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정제(雍正帝 미야자키 이치사다 지음)

-강건성세의 연결고리

by 이병철


-강건성세의 연결고리


“강희제는 61년 재위 기간 동안 35명의 황자와 20명의 공주를 배출하였다.

그 중에서 2째 황자인 윤잉의 인간사가 특이한데, 윤잉의 산모는 강희제의 황후 혁사리씨의 소생이다. 혁사리씨는 총명한 기지로 내궁을 잘 다스리고 위기 상황에서 적절한 조언을 하는 등 강희제의 총애를 받았으나 난산 끝에 숨을 거둔다. 이를 슬퍼한 강희제는 유능한 아들을 후계자로 선정하는 만주족의 전통을 깨고 둘째인 윤잉을 태생 시점부터 황태자로 책봉하였다. 윤잉을 금지옥엽처럼 특별대우를 하며 다른 황자들과 차별을 두어 교육도 철저히 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강희제가 장수를 하게 됨에 따라 윤잉은 황태자 생활만 30년 이상을 하게 되고 강희제의 지나친 기대와 숨 막힐 정도의 엄격한 교육 등으로 인해 엇나가는 길을 걷게 된다. 주색잡기에 빠진 윤잉은 급기야 강희제의 비빈인 정춘화와 눈이 맞아 정을 통하기도 하는데 이에 따라 윤잉은 두 번이나 황태자에서 폐위되는 시련을 겪게 된다. 지나친 부정(父情)의 비극인 것이다.

윤잉과 사랑에 빠진 정춘화의 경우는 당나라 때 태종의 후궁이었다가 아들 고종과 결혼하게 되는 측천무후가 연상되고, 아들의 며느리인 양옥환(양귀비)을 후궁으로 앉힌 당 현종이 연상되는 장면이다.


아무튼 윤잉이 폐위되자 약 14명의 황자들이 황제 자리를 놓고 패권을 다투는 형세를 보이게 되는데, 강희제는 황태자 책봉이 불러오는 파당 정치를 방지하고자 임종 시점까지 황태자를 정하지 않고 상호 경쟁 체제로 돌입하게끔 한다.

각 황자들은 조정의 주요 기관에서 실무를 맡아 강희제를 보좌하지만 물밑에서는 서로 이합집산을 하여 황제 자리를 위한 치열한 암투를 벌인다.


황자들 간의 황위 쟁탈전에 있어 임백안이라는 특이한 인물이 등장한다.

임백안은 강희 15년 과거에 합격하여 이부에서 20년간 고공사 서류를 작성하는 일을 맡았던 인물이다.

그는 형부에서 보관하고 있는 기밀 서류인 백관행술(百官行述)을 빼돌리게 된다. 백관행술이란 조정 백관의 크고 작은 잘못과 비리를 정리한 비밀 장부인데, 탐관오리들을 압수 수색하면서 나오는 비리와 그들의 뒤를 봐준 고위 인사들의 연루 사실 등도 함께 기록되어 이는 기밀 장부이다. 현재 시각으로 보면 개인 사찰의 일종이기도 하고 국정원의 소위 “파일”이라는 것 혹은 검찰의 소위 “캐비넷”이라고 하는 고위 관료에 대한 사찰 기록물 성격으로 보여 진다.

당시 굵직한 비위 사건들은 거의 다 황자들과 직간접적으로 연계되어 있는 상황이었는데 이 같은 비밀 장부를 임백안은 여덟째 황자인 윤사에게 제공하고 그와 결탁하여 많은 이권 사업을 통한 돈벌이는 물론 모든 관청을 떵떵거리면 활보하게 된다.

심지어 임백안은 다른 황자들에게 검은 돈을 대여해 주기도 하고 채홍사 역할은 물론 미약(媚藥)과 점술사 등을 연결시켜 주기도 한다.


8째 황자 윤사는 비밀 장부를 근거로 말단부터 고위직 관료들까지 그의 족쇄에 얽어 넣으며 심지어 경제적 지원 등을 함께 함으로써 자신의 지지 세력으로 확보하기 시작한다.

이는 강희제가 윤잉의 황태자 폐위 이후 ‘고관 대신들의 중지를 모아 후계자를 책봉하겠다’고 공언한 바 있었는데, 이를 염두에 두고 윤사는 물밑 작업을 진행한 것이었다.

그리고 윤사는 임백안의 명의로 전당포를 자신의 궁궐 근처에 두고 운영하면서 장부의 보관은 물론 비밀 아지트로 활용하고 있었다.


이 같은 사실을 파악한 4째 황자 윤진과 13째 황자 윤상은 전당포를 급습하여 장부를 확보하고 임백안을 처형하게 된다.

4째 황자 윤진은 매사에 진중하고 사려 깊은 성격으로 한 번 뱉은 말은 꼭 실행하는 냉철한 이미지가 강했다. 강희제는 내심 윤진을 맘에 두고 있었으나 항상 윤진의 부족한 인간미를 질책하기도 했다.

