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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운 Oct 14. 2024

상처 입은 나의 비둘기를 찾아서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제2회 소설가가 된 무렵 리뷰


ㆍ아무리 먹고사는 게 힘들어도, 책을 읽는 일은 음악을 듣는 것과 함께 나에게는 언제나 변함없는 큰 기쁨이었습니다. 그 기쁨만은 어느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았습니다. p.43

ㆍ방망이가 공에 맞는 상쾌한 소리가 진구 구장에 울려 퍼졌습니다. 띄엄띄엄 박수 소리가 주위에서 일었습니다. 나는 그때 아무런 맥락도 없이, 아무런 근거도 없이 문득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 나도 소설을 쓸 수 있을지 모른다'라고. p.45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 무라카미 하루키 | 현대문학


아니 어떻게 이렇게 자기 자랑을 술 따르듯 줄줄줄 늘어놓으면서 작가에게 전하는 꿀팁들을 빼곡히 전할 수 있지? 이런 자랑이라면 얼마든 기꺼이 들어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겉표지에 고개를 절레절레 별로 읽고 싶지 않았던 책이었는데 웬걸 페이지마다 밑줄이 넘쳐나서 신이 나서 읽어버렸다니 이래서 하루키 하루키 하는구나. 물음표가 느낌표로 완전히 바뀐 순간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차곡차곡 담기면 흘러넘치는 이야기


책을 읽기 전 박애희 작가님의 이야기로 전해 들었던 하루키가 소설을 쓰기로 결심한 순간을 듣고는 어느 날 갑자기 계시 같은 것을 받았다고? 좀 뜬금없는 사람이네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계시를 받을 자격을 가진 사람이 분명했다.(적어도 내가 보기엔)



20대라는 철부지 시절을 좋아하는 음악을 종일 들을 수 있다는 단순한 이유로 고생하며 자기의 삶을 개척해 가던 사람이었다. 고단하게 빚을 갚기 위해 살아가던 시절에도 책 읽는 기쁨을 포기할 수 없었다고 고백한 사람에게 어쩌면 소설 쓰기는 당연히 받았어야 할 계시가 아닐까 싶다. 차고 넘치는 이야기들이 그를 휘어 감아 소설가의 세계로 인도해 가는 그림이 그려지는 듯했다. 이유 없이는 이유가 아니었다. 아마 그가 책 읽는 기쁨을 모르는 사람이었다면 방망이가 공에 맞는 상쾌한 소리를 열 번 백번 들었어도 하늘하늘 내려오는 그것을 손에 담지 못했으리라.




언제, 어디서나 쓸 수 있는 소설


ㆍ밤늦게, 가게 일을 끝내고, 주방 식탁 앞에 앉아 소설을 썼습니다. 새벽녘까지 그 시간 외에는 내가 자유롭게 쓸 시간이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p.47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 무라카미 하루키 | 현대문학


쓰기의 책장 3,4,5기의 시간 동안 이 이야기를 나눈 것이 생각났다. 글쓰기가 삶보다 위에 있을 수는 없다고. (지금 이 순간에도 공휴일인데 늦잠 안 자고 일찍 일어나 내 옆에 온 딸을 돌려보낸 나의 손가락이 참 민망하다.)


하루키는 말한다. 링 위에 올라올 테면 올라와보라고. 누구나 쓸 수 있는 소설이고, '언제나' 쓸 수 있는 소설이니 볼멘소리 집어넣으라고. 세계적인 소설가도 전업작가로 시간을 보낸 것이 아니라 밤늦게, 자기 할 일을 다 끝내놓은 그 이후 시간에, 멋들어진 서가가 아닌 주방 식탁 앞에 앉아 소설을 썼다는데 육아맘이라 바쁘고 시간이 없고 내 공간이 없다는 이유로 나는 힘들어요 하지 말라는 말 같다. (그래 알았다. 닥쓰)




