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들라이트: 히사이시 조 최고의 작품을 정동1928에서>를 다녀온 뒤
일반적으로 가사가 담긴, 보컬이 직접 가창하여 가사와 음색을 관객에게 전하는 음악이 있는 한 편, 영화나 클래식 등 가사 없이 오로지 선율만으로 감정을 전달하는 음악이 있다는 점은 언제나 흥미롭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보컬이 있는 음악도 좋아하지만, 어려서부터 영화라는 문화를 좋아했던 제게 가사가 없는 음악, 특히 영화음악(Original Motion Picture Soundtrack)은 세월이 지나 여전히 제가 즐겨 듣는 음악의 한 종류입니다.
영화 <타이타닉>, <쥬라기 공원>, <빽 투더 퓨처> <해리 포터 시리즈> 등 반주만 들어도 그 영화의 명장면이 떠오르는 멋진 스코어들을 어린 시절부터 익숙히 접해 들었기에 영화음악은 제게 편안한 힐링을 건네는 친구와 같은 존재로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웅장한 감동을 주는 스코어에 빠졌다면, 요즈음 저는 미니멀한 피아노 종류의 스코어 음악을 좀 더 선호한다는 점에서 취향이 바뀌어가는 점도 신기한 것 같습니다.
이러한 가사가 없는 음악들은 가사가 없기에 오히려 그 선율에서 풍기는 감정을 듣는 이에게 오롯이 전해준다는 점에 늘 매료되는 것 같습니다. 곡의 제목만으로 그 곡의 분위기를 유추하는 재미도 있는 것 같습니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 <이웃집 토토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천공의 성 라퓨타> 등 스튜디오 지브리의 대표 감독인 ‘미야자키 하야오’의 모든 작품 속 음악을 빚어낸 히사이시 조는 살아있는 음악계의 전설이라는 말이 아깝지 않을 만큼 여전히 현역에서 활발히 활동 중인 뮤지션입니다. 올해에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신작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보다 이전 작품들에 비해 절제되고, 미니멀한 음악으로 여전히 그의 음악적 능력이 건재함을 선명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히사이시 조의 아름다운 작품들은 흥미롭게도 이번 캔들라이트에서 ‘리수스 콰르텟’이라는 현악 사중주단의 연주로 만나볼 수 있었습니다. 바이올린과 비올라, 첼로에서 뿜어져 나오는 선율은 언제나 현악기만이 낼 수 있는 고유의 우아함을 지녔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히사이시 조의 음악을 현악기만으로 해석하여 들을 수 있다는 기회에서 이번 연주회에 큰 기대가 되었습니다.
연주회가 예정되어 있던 11월 20일의 서울 날씨는 무척이나 추웠던 기억이 납니다. 덕수궁길을 지나면 보이는 정동1928센터에 도착했을 때, 지난 사카모토 류이치의 모임에 이어 아름답게 높여진 캔들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저녁 8시 공연이었는데, 약간 아슬하게 7시 50분 즈음 공연장에 도착할 수 있었고, 거의 빈자리 없이 모든 자리가 만석이었기에 저 말고도 이러한 문화생활을 즐기러 온 분들이 많다는 걸 알 수 있었고, 이에 새삼 모를 반가움(?)이 느껴졌던 기억이 납니다.
연주가 시작되길 기다리면서 그날은 무척 추운 날이었고, 저녁도 약간 급하게 먹고 도착한 공연장이었기에 피로함에 의해 연주 중간에 졸거나 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리수스 콰르텟‘이 입장하며 자신들을 소개하고, 그들의 연주가 시작되자 피곤함은 멀리 간 채로 귀를 기울이며 집중하고 있는 제 자신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와 <천공의 성 라퓨타>의 웅장하고도 아름다운 감정을 시작으로, <이웃집 토토로>와 <마녀 배달부 키키>에서 편안하고도 즐거운 마음을 누리며, <가구야 공주 이야기>와 <모노노케 히메>의 보다 섬세하고 서정적인 감정을 이끌어내는 곡들로 1시간 반이라는 시간이 금세 지나갔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곡의 마지막은 <하울의 움직이는 성>으로 유명한 ’인생의 회전목마‘를 현악 사중주로 편곡한 버전을 들으며 피날레를 멋지게 즐길 수 있었습니다. 중간에 감초 같았던 <기쿠지로의 여름> 속 ’Summer’와 <벼랑 위의 포뇨> 역시 아이들이 지닌 천진난만함을 한가득 느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번에 연주된 곡들은 삽입된 원작 애니메이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사가 없다는 점에서 굳이 애니메이션 속 장면을 떠올리지 않고, 그 자체로 음악을 즐길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곡이 지닌 선율을 오롯이 스스로 해석하고, 스스로 품은 감정으로 이해할 수 있었던 시간이기에 음악을 자주 듣는 제게도 최근에는 겪기 어려웠던 드물고 아름다운 시간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1시간 20분 가까이 이어졌던 이번 연주회에서 객석을 가득 채운 관객들이 말없이 오로지 음악이라는 문화를 통해 각자만이 느꼈을 감정들을 다시금 떠올릴 수 있는 시간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더불어 예술이 우리의 삶을 보다 아름답게 바라볼 수 있도록 하는 마법 같은 순간을 다시 만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