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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터즈 오브 로마 7 (콜린 매컬로 지음)

제 7 부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by 이병철

마스터즈 오브 로마의 마지막 단락(19~21권)이다.

애초에 이 작품을 선택한 나만의 이유는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궁금증이 있었기 때문이었고, 동 작품은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를 함께 다루고 있었기에 장장 21권에 이르는 장편임에도 감히 도전하는 동기가 되었다.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낮았더라면 세계의 지도는 바뀌었을 것이다”. 바로 철학자인 파스칼의 말이다.

이 말은 클레오파트라가 그녀의 대단한 미모로써 당대 최고의 영웅이었던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를 맘대로 주물렀으리라는 생각이 기저에 깔려있다고 봐야한다. 중국 상나라 주왕 때의 달기라든지 춘추전국시대의 서시, 한나라의 왕소군, 삼국지에 나오는 초선, 당나라 현종 때의 양귀비 등의 이미지가 자연스레 떠오른다. 하지만 그녀의 외모와 관련된 내용을 보면 아름답거나 고혹적이라는 표현은 별로 나오질 않고, 오히려 깡마르고 왜소해서 덜 자란 어린아이 같았다고 한다. 그녀의 코는 당연히 매부리코였고 눈빛은 형형해서 강렬한 빛을 발했다 한다.

그렇다면 당대의 영웅들을 그녀는 어떻게 사로잡을 수가 있었을까?

다음과 같은 3가지 매력이 뿌리칠 수 없는 유혹으로 그들에게 다가간 것이라 생각한다.

1. 목소리와 화술 : 그녀의 목소리는 매우 특이하면서도 자상함과 강단의 울림을 함께 전달하는 독특한 매력을 발산했다고 한다. 부드러우면서도 설득력 있어 많은 사람들이 그녀에게 빠져들게 만들었다.

2. 지성(知性) : 클레오파트라는 어릴 적부터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서 수많은 책들을 섭렵했으며 당대 최고 지성인 중의 하나였다고 평가받았다. 그녀의 외국어 구사 능력은 매우 출중하여 그리스어는 물론 다양한 동방 국가들의 언어를 구사하였다. 카이사르와 만날 때까지 라틴어를 몰라 처음 두 사람은 그리스어로 대화를 나눴으나 곧바로 카이사르로부터 라틴어를 배워 소통에 문제가 없었다고 한다. 카이사르 입장에서 보면 31살 차이가 나는 어린 소녀 같은 처자가 자신의 고국 어를 손쉽게 터득하는 모습이 귀여우면서도 색다른 매력으로 다가왔음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안토니우스의 경우 독불장군 같은 그가 클레오파트라에 전혀 매력을 느끼지 못하다가 점차로 빠져들어 가스라이팅에 가까운 집착을 보이게 되고 고대 판 로미오와 줄리엣에 가까운 사랑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3. 신비주의 : 가장 부유한 나라인 이집트의 여왕이자 파라오로서 그녀가 지니고 있던 권위 그리고 종교적으로 채색된 절대적 이미지는 하나의 마력(魔力)과 같은 힘을 발휘하였으리라.


다시 동 작품의 전개로 돌아와서, 카이사르 암살 이후 소위 해방 단이라 명명한 일당들과의 내전이 전개되었고, 제6부에서 다룬 것처럼 2차 삼두연합(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 그리고 레피두스)은 필리아 전투에서 내전에 종지부를 찍는다.

그리고 삼두연합의 구성원들은 로마의 세력권을 셋으로 나누어 지배하는데 합의한다.

1. 옥타비아누스 : 로마 및 이탈리아 반도 그리고 갈리아 지역

2. 안토니우스 : 마케도니아, 그리스, 아나톨리아 반도의 동방 국가들

3. 레피두스 : 히스파니아와 북아프리카

이것은 안토니우스의 행로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됨과 동시에 시간이 흐를수록 결정적인 패착으로 이어진다. 즉 안토니우스의 부족한 정치 감각 때문인 것으로 평가되는데 로마를 중심으로 세력을 확대하는 것이 바람직함에도 불구하고 안토니우스는 풍요와 착취의 대상인 동방으로 눈을 돌려 그곳에서 돈과 명성을 얻고자 추구하였다.

