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 륭(乾隆 장훙제 지음)

- 63년 4개월의 절대 권력

by 이병철


- 63년 4개월의 절대 권력


강건성세(康健盛世).

17세기에서 18세기 말까지 120년 간 청나라를 지상 최고의 막강한 나라로 자리매김했던 시절을 일컬음이다.

강희제, 옹정제에 이은 마지막 주자는 건륭제이다.

건륭제는 자그마치 63년 간 황위에 있었던 바, 그의 시대를 요약하기란 단순한 작업이 아니지만, 청나라를 뿌리로 두고 그의 연장선에 있는 현재의 중국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건륭제에 대한 다양한 조망과 역사적 교훈을 찾아보는 것이 의미 있다 생각한다.

먼저, 강건시대의 연대기를 보면

강희제의 제위 기간이 1661~1722(61년)이고,

옹정제가 1722~1735(13년),

건륭제가 1735~1796(63년)이다.


이 시기에 과연 조선시대에는 누가 왕위에 있었는지 비교해보는 것이 흥미롭다.

숙종이 1674~1720(46년)이고,

경종 1720~1724(4년),

영조 1724~1776(52년),

정조 1776~1800(24년)이다.

즉 조선 숙종에서 정조까지의 시기가 청나라 강건시대와 일치한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당시 청나라의 정세와 조선의 사회 변화가 어떻게 연동되었는지 상상을 하는 것도 의미 있을 것 같다.

이와 더불어 동 시대 세계정세의 시대조류 또한 고려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1760년대는 서구 세계의 지각변동이랄 수 있는 산업혁명이 일어나서 생산력 증대에 막대한 기여를 하였고, 사상적으로는 루소의 사회계약론에 따라 인본주의적 사상이 움트고 있었다. 급기야 1776년 미국 독립전쟁이 있었고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발발하기에 이른다.

다시 건륭제로 돌아와서 그의 이름은 홍력(弘歷)이다.

어릴 때부터 매우 총명하여 할아버지인 강희제의 눈에 들었고 강희제가 직접 궁으로 데려와 차기 황제로서의 자질을 계발하고자 엄한 교육을 시킨 준비된 황제라고 할 수 있다.

심지어 강희제가 후계자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옹정제를 택한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손자인 홍력의 영특함에 기인한다고 하는 일설도 있다. 즉 강희제는 자신의 다음 세대뿐만 아니라 차차기까지 고려한 천고대제의 긴 안목이라 할 수 있다.

조부인 강희제가 기반을 닦고 아버지인 옹정제가 내실을 다진 청나라를 홍력이 이어받았을 때 나이가 25세였다. 아버지 옹정제는 강희제가 장수를 하는 바람에 45세가 되어서야 황위에 올랐지만 건륭제는 아주 적당한 나이에 아주 탄탄한 기반에 다져진 상태에서 나라를 통치할 수 있었던 것이다.


건륭제의 치적이랄까? 왜 사람들이 강건성세라고 부르게 되는지 그 이유로 다음과 같은 4가지를 예로 들 수 있다.

1. 인구의 폭발적인 증가

청나라 이전 중국의 역대 왕조에서 기록한 바에 따르면 인구수가 7,000만 명을 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건륭제 초기인 건륭 6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에서 1억4000만 명에 달했다. 건륭 60년에 실시한 조사에서는 3억 명에 가까운 숫자를 기록한다. 건륭제가 다스린 50여 년 동안 인구수가 몇 배나 늘어난 것인데 이는 대단한 성과라 할 수 있다.

인구수의 증가는 식량 부족이라는 불균형적인 문제를 파생하게 되지만 국력 신장을 위한 전제 조건은 인구수의 증가에 있기에 이는 견륭제의 치적으로 간주해야 한다.

2. 경제 규모가 세계 제일을 차지했다.

