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트라씬

by 청유



요즘도 메모장에 들어오는 일은 잦다. 역할극을 하고 있으니까 맡은 바 배역에 충실해야 한다. 캐릭터 분석은 응당 해야만 하는 일. 스무 번째쯤 엑스트라로 출연하고 있다. 가끔 조연이 빠진 자리에는 몸만 대역을 쓴다. 종종 샤워기에서 물비린내만 날 때가 있다. 돼지의 몸으로 인간의 지능을 가지고 있는 것만큼 끔찍한 게 없는 법이다. 그래서 내일부터는 아무 생각 안 하기로 했다.


굽혔던 다리를 펴자, 무릎이 조금 아려왔다. 며칠 전 간호사는 내 오른팔에서 피를 뽑아갔는데 왼쪽 팔이 퍼렇다. 검사 결과가 오늘 오후쯤 왔고 조만간 다시 가봐야 한다. 백신을 맞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멍이 든 자리를 5분 정도 손가락으로 지그시 눌러봤다. 일주일 정도를 생각했는데 금세 떼버렸으니 성격이 급한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건물 외벽을 힐긋 살피면 크랙이 나있다. 벽에는 물자국이나 곰팡이가 희끄무레하게 보였다. 눈을 희미하게 떴다가 이내 안경을 벗고 걸었다. 안경다리가 주머니에 걸릴 때마다 허벅지를 찔렀다. 20일께 첫 장마 시작이라는 뉴스를 봤다. 올여름을 잘 넘길 수 있을지 모르겠다. 옆집은 우산을 밖에 두던데 나는 물이 뚝뚝 흐르는 우양산을 쥐고 도어락을 눌렀다. 처음에는 번호를 하나 덜 눌러서 실패했고 두 번째에는 문이 제대로 열렸다. 우산을 펴놓자 방이 반쯤 가려졌다. 밥을 먹고 산책을 갔다가 집에 돌아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나조차도 당연하게 생각할 정도로. 밀대로 방을 닦고 쓰레기를 치우다 보면 검정비닐봉지가 여러 번 가득 차 꽁꽁 묶인 채로 분리수거장에 버려졌다. “청소용역업체가 고민되신다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바닥에 떨어진 전단지였다. 뻔하고 낯설지 않았다. 이래서 무대 뒤편도 깔끔해야 한다고 했던가. 거짓말은 싫다고 했던 사람이 능청스럽게도 대사를 곧잘 지어냈다. 실수라고 하기엔 반복이었고 본심이라기엔 기획력이 지나쳤다.


처음부터 알 수밖에 없는 사실이었다. 특별할 거라는 착각이 모든 모순의 원인이자 결과임이 틀림없으리란 확신에 가득 찬 생각을 했다. 늘 반대를 만들고 반대는 곧 진심을 닮는다. 안티테제는 진테제가 될 수 있을까. 다시 못 돌아가는 일은 없다. 다만 인간인지라 외롭다. 끊임없이 코를 풀며 휴지를 차곡차곡 쌓아갔다.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축복이었다. 배우는 건 다들 좋아하는데 익히는 걸 안 하는 게 문제였다. 연기 수업을 여럿에게 배우는 것 같지만 효과는 없었다. 고통스러운 거다. 연습이라는 건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고 해서 완전히 내 것이 되어야 응용을 할 수 있으니까. 곱씹은 과정이 있으면 마음에 남는데 그렇지 않으면 머리에만 남아서, 생각이 나면 써먹기는 하는데 그게 잔머리다. 내 것이 안된 상태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되게 얕다. 상대역도 없는 엑스트라였다. 커튼콜은 없었고 끝내 퇴장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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