반면에 내전 이후 복잡한 로마의 정치 환경과 피폐된 경제 상황임에도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뒤를 잇는 후계자로서 묵묵히 자신의 명성을 차곡차곡 키워간다.


옥타비아누스가 레피두스와 연대하여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의 둘째 아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를 그의 본거지인 시칠리아 섬에서 격파한다. 당시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는 로마로 향하는 곡물을 해상에서 약탈하는 해적 행위로 로마와 이탈리아의 곡물 가격을 좌지우지하고 있었으며 안토니우스는 오히려 그를 방관하여 옥타비아누스의 경쟁자로 방치해 두고 있었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정벌 이후 레피두스는 자신이 폼페이우스의 군사들을 모두 흡수한 것으로 착각하였고, 자신의 공적에 스스로 취한 그는 기고만장한 행태로 옥타비아누스를 무시하며 그를 도발한다. 하지만 그것은 큰 착오로서 대다수 군사들은 카이사르의 후계자인 옥타비아누스에게로 돌아서고 레피두스는 오히려 반란 세력으로 자리 잡게 된다. 옥타비아누스는 관용을 베풀어 그의 최고사제관의 지위만을 남겨두고 트리움비르(삼두체제의 일원)로서의 지위를 박탈해버린다. 이로써 삼두체제는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 두 사람만 남게 된다.


동방으로 건너간 안토니우스는 동방의 모든 군주들로부터 파르티아 정벌을 위한 군사와 물자를 각출하기를 강요한다. 이때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도 소집하여 물적 지원을 받게 되는데, 카이사르 생전 그녀가 로마에서 생활할 때 본 적은 있었으나 여왕의 화려하고도 현란한 행차 행렬을 목격하고 여러 대화를 나누면서 클레오파트라의 대담함과 정치적 외교술에 묘한 매력을 느끼게 된다.

약 30군단의 대규모 군력을 이끌고 의기양양하게 파르티아 원정에 나서지만 안토니우스는 파르티아가 파견한 이중간첩의 간계에 빠져 보급부대가 전멸 당하고 군수 물자를 모두 강탈당한다. 군량은 물론 기본적 물자가 보급되지 않으니 대규모 군단이라 할지라도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의 군사들은 칼 한 번 제대로 잡아보지 못하고 거의 전멸이 될 정도로 기아와 추위에 몰살을 당하게 된다. 카이사르도 하지 못한 파르티아 원정의 부푼 꿈을 안고 이를 통해서 로마 본국에서 자신의 위상을 최대한 끌어올려 옥타비아누스를 누르고 명실 공히 로마의 일인자가 되겠다는 욕심에 맘이 앞선 나머지 안토니우스는 돌이킬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간신히 시리아로 도피하여 목숨을 구한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에게 구원의 손길을 요청하게 되는데, 재기불능의 상태에서 술독에 빠져 좌절의 나날을 보내던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의 도움으로 회생의 길을 걷게 된다.

클레오파트라의 구원으로 기력을 회복한 안토니우스는 아르메니아에서 조그만 승리를 거두고, 이에 따른 개선식을 로마가 아닌 알렉산드리아에게 거행하는 바보 같은 짓을 결행한다. 비록 클레오파트라의 지원에 힘입은 바 크다할지라도 개선식은 로마와 로마인의 영광으로 돌려야 함에도 이를 이집트에서 거행한다는 것은 로마인의 울분을 사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이 같은 소식을 접한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가 짐승의 여왕 클레오파트라의 주술에 빠져 안토니우스가 로마를 배신한 행위라고 격렬히 비난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원로원에 지지 세력을 확보하여 실질적인 로마의 일인자의 지위에 있었던 안토니우스는 로마의 적으로 간주되기 시작하고 원로원에 있던 그의 지지 세력들도 하나 둘 등을 돌리기 시작한다. 이는 결국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치닫게 된다.