현대 사회의 GDP 규모로 보면 당시 건륭제 시기는 전 세계의 3분의 1을 차지한 것으로 평가된다. 오늘날 미국이 세계 경제에서 차지하는 위상보다 더 높은 것으로서 당시 영국의 여덟 배, 러시아의 여섯 배였다. 이는 독일 경제학자 안드레 군데가 [리오리엔트]에서 저술한 내용이다(동 책자는 강희대제 서평을 쓸 때 개인적으로 인용한 것이기도 하다).


3. 청나라 영토를 최대로 확장했다.

건륭 24년 중가르(몽골 오이라트 부족집단과 그 국가)를 평정한 뒤 청나라 영토는 1450만 제곱킬로미터에 달했다. 현재 중국의 면적이 960만 제곱킬로미터인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크기이다. 중국의 역대 왕조와 황제들이 변방을 회유하거나 느슨한 제도로 다스린 것과 달리 건륭은 변방을 정치적 관할구역에 포함시키고 군사적으로 엄격하게 다스렸다. 이는 다른 역대 황제들이 미치지 못하는 부분이다.


4.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문화적 기록을 남겼다.

건륭제 때 만들어진 사고전서(四庫全書)는 중국 역사상 글자 수가 가장 많은 책이다. 약 8만 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글자는 9억 9600만 자에 달한다. 10년 동안 진행된 중국의 가장 방대한 규모의 총서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경제와 정치뿐만 아니라 군사와 문화 방면에서도 견륭은 역사의 정점을 찍었다. 여기에서 사고전서에 관하여 조금 더 언급할 필요가 있다.

사고전서란 모든 책을 네 개의 곳간에 담는다는 뜻으로서, 2500년이 넘는 장구한 중국의 역사와 문화 등 모든 지식을 모아 보관하여 후대에 전하고자 함이었다. 사고(四庫)는 經, 史, 子, 集으로 구분하여 분야별로 편집을 하였다.

경부(經部) 유교 경전과 그 주석서 (역경, 서경, 시경 등)

사부(史部) 역사서, 지리지, 정서(관직제도) 등

자부(子部) 제자백가, 철학, 과학, 종교, 예술 등

집부(集部) 시문집, 문학 작품 등

사고전서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함께 갖고 있는데, 긍정적으로 평가한다면 동 작업을 통하여 학술적 집대성을 이루었으며 당대 최고의 학자들이 참여하며 문헌의 진위와 내용을 검토하는 고증학이 크게 발전했다. 반면에, 편찬 과정에서 만주족(청나라)에 비판적이거나 반청 사상이 담긴 서적들은 금서로 지정되어 소각되었고(약 2,400여 종의 책이 파괴되거나 수정됨), 한족 지식인들을 대규모 편찬 작업에 동원함으로서 그들의 정치적 관심을 학문적 작업으로 돌리는 회유책으로 사용하였다는 비판도 있다.

*조선시대 정조는 동 전서의 방대한 지식을 얻고자 백방으로 노력하였으나 일부분만을 구하는데 만족해야 했고 이를 규장각에 보관하여 후대에 전하고자 했다.


63년에 이르는 건륭제의 통치 기간을 우린 전기, 중기, 후기로 나누어 볼 필요가 있다. 같은 사람이지만 철마다 나무가 옷을 갈아 입 듯, 세월의 흐름 속에 건륭제의 변모된 모습이 바로 역사가 되기 때문이다.

건륭 13년까지를 초기로 구분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그가 그토록 사랑하던 효현황후가 병사를 하게 된 것이 계기가 된다. 홍력이 25세에 즉위했으니 나이 38세에 상처(喪妻)를 하게 된 인간적 비애가 그의 정치 행로에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10여 년간 인자하고 관대한 황제가 이를 계기로 냉정하고 엄한 통치자로 변모하게 되는 것이다. 즉 통치 철학이 유가(儒家)에서 법가(法家)로 변화하기 시작한다.