활동성 뛰어난 소설 쓰기 작법



내용을 가능한 한 심플한 단어로 바꾸고, 의도를 알기 쉽게 패러프레이즈하고, 묘사에서 불필요한 군더더기를 깎아내고, 전체를 콤팩트한 형태로 만들어 한정된 용기에 넣는 단계를 거칠 수밖에 없습니다. p.49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 무라카미 하루키 | 현대문학


자기 자랑만 하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작가에게 글쓰기 꿀팁까지 전해주어 짐짓 놀랐다. 소설을 쓰는 그의 철학까지 엿볼 수 있는 것 같았다. 괜히 어려운 말을 늘어놓지 않고, 굳이 아름다운 표현을 쓰고 싶지 않아서 그가 창조한 새로운 작법도 꽤나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어로 쓴 한 장 분량의 문장을 일본어로 '번역'했습니다. p.51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 무라카미 하루키 | 현대문학


(물론 영어가 유창한 사람의 경우라면 조금 다르겠지만) 그는 전하고자 하는 말의 가장 핵심만을 구조화하고 그것을 일본어라는 형태를 빌려 자기의 자연스러운 음색으로 음악을 연주하듯 번역하는 과정을 거친 것이다. 하루키의 그런 고유한 과정을 거쳤기에 불필요한 수식이 배제된 활동성 뛰어난 소설이 탄생할 수 있었다는 건 (표지와 상관없이) 그에게 반하게 한 이야기가 되었다.


리듬을 확보하고 멋진 화음을 찾아내고 즉흥연주의 힘을 믿는 것 p.54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 무라카미 하루키 | 현대문학


퇴고를 표현하는 문장으로 이보다 조화로운 문장이 있을까? 그가 알려준 방법으로 퇴고시간의 붐치빠를 즐기고 싶다는 생각이 퐁퐁 샘솟는다. 포비트로 갈 것인지 16피트로 갈 것인지 메이저로 갈지 마이너로 갈지 사비를 넣을지 브리지를 어떻게 연결할지, 이런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신나는데 작가에게 이런 상상을 하게 만드는 하루키는 역시 하루키다.




상처 입은 나의 비둘기를 찾아서



내가 오랜 세월에 걸쳐 가장 소중히 여겨온 것은(그리고 지금도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은) '나는 어떤 특별한 힘에 의해 소설을 쓸 기회를 부여받은 것이다'라는 솔직한 인식입니다. - 그리고 내게 주어진 자격을 - 마치 상처 입은 비둘기를 지켜주듯이 - 소중히 지켜나가면서 지금도 이렇게 소설을 계속 쓸 수 있다는 것을 일단 기뻐하고 싶습니다. p.58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 무라카미 하루키 | 현대문학



자랑일색이던 그의 글이 인정되는 순간이다. 내 것임을 주장하며 자랑한다면 조금 얄밉다. 그래 너 잘났다. 하고 싶지만 그가 자랑한 모든 것은 자기에게 주어진 것이고 그것으로 나쁜 짓 하지 않겠다 한다. 상처 입은 비둘기를 지켜주듯 자기에게 주어진 작가로서의 재능을 소중히 여기며 살겠다고 한다. 그런 사람의 손에 쥐어진 재능은 올바른 곳으로 흘러갈 것이기에 되려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나에게도 이런 마음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나는 왜 퐁퐁 샘솟듯 이야기를 주르르 써 내려가는 것일까. 한 시간에 한 문장도 못써냈다는 말에 갸우뚱하게 되는 것일까(아직까지는)



만일 이게 나에게 '주어진' 것이고 아직 그 이유와 주어진 이것으로 완수해야 할 미션을 깨닫지 못했다면 그것을 발견하는 것이 나의 첫 과제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나의 상처 입은 비둘기를 찾아 나서는 일. 하늘은 맑게 개고 생맥주는 완벽하게 시원하니 오랜만에 보는 초록빛 잔디 위에 떠오른 하얀 공을 만나러 가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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