 중서부 해안에서 700킬로 떨어진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유배되어 1821년 그곳에서 52년의 삶을 마감하게 된다.
나폴레옹 전쟁은 유럽과 세계 역사에 깊은 영향을 미쳤는데 무엇보다 유럽의 국경과 정치체제를 바꾼 것이다.
특히 프랑스 혁명사상(자유 평등 박애)은 그의 몰락 이후에도 유럽 군주제 국가에 영향을 미쳐 많은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특히 에스파냐, 독일, 이탈리아 같은 나폴레옹의 피지배국에 민족주의 의식이 움트기 시작하고 이를 기화로 민족 통일 운동이 활발히 전개된다. 이와 더불어 자유주의 사상이 확산된다.
19세기초 유럽과 온 지구를 흔든 나폴레옹은 현대 프랑스인들에게 영웅이자 동시에 논쟁의 대상이다. 그는 프랑스의 영광과 혁신을 상징하지만, 동시에 전쟁과 독재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의 업적과 과오는 프랑스 사회에서 끊임없이 재평가되고 있다.
*P/S
1. 나폴레옹의 루이지애나 매각은 매우 흥미롭다.
당시 루이지애나는 현 미국 본토(알라스카 제외)의 1/3에 해당하는 광활한 지역이었다.
1682년 프랑스 탐험가 카벨리에가 미시시피 강 유역을 발견하였고 루이 14세의 이름을 따서 루이지애나라고 명명한다.
영국과의 7년 전쟁으로 프랑스는 이 지역을 스페인에 양도한다.
1800년 나폴레옹은 루이지애나를 에스파냐로부터 반환받게 되었는데(에스파냐는 이탈리아 에스투리아 왕국을 대가로 받음), 이 당시 프랑스는 영국에 대항하여 해군 육성의 필요성을 절감한다. 나폴레옹은 이에 필요한 자금을 루이지애나 미국 매각으로 충당하고자 했다. 게다가 에스파뇰라 섬의 아이티에서 독립운동이 격렬히 일어나자 루이지애나와 아이티를 묶은 해상 무역의 전략적 의미가 퇴색하게 된다. 또한 대불동맹 전쟁으로 루이지애나까지 방어할 군사적 여력이 닿지 않았던 점들이 루이지애나 매각의 배경이라고 할 수 있다.
루이지애나의 광활한 지역은 현재 아칸소, 미주리, 아이오와, 오클라호마, 캔자스, 네브래스카, 미네소타, 콜로라도 주 등으로 나뉘어져 있다.
2. 1808년 나폴레옹의 에스파냐 정복은 부르봉 왕조의 단절을 의미하는데 이는 에스파냐 중남미 식민지들의 독립 운동을 촉발하게 된다.
당시 에스파냐는 중남미를 누에바 에스파냐(멕시코), 누에바 그라나다(콜롬비아), 리오 델 라 플라타(아르헨티나 지역)등 부왕령(副王領:virreynato)으로 정해 다스리고 있었는데 스페인에서 건너온 지배 계층을 반도인(페닌술라레스 peninsulares)이라 했으며 현지에서 태어난 에스파냐 자제들을 크리오요(criollo)라 하여 두 계층 간의 신분 차별이 매우 심했다. 크리오요들이 주동이 되어 정당한 처우 개선을 요구하는 움직임이 에스파냐 본국의 몰락을 기화로 촉발된 것이 독립 운동의 실체라 할 수 있으며, 이에 따라 혹자는 이를 독립이라기보다는 지배 세력 간의 정권교체의 성격이 짙다는 해석을 하기도 한다.
1810년 멕시코, 베네수엘라, 아르헨티나를 시발로 전 중남미 국가들에 독립 운동이 전개되어 1820~30년대 대다수 국가들이 분리 독립하기에 이른다.
중남미 국가들은 제각기 자국의 독립혁명가들을 숭배하고 있지만 그중에서 베네수엘라 출신의 시몬 볼리바르가 '그란 콜롬비아'라고 명명한 아메리카 연합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란 콜롬비아는 콜롬비아, 베네주엘라, 에쿠아도르를 아우르는 연합국가 형성으로 강대국에 맞서기 위한 시도였다. 그러나 지역적 이해와 정치적 견해 차이로 1831년 해체되어 분리 독립하였으며 현재의 볼리비아라는 국명은 볼리바르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시몬 볼리바르는 라틴아메리카의 통합과 발전을 위한 가장 상징적인 인물로 지금도 많은 이들에게 회자되는 이름이다.
3.동 작품을 읽으면서 미군 해군의 흑 역사를 발견하게 되었다.