인(仁)의 정치에서 행정적 잣대를 중시하는 법(法)의 통치로써 지배하기 위해서는 엄격함이 필요하고 냉정한 징벌적 수단이 병행될 수밖에 없다. 부패한 관리들을 엄단하고 황실과 그 측근의 비위에 대하여 옹정제가 했던 것보다 더 엄격한 처단을 내렸다.


건륭제의 중기에 해당하는 건륭 24년(1759)에서 건륭 45년(1780)까지 21년을 강건성세의 절정기이자 중국 사회가 가장 번성한 시기라고 역사학자들은 입을 모은다.

붕당세력을 타파하고 젊은 인재를 등용하였으며, 빈민 구휼에 적극적이었고 군사적으로도 강건하게 국경을 지켰을 뿐만 아니라 주변국들을 청나라의 속국으로 삼았다. 당시 청나라에 조공을 바친 나라는 얼마나 있었을까?

동쪽에는 조선과 유구국(오키나와), 서쪽에는 안남(베트남), 시암(태국), 란창(라오스), 캄보디아, 미얀마, 루손(필리핀 북부), 브루나이 등이 있고, 서북쪽에는 안디잔(우즈베키스탄 안디잔 주), 타슈켄트, 바다흐산(아프가니스탄 동북부) 등이 있었다.


건륭제 시대의 후기로 접어들면서 강건시대는 전성기를 지나 쇠퇴기에 접어드는데, 그 중심에는 폭발적인 인구증가에 따른 사회적 압박 그리고 국제 사회의 변화가 있다.

흔히들 건륭제의 후기를 방임과 방탕으로 표현하는데 이는 건륭이 나이 70에 접어들면서 총기가 사라지고 사사로운 개인적 취향을 우선시함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인구 증가에 따른 식량 문제가 사회 문제로 대두되는데, 고구마와 감자 등으로 식량을 대체하고자 노력하지만 이를 완전히 해결할 수 없었고 더불어 느슨해진 관료들의 정신은 부패로 이어져 민중의 고충은 날로 커져만 갔다.

그리고 노쇠한 건륭 앞에 화신이라는 희대의 간신이 등장함으로써 청나라의 운명은 천리 길 낭떠러지와 직면하게 된다.

화신(和珅, 1750–1799)은 건륭제의 눈에 들어 승승장구한 인물로서 4개 국어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는 우수한 두뇌의 소유자이자 정치적 감각과 재무적 관리 능력으로 실질적으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권세를 누렸다. 심지어 그는 건륭제에게 의죄은(議罪銀)의 제도를 창의적으로 개발했다. 의죄은이란 관료들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그에 상응하는 벌금을 내면 죄를 면해주거나 감형해 주는 제도인데 화신은 이를 교묘히 이용하여 건륭제의 사금고를 채워주기 시작했다. 관리들은 의죄은을 명분으로 자신의 부정 행위에 대한 면죄부를 받고자 했고 이를 이용하여 화신은 뇌물을 받아 챙겼다. 화신이 이렇게 자신의 지위와 건륭의 총애를 이용하여 부정 축재한 금액은 자그마치 청나라 예산의 10년 치에 달한다고 하니 당시로는 세계 최고의 부호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화신에게는 전통적으로 사대부들이 지녀온 국가에 대한 일말의 충성이나 헌신은 전혀 없었고 요순시대를 그리는 이상적 포부도 없었다. 그는 화신(化珅)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화신(貨神)이었다.


화신으로 인하여 온 나라가 부패에 젖어들고 민생이 도탄에 빠지게 되자 헐벗은 민중들을 규합하여 백련교도의 난이 일어난다. 백련교(白蓮敎)란 미륵불(내세의 부처)이 나타나 고통스러운 현세를 구원하고 새로운 세상을 건설할 것이라는 '미륵 하생 신앙'을 믿는 집단이 일으킨 사건으로 자그마치 9년간이나 지속되어 건륭제 사후 가경제에 이르러 진압이 된다.