아그리파를 중심으로 한 옥타비아누스 군단은 아드리아 해를 통과하여 그리스 북서부에 진을 치게 되고 안토니우스 또한 그리스 서부 암브라키아 만에 주둔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안토니우스의 치명적인 실수가 또 다시 반복되는데, 암브라키아 만은 그리스 북서부에 위치한 만(灣)으로서 동방으로부터 군량미와 물자를 공급받아야 하는 안토니우스로서는 매우 불리한 조건에 처하게 된다. 왜냐하면 동방으로부터 물자를 보급하는 방법은 그리스 남단의 펠로포네소스 반도를 우회하는 방법과 그리스 북동 지역에서 북서로 직선 육로로 수송하는 수단이 있었는데 전자는 많은 시간을 요하는 것이었고, 후자는 그리스 국토 중간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돌로피아 산맥을 관통해야 하는 난제가 있었다. 안토니우스는 후자의 보급로를 택하는데 평생 경험하지 못한 험난한 산맥을 무거운 짐을 이고 등반하던 노예들은 지쳐 죽기 다반사였고 도중에 많은 물자를 버리고 홀로 살아남기도 어려운 열악한 환경이었다. 행운의 여신이 그를 버렸음인가 안토니우스의 단순한 몽매함 때문인가? 보급과 병참에 또 다시 실패한 안토니우스는 전투를 개시하기도 전에 이미 패배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암브라키아 만(灣)에 있는 악티온 곶에 대치한 쌍방은 대치 상황이라기보다, 보급 물자가 없어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어떻게 살아서 후퇴할까 고민하는 입장에 처하게 된다.

실제로 악티온 해전은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 모두 군력을 총동원한 전투인데 안토니우스군에게는 말 못할 속사정은 따로 있었다.

이집트에 머무는 동안 클레오파트라는 전쟁에 드는 모든 비용을 자신이 댈 테니 옥타비아누스와의 일대 결전을 강행하기를 종용한다. 그 대신 자신은 안토니우스와 동등한 공동지휘권을 가지기를 주장한다.

그로부터 클레오파트라는 모든 작전회의에 참석하게 되고 남성 우월주의에 젖어있던 로마 지휘관들의 반발로 사기는 땅에 떨어져 싸움도 하기 전에 전세는 결정이 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에도 아랑곳 않고 그녀는 여왕으로서 로마 병사들을 자신의 신하 다루듯 대한다. 그녀에겐 당연한 일이겠으나 이런 문화적 차이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게다가 물자 보급조차 원활하지 않자 악티온에서 탈출하기 위한 전투를 시도한다. 즉 클레오파트라의 탈출로를 확보하기 위한 전투가 강행된다.

악티온 해전은 양측에서 각각 500척 이상의 함선을 동원한 총력전이었으나 결과적으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가 이집트로 줄행랑을 놓기 위한 촌극으로 끝나고 만다.

이 시점에서 클레오파트라가 왜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옥타비아누스와의 결전을 감행했던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녀는 카이사르와의 사이에 낳은 아들 카이사리온(프톨레마이오스15세)으로 하여금 이집트를 포함하는 동방은 물론 로마에서 카이사르의 후계자가 되어 세계를 아우르는 인물로 만들고자 하는 야심이 맘속 깊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를 위하여 안토니우스의 전쟁 경험과 로마 내 그의 영향력을 최대한 이용하고자 했다. 이러다보니 카이사르의 공식적 후계자인 옥타비아누스는 그녀에게 있어 눈의 가시이자 반드시 제거해야만 한다는 것이 그녀의 숙명적 과업이 된다.