이처럼 황자들의 업무 수행 능력과 화이한만(華夷漢蠻: 중국과 주변 이민족 전체를 아울러 지칭하는 말로, 중국 중심의 전통적 세계관을 반영한 용어)이 아니라 화이부동(和而不同: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조화를 이루는 태도)의 자세로써 통합된 청나라의 미래를 끌고 갈 후계자를 평가한 강희제는 고관대신들의 빗발치는 청원(8째 황자 윤사를 천거)에도 불구하고 4째 황자인 윤진에게 황위를 넘기게 되는데 그가 바로 옹정제가 된다.“



상기는 약 3년 전 얼웨허 작가가 쓴 강희대제를 읽고 쓴 글의 일부분을 발췌한 것이다. 옹정제를 논할 때 항시 거론되는 것이 바로 제위에 오르게 된 과정이기 때문이다.

공주는 차치하고라도 황자만 해도 35명에 이르게 되고 이 중에서 장성한 황자들은 각자가 자신만의 세력을 구축해서 정치적 경제적 위력을 과시하게 되니 이는 파당정치의 온상이 되어왔다.

황위에 오른 옹정제는 자신의 독특한 통치체제를 구축하는데 소위 주접(奏摺)이라 일컫는 지휘 방식이다. 주접이란 아뢸 주, 접을 접자를 써서 아래에서 문서를 접어 아뢴다는 뜻이다.

지방의 총독이나 순무 등 고위 관료들이 황제에게 직접 자신의 의견이나 지방의 실정, 은밀한 정보 등을 적어 보고하는 체계를 뜻하는 것으로서, 내각을 통한 공식 문서와 별도로 황제는 자신만의 정보보고 체계를 마련하여 인의 장막에 가려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을 방지하고 확실한 전제군주제를 확립하고자 했다.

이는 강희제의 통치 말기에 만연한 관료들의 부패를 척결하는 것이 급선무였기 때문이었으며, 옹정제는 주접이라는 비공식 보고서를 통해 주고받은 내용을 묶어 책으로 펴내는데 이름하여 『옹정주비유지(雍正硃批諭旨)』라고 한다. 신하들이 보낸 주접에 직접 붉은 먹(주필, 硃筆)으로 답장(주비, 硃批)을 달아 보냈다는 뜻으로, 이 방대한 기록을 후대에 참고하기 위해 스스로 정리한 것이다.


강희제의 제위 기간이 61년에 이르고 웅정제는 궁중에서 45년의 세월을 보낸 후에야 보위에 올랐다. 그렇기에 그는 궁중에서 일어나는 온갖 권모술수와 암투, 비리를 목격하며 성장하였고 거친 풍파와 시련을 딛고 황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이런 배경 하에서 관료제의 성공적인 운영이 청 제국의 미래를 좌우하리라는 것을 그는 직감하게 된다.

광대한 대륙에 퍼져있는 관료들을 훌륭하게 통치해야 한다는 사명과 함께 만주족의 미래에 대한 소명의식 또한 그의 심중에 깊이 자리 잡고 있었다.

만주족은 수적으로도 한족의 10분의 1에 지나지 않고 문화적으로는 더더욱 비교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익히 알고 있기에 만주족이 한족을 지배하는 현실은 하늘의 천명(天命)에 의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즉 천명에 따라 만주족뿐만 아니라 한족을 아우르는 통치만이 천명에 응답하는 것임을 깊이 깨닫게 된다.

이 같은 사상 하에 옹정제는 상기 언급한 주접을 통하여 정치와 행정에 만전을 기하는 매우 치밀한 통치를 진행하게 되고, 자신이 모든 관료의 본보기가 된다는 사명으로 만기친람의 무리수를 두게 되는데 이는 바로 독재의 수순으로 이어진다.


절대적 황권을 구축하게 된 옹정제는 언제든 자신의 지위를 위협하는 대상으로 같은 항렬의 황자들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그렇기에 비록 형제지간이지만 조금의 허점을 보이거나 황제에 대한 존경의 의사를 게을리 하는 형제들에 대하여 가차 없는 처분을 내림으로써 황실의 기강을 바로 세운다.

또한 관료 사회에 당시 만연했던 부패와 붕당정치의 폐해를 바로잡고자 한다. 청나라 초기 입신양명의 유일한 수단은 바로 과거 시험을 통하여 관직에 오르는 것이 유일한 통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과거 시험에서 수험자와 심사관에 있어서 자신을 천거하는 심사관을 인생의 스승으로 모시는 관습이 횡행하고 있었다. 자신을 가르친 자가 스승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시험을 채점하여 발탁해준 인물이 바로 스승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선발된 자들은 심사관의 수하에 들게 되고 이는 평생 동안 충성을 서약하게 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이로 인하여 붕당정치가 형성되는 것인데, 이는 관료들 간에 파벌을 조성하게 되어 국정 운영에 큰 차질을 빚게 되는 것이다. 우수한 인재들이 붕당정치에 함몰되고 파벌 간의 알력은 조직 이기주의에 젖어 들게 한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의 부정과 부패를 눈감아 주며 자신들의 잇속만을 챙기는 전형적인 부패 관료주의의 모습에서 옹정제는 칼을 빼들어 이를 타파하고자 한다.