건륭제의 말기에 그가 저지른(?) 혹은 착각한 최대의 실수는 바로 국제 정세의 흐름이다.

서두에 언급한 것처럼 세상은 변하고 있고 영국을 비롯한 열강들은 우수한 전쟁 무기와 동력을 바탕으로 세계로 진출하고 있는데 건륭은 청나라의 풍족함에 자아도취 하여 그들의 문화와 문명을 사그리 무시하는 태도로 일관한다. 건륭에게는 강희제와 같은 식견이 없었거나 국정에 너무 지치고 시달려 관심이 없었거나 어찌됐던 서구 문물에 대한 관심이 부족했고 이들이 청나라에 어떠한 위협이 되는지 생각조차 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1793년 매카트니가 이끄는 영국의 외교사절단은 최대한 공손하게 그리고 많은 선물을 바치며 문호 개방을 요구하였으나 일언지하에 거절하였고 오히려 그들에게 청나라를 염탐하는 기회를 제공하게 되었다. 매카트니 사절단은 청나라의 곳곳을 돌며 내란으로 어수선한 내정과 부패한 관료, 예전 같지 않은 군사력과 군기를 목격하였다.


"우리 천조(天朝)는 땅이 넓고 물산이 풍부하여(地大物博), 없는 것이 없으니 굳이 먼 곳의 물건을 들여올 필요가 없다." 이 한 마디가 어찌 보면 아편전쟁의 씨앗이 되었을까?

이렇게 건륭제는 청나라에 암울한 그림자를 남기고 역사 속 인물로 사라진다.




*P/S


1. 건륭제의 시대는 조선 영조와 겹치는데, 이 둘의 공통점은 출생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영조는 무수리 출신의 숙빈 최씨의 아들로 태어나 중전인 장희빈(희빈 장씨라고 함이 옳다)의 아들 경종의 이복동생으로서 경종의 뒤를 이어 노론의 위세를 등에 업고 왕위에 올랐다.

즉위 초기부터 출신에 따른 콤플렉스와 경종독살설에 휘말려 52년 재위 기간 동안 내내 정신질환에 가까운 행동으로 급기야 사도세자의 비극에 이르게 된다.

반면에 건륭제의 생모는 영조와 비슷하게 궁녀(무수리)출신의 유호록이라는 만주족 여인이었다. 강희제는 홍력(건륭제)의 생모를 보고 귀한 상(相)이라는 평을 내렸고 건륭의 타고난 신체적 강건함과 무예는 모계로부터 물려받은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두 사람 다 장수를 누린 것은 모계로부터 받은 건강에 기인하는 것이리라.

오랑캐라 무시당하던 만주족이 중국의 중원 대륙을 차지하게 됨에 따라 신분적 차별성이 상대적으로 약한 면이 있었겠지만, 조선은 변질된 유교 사상이 고착화되어 더욱 완고한 이념으로 자리 잡은 측면도 있는 듯하다.

건륭의 시대는 영조, 정조대에 해당하는데 청이든 조선이든 격변하는 시대적 조류에 미온적으로 대처함으로써 지구 패권은 서서히 서구 세계에 그 자리를 내어주게 된다.


2. 청나라에 조공을 바친 국가들 중에 유구국이라고 있다. 이는 오키나와에 있던 류큐왕국을 지칭하는 것이다. 류큐국은 도쿠가와 이에야스 시절 복속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청나라에 조공을 바치는 것이 의아했다. 일본은 류큐국을 복속시키되 독립국가로서 청나라에 조공을 바치며 관계할 것을 허용하였다고 한다. 이는 청나라 대륙의 사정을 염탐하고 그를 통한 과학기술 도입 등을 꾀하고자 함이었다. 일본인의 특성을 볼 수 있는 한 대목이다.

류큐 왕국은 메이지 유신 시절 일본에 완전 병합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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