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을 읽는 시간 — 권력은 어떻게 무너지는가”

틴토레토 <타르퀴니우스와 루크테리아>

by 아네스

미국 미술관을 방문한다면 어디부터 보면 좋을까. 많은 사람들이 현대미술이나 유명한 작품부터 찾지만, 나는 조금 다른 순서를 권해보고 싶다. 가장 먼저 고전주의 작품 앞에 서보는 것이다.


서양미술의 본고장은 유럽이다.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르네상스와 바로크의 주요 작품들은 대부분 이탈리아, 프랑스 같은 유럽에 남아 있다. 작품이 시장에 나오는 일도 거의 없고, 설령 나온다 해도 접근하기 어려운 가격이다.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미국 미술관은 더 흥미롭다. 유럽 밖에서는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고전 명작들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시카고 미술관에서 반드시 봐야 하는 그림이 있다. 베네치아의 화가 틴토레토(Jacopo Tintoretto, 1518~1594)의 문제적이고도 강렬한 작품, <타르퀴니우스와 루크레티아(Tarquin and Lucretia)>이다.


그림 앞에서 관람객은 잠시 멈칫하게 된다. 침실 안, 뒤엉킨 남녀의 몸. 무언가 벌어지고 있다는 것은 알겠지만, 정확히 무엇인지 단번에 읽히지는 않는다.


이때부터 그림은 ‘보는 것’에서 ‘읽는 것’으로 바뀐다.

때로는 그림을 읽어야 비로소 선명하게 보일 때가 있다.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이나 신화, 역사적 사건을 다룬 그림들이 그렇다.


과거의 그림은 하나의 언어였다.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이었고, 그래서 그림 속에는 읽어야 할 이야기들이 촘촘히 담겨 있다. 이를 읽어내지 못하면 그림은 온전히 이해되기 어렵고, 재미도 반감된다.


이 작품 역시 하나의 이야기를 품고 있다.

기원전 509년경, 로마. 루크레티아는 전쟁에 나간 남편의 무사 귀환을 기다리던 아름다운 유부녀였다. 왕의 아들 타르퀴니우스는 그녀의 미모에 사로잡혀 결국 폭력을 행사한다.


그리고 그다음이 이어진다. 루크레티아는 남편과 가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이 사건은 개인의 비극으로 끝나지 않는다. 분노한 로마 시민들이 봉기하고, 결국 로마 왕정은 무너진다. 그렇게 로마 공화정이 시작된다. 놀랍게도 그림은 바로 그 역사적 전환의 출발점이 되는 순간을 담고 있다.



<타르퀴니우스와 루크레티아> 1579 캔버스에 유채화 175 x 151.5 cm



틴토레토는 이 장면을 매우 극적으로 풀어낸다. 화면은 안정적이지 않다. 인물들은 사선으로 비틀려 있고, 공간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긴장감을 가진다. 바로크 미술의 사선의 역동적이 공간을 알 수 있다.


몸싸움 속에서 베개와 장식품은 바닥으로 떨어지고, 침실은 순식간에 어지럽혀진다. 진주 목걸이는 끊어져 알갱이들이 공중으로 흩어지고, 일부는 바닥에 흩어져 있다. 부드러운 천과 격렬한 움직임이 한 화면 안에서 충돌하고, 강한 색채와 빛과 어둠의 대비가 비극적인 순간을 더욱 생생하게 만든다. 이 그림은 조용히 감상하기보다는,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가듯 마주하게 된다.


흥미로운 점은, 이런 작품이 실제 미술관에서는 어떻게 보이는가이다. 시카고 미술관에서 이 그림을 마주하면 생각보다 크고, 또 생각보다 가까이 느껴진다. 화면 속 긴장감이 공간 밖으로까지 이어지는 듯하다.

이미지로 볼 때와는 전혀 다른 경험이다. 베네치아 화법 특유의 반사되는 빛의 대비와 색상의 깊이 그리고 붓질의 흔적은 현장에서 훨씬 또렷하게 드러난다. 그래서 이 작품은 설명으로 이해하는 것과 실제로 보는 것이 완전히 다르다.


르네상스를 지나며 회화는 더 이상 단순한 재현에 머물지 않는다. 화가들은 인간의 감정과 욕망, 그리고 권력을 보다 직접적으로 다루기 시작한다. 여성의 신체는 감춰야 할 대상에서 벗어나 미적 표현의 중심으로 들어오고, 동시에 권력과 폭력 역시 자연스럽게 화면 안에 자리 잡는다.


틴토레토는 그 흐름을 가장 격렬한 방식으로 밀어붙인다. 그의 화면에서 감정은 억제되지 않고, 사건은 정지되지 않는다. 이 그림은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수렴된다. 권력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그리고 그것은 어떻게 무너지는가.


루크레티아에게 가해진 폭력은 개인의 비극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끝내 하나의 체제를 흔드는 사건으로 확장된다. 이 사실을 알고 나면, 그림은 더 이상 하나의 장면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이미 진행 중인 사건이 되고, 하나의 역사로 읽히기 시작한다.


그래서 회화는 여기서 ‘보는 것’을 넘어선다.
그림은 읽히기 시작한다.

이야기를 알고 난 뒤의 화면은 이전과 다르게 선명해진다.
그리고 그 선명함은 또 다른 욕망을 만들어낸다.


이 그림을 실제로 보고 싶다는 욕망.
그 공간에 직접 서보고 싶다는 감각.

그 순간, 미술관은 더 이상 작품을 모아둔 장소가 아니다.

하나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장소가 된다.


그리고 그 다음 방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들어 올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