카이사르의 외생질손이 되는 옥타비아누스와 달리 카이사리온은 그의 친아들답게 외모는 빼다놓은 듯이 그와 닮았고 그 총명함 또한 유전이 된 듯 했으니 이집트의 여왕으로서 나라의 안위와 성장을 위하여 그녀가 택할 수 있는 선택이었다고 추론할 수 있다.

악티온 해전에서 탈출하여 이집트로 돌아온 두 사람은 최후의 방어망을 구축하고자 한다. 그리고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의 사랑이 자신을 위한 고결하고 진정한 감정이었음을 느끼게 된다. 왕의 후손으로 태어나 여왕의 자리를 쟁취하고자 권력 투쟁으로 점철된 삶 그리고 파라오라는 現神의 지위 속에서 지내온 시간들로 가득 찬 생에서 처음으로 인간다운 사랑을 체험한 것이었다.

좌절에 빠진 안토니우스를 격려하여 옥타비아누스와의 일전을 재준비토록 함과 동시에 그녀의 희망 카이사리온을 행상 차림으로 변장시켜 동쪽 멀리 인도에서 후일을 도모하도록 떠나보낸다. 그만 살아있다면 카이사르의 친자(親子)로서 언젠가 재기가 가능하리라 판단한 것이다. 2,000년 전 혈연을 절대시 하던 당시로서는 충분히 가능한 기대였으리라.


한편 안토니우스는 자신의 유언장을 작성하여 로마 최고신관 사저에 있는 베스타 신전에 보관하도록 한다. 이 정보를 입수한 옥타비아누스는 베스타 신녀를 교묘히 속여 안토니우스의 유언장을 입수하게 되고 그 내용을 미리 열어보는데, 경악할 사실은 안토니우스가 자신의 시신을 알렉산드리아에 묻어 달라는 내용이 있었다.

그것도 자신과 같은 하늘 아래 공존할 수없는 클레오파트라가 있는 곳, 알렉산드리아가 아니던가?

옥타비아누스는 이 사실을 만천하에 공개하여 안토니우스를 로마의 적으로 공언함과 동시에 이집트 원정의 정당성을 확보하게 된다.

이집트에서는 왕이자 파라오가 생전 일정한 나이에 이르면 무덤을 미리 준비하게 되는데 클레오파트라는 피라미드 내 자신의 침실 옆에 안토니우스의 방도 함께 만들라고 지시한다.

막상 옥타비아누스의 군대가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하자 안토니우스는 갑옷을 입고 출전을 하지만 소소한 대전이 몇 차례 있은 다음 궁으로 돌아와 자신의 칼로 자결을 한다. 안토니우스의 죽음을 지켜본 클레오파트라는 그의 시신과 함께 피라미드에 들어가 농성을 한다.

클레오파트라는 죽음을 건 협상으로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들을 죽이지 않는다는 약조를 받고 그녀는 코브라의 이빨에 가슴을 내밀어 생을 마감한다.

한편 인도로 가고자 길을 떠난 카이사리온은 도중에 옥타비아누스의 군대를 만나게 되고 같은 카이사르의 후계자로서 자신이 직접 옥타비아누스와 평화를 위한 담판에 나서고자 한다. 자신은 절대 로마에 발을 들이지 않을 것이며 원하는 만큼의 공세를 낼 테니 이집트의 독립과 평화를 보장해달라는 조건을 내건다.

카이사리온을 대면하게 된 옥타비아누스는 그의 외모가 마치 카이사르가 살아 돌아온 듯 한 모습에 오히려 위협을 느낀다. 그가 로마에 나타나는 순간 그가 그토록 공들인 후계자로서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이 같은 느낌을 솔직히 말한다, 카이사르를 이토록 닮지 않았다면 죽이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이에 카이사리온은 모든 것을 단념하고 담담히 죽음을 맞는다. 어머니를 관대하게 대해 달라는 말과 함께 옥타비아누스의 막사에서 죽임을 당하고 양탄자에 싸여 생을 마감한다. 클레오파트라가 카이사르를 만나기 위해 양탄자에 싸여 왔으나 그녀의 꿈과 희망이 다시 양탄자 속으로 들어감으로써 모든 것이 끝이 난다.