1776년 독립운동을 시작한 미국은 1794년 조지 워싱턴이 해군 확충을 위한 예산 법을 통과시킴으로써 실제적으로 해군을 창설하게 된다. 미국은 19세기 초까지 바바리 국가(barbary pirates: 아프리카 모로코 알제리 튀니지 트리폴리 등 해적 활동을 일삼던 나라들을 지칭)들에게 연공(해마다 바치는 보호세)을 내거나 납치된 선원들의 몸값을 내는 편의적 방식으로 일관해 왔다고 한다. 현 지상 최고의 해군의 위용을 자랑하는 미국의 흑 역사가 아닐 수 없지만, 바바리 국가에 대항하고자 해군의 육성을 도모하는 계기로 삼아 오늘에 이르게 된다.
4. 중국 일본 조선
나폴레옹 전쟁 시기 동양 주요 3국(한 중 일)의 사정은 어땠을까?
중국은 강건시대(강희대제에서 건륭제까지)의 전성기를 지나 가경제(嘉慶帝)의 통치 시대로서 백련교도의 난을 진압하였지만 관리들의 부패가 날로 심해지는 시기였다.
당시 청나라의 대외 무역은 광동(광조우)에 국한하는 광둥시스템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1557년 명나라 정부 때부터 중국은 포르투갈 상인들에게 마카오에 영구적으로 정착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이는 포르투갈이 해적 퇴치와 무역 확대에 협력한 대가였다.
영국은 프랑스가 1800년 포르투갈 본국을 공격하자 포르투갈이 무역거점으로 삼고 있던 마카오 또한 프랑스의 속령으로 편입될까 우려를 표한다. 그들이 마카오 보호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대규모 군사를 파병하지만 청나라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혀 철수를 한다.
건륭제(乾隆帝)부터 시작된 영국과 청나라의 교역에서 영국은 주로 차, 비단, 도자기, 향료 등을 수입하였고 수출은 시계, 망원경, 카펫 등이었는데 영국의 무역 적자는 날로 커져만 갔으며 그 이유는 건륭제가 말한 "중국은 모든 것을 차고 넘치도록 소유하고 있으며 그 경계 안에 없는 물건이 없다"고 한 것이 당시 상황을 대변하고 있다. 이는 영국의 금과 은이 중국으로 유입되는 결과를 낳게 되는데, 오래전 읽었던 안드레 군더의 [리오리엔트]에 따르면 멕시코에서 스페인으로 보낸 은의 상당량(거의 50%에 이른다고 보면서 최소한 30%선이라고 평가한다)이 청나라로 유입되었다고 한다. 이에 영국은 무역 적자를 해소하고자 인도에서 아편을 제조하여 청나라에 수출하게 되는데, 이것은 후에 있을 아편전쟁(1839~1842)의 서막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은 도쿠가와 막부가 통치하던 에도시대(1603~1868)의 후반으로 쇄국정치로써 비교적 안정된 시기를 보내고 있었으며 네덜란드와 중국과의 교역만 제한적으로 허락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네덜란드인들의 거점인 나가사키에 영국 함선(페이튼호)이 나타나서 무력행사로 일본정부의 허락도 없이 입항을 하여 물과 식량 등을 맘대로 빼앗아 간다. 나가사키 사건이후 막부 정권은 해안 방어를 강화하고 선박 확인을 위한 새로운 시스템과 연락 네트워크 등을 정비하기 시작한다.
조선은 정조의 개혁정책이 끝나며 순조(1800~1834)의 재위 기간이었다.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시작되고 홍경래의 난(1811~1812)이 발생한다.
쇄국정치를 유지하지만 서양 선박들이 해안에 출몰하면서 점차 외부의 압력이 증가하고 있었던 시기였다.
순조 시대에는 서양 열강(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의 선박이 조선 연안에 출몰하기 시작하는데,
1816년: 영국 함대가 충청도 해안에 나타나 통상을 요구하고,
1832년: 영국 상선 로드 애머스트호(Lord Amherst)가 통상을 요구하며 충청도와 전라도 해안을 탐사했다고 한다.
조선 정부는 서양 선박의 접근에 대해 경계하며, 쇄국 정책을 유지했고 서양 열강의 통상 요구는 모두 거부되었다.
세상이 격변하던 나폴레옹의 시대에 우린 불안한 시절을 보내고 있었던 것인데, 다양한 역사서를 살펴보다가 문득문득 느끼는 점 하나는 '역사를 기록하는 것은 인간이지만 역사를 만드는 것 또한 인간'이라는 불변의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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