이론적으로 독재체제하의 관리는 사적인 연계가 있어서는 안 된다. 천자는 부채의 축과 같이 모든 것을 한 점으로 집약시키는 존재여야 한다.

옹정 2년에 그는 어제붕당론(御製朋黨論)을 반포하기에 이르고 그 내용의 핵심은 아래와 같다.

“진실로 올바른 자는 당파 따위를 만들지 않는다. 사악한 소인들이 자신의 결점을 감추고 다수의 힘으로 천하의 공평한 비판을 왜곡하려고 하는 데서 당파가 생긴다. 이는 달리 말하면 군주의 대권을 침범하는 것과 다름없다.”

이를 위하여 옹정제는 만주에서부터 양성되어 중국으로 들어온 팔기군(八旗軍)에서 기민한 젊은이들을 선발하여 황제의 기밀 임무를 수행하도록 하였다.

송, 원, 명대에 이르러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해이해진 관리들의 기풍과 문란함 등 부패 풍조를 일신하고자 그는 평생 혼신의 노력을 경주하였음을 알 수 있다.


옹정제가 또 다른 개혁을 하고자 심혈을 기우린 부분은 바로 조세 제도였다.

이를 이해하기 위한 핵심어는 모선귀공(耗羨歸公)과 양렴은(養廉銀) 제도이다.

모선이라고 하는 것은 은을 세금으로 받아 운반의 편의를 위해 더 큰 덩어리로 녹여 만드는 과정에서 손실이 생기는 부분을 보전한다는 구실로 관료들이 자의적으로 20~50%에 이르는 세금을 추가로 거두는 것을 의미하는데, 문제는 부가적으로 거둔 세금을 자신이 착복하는 부정행위가 관례화 되었다는 것이고, 귀공(歸公)은 공적인 영역으로 돌린다는 뜻으로서 지방 관료들이 부가적으로 갈취하던 세금을 중앙정부에서 먼저 적정하게 정하도록 하고, 사복(私腹)이 아닌 공적인 영역으로 귀속시키는 조치를 의미하는데 이는 국가 재정을 튼실하게 하고 또한 민초들의 부담을 줄여주는 효과를 유발하게 된다.

이렇게 함으로써 중앙정부의 재정을 보다 든든하게 만들고 여기에서 생긴 재정적 여유분을 관료들에게로 돌려 더 후한 보수를 지급하도록 하는 것인데, 이를 양렴은이라 칭하였다. 양렴은(養廉銀)의 뜻은 청렴함을 기르는 은자를 의미한다.

배고픈 관료는 바로 부정으로 이어지기 마련이기에 이를 방지하고자 관료들에 대한 보수를 올려주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정행위가 적발될 시에는 냉면황제(冷面皇帝)라는 별명답게 가차 없이 처단하였다.


이렇게 옹정제는 천명이라는 자기 확신 하에 주접과 밀정 정치, 붕당정치의 혁파, 세제 개혁 등으로 관료제를 안정적으로 이끌고 도탄에 빠진 민초들의 시름을 덜어주고자 헌신한다. 그가 독재 정치를 일삼았다는 평판으로 말미암아 그의 업적이 과소평가되어 역사의 그늘 속에 가려져왔던 인물이었지만 최근 그의 행적은 새롭게 부각되어 연구 대상으로 주목받고 있다고 한다.

옹정제 13년간의 제위 기간 동안 축적된 민간의 경제력과 풍부한 물자 등은 바로 건륭시대의 영토 확장과 웅장한 문화 사업으로 이어지게 되고, 옹정제는 강건성세(康健盛世)의 연결고리로서 그의 천명의식에 자신을 봉헌한 인물로 평가되어야 한다.


심지어 청조 학자 중에서 냉소적인 것으로 유명한 장쉐청 조차도 그를 이렇게 평가한다.

“옹정시대 인물의 전기를 읽으면 청렴결백하다고 강조하는 내용이 자주 등장하는데 사실 이것은 그리 내세울 만큼 대단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옹정제는 관리의 기풍을 단속하고 수뢰의 폐단을 근절하였으며 정계를 숙청하고 탐관오리를 벌주었다. 실로 천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한 전기(轉機)였다. 이 시대에는 상관은 법을 지키고 하급관리는 청렴함에 힘쓰는 것이 일반적인 풍습이 되었다. 그러므로 그 전에 탐욕스럽던 자라도 당시의 풍습에 동화되어 완전히 마음을 바꾸게 되었던 것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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