카이사리온의 죽음을 감춘 채 옥타비아누스는 클레오파트라와 협상에 임하는데, 그녀는 카이사리온이 후일을 도모하리라는 기대와 함께 자식들의 안전을 보장받았다는 생각으로 생을 마친다. 39년의 호화롭고 치열했던 삶이었다(B.C.69~B.C.30).


이집트를 정벌한 옥타비우스는 귀국길에 동방 국가들의 군주들을 하나씩 대면하여 로마를 비롯한 그들 간의 갈등을 조정하고, 심지어 파르티아와 접촉하여 에우프라테스 강의 동서를 경계로 하는 평화 협정을 체결하기에 이른다.

악티온 해전, 이집트의 정복, 파르티아와의 협정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옥타비아누스는 당당히 귀국길에 오르고 원로원을 비롯한 모든 민중의 환호 속에 둘러싸인다.

삼두연합으로써 카이사르를 암살한 해방 단을 처치하고 레피두스와 안토니우스를 차례로 격파함으로써 명실 공히 로마의 일인자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옥타비아누스의 냉철함과 교활함이 안토니우스의 우직함과 조급한 공명심을 깨끗이 눌러버린 한 편의 드라마 같은 결전이었다.

이제 그에게는 카이사르의 그늘에서 벗어난 새로운 이름이 필요한 때다.

바로 아우구스투스!

높은 자들 중에서 가장 높은 자, 영예로운 자들 중에 가장 영예로운 자, 위대한 자들 중에 가장 위대한 자라는 뜻의 코그노멘으로 불리게 된다. 이가 바로 로마 초대 황제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이다.


*P/S

1. 기원 전 750년경 로물루스가 로마를 건국한 이래 250년이 흐른 뒤에 공화정으로 바뀌어 약 450년간 유지되었지만 실제는 소위 파트리키라고 하는 귀족 가문들이 돌아가면서 집정관 직을 역임하는 귀족정치 형태가 반복되고 있었다. 카이사르 시대가 되면서 지중해에 대한 패권을 움켜지게 되었고 이는 새로운 정치체제를 준비할 필요가 생겼다. 옥타비아누스에 이르러 지중해 주변을 완전히 제압함으로써 보다 효율적인 통치체제인 제정 시대로 접어든다. 옥타비아누스는 프린켑스 세나투스라는 실제로는 독재관의 지위에 오르게 되고 기원전 27년 칭호를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로 부르게 됨으로써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그 후 A.D 14년까지 44년간 로마 제국을 통치하게 된다.

2. 동 작품을 시오노 나나미가 쓴 로마인이야기와 비교하는 경우가 많은데, 먼저 동 작품은 카이사르의 출생 10년 전인 B.C 110년부터 시작하여 B.C 30년까지 약 80년간 가이우스 마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가이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에 이르는 가장 역동적이고 드라마틱한 로마 시대를 다루고 있다. 이에 반해 로마인이야기는 로마 史 전체를 포괄적으로 다루면서 카이사르에 한하여 많은 지면(총15권 중 3권)을 할애한 작품이다.

3. 클레오파트라와 같은 인물로서 동양에는 어떤 인물이 있을까 생각해본다. 경국지색(傾國之色)의 미녀들 하고는 조금 거리가 있다. 굳이 비교하자면 당나라 혹은 후주의 측천무후(則天武后)에 더 가깝다고 할까? 딱히 떠오르는 인물이 없다. 그렇기에 클레오파트라는 2천년이 지난 오늘까지 클레오파트라 그 자체로서 독보적 존재감을 내뿜고 있나보다.


------- 마스터즈 오브 로마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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