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전까지 눈앞의 루크테리아를 따라갔다면, 이제는 고개를 들어 올리게 된다.
시카고 미술관 고전주의 관을 몇 걸음 더 깊숙이 들어가는 순간, 시선은 자연스럽게 위로 끌린다. 그곳에 엘 그레코 (El Greco 1541-1614)의 <성모승천 Assumption of the Virgin>이 있다.
이 그림은 정면으로 ‘보는’ 작품이 아니다. 올려다보는 순간부터 감상이 시작된다.
4미터가 넘는 화면은 시선이 아니라 몸을 먼저 움직이게 한다. 목을 젖히고, 뒤로 물러서고, 다시 거리를 조정하게 만든다. 가까이 다가가면 빛이 반사되어 형태가 흐려지고, 몇 걸음 물러나야 비로소 장면이 정리가 되고 또렷해진다. 이 작품은 거리를 요구한다. 그리고 시간이 필요하다.
엘 그레코는 그리스에서 태어나 베네치아와 로마를 거치며 회화를 배웠다. 그리고 1577년, 스페인 톨레도로 향한다. 그리스 출신 이방인은 낯선 도시에서의 시작은 쉽지 않았지만, 한 번의 기회가 그의 운명을 바꾼다. 이 제단화 작업은 단순한 의뢰가 아니라, 생존을 건 기회였다. 산토 도밍고 엘 안티구오 교회의 제단화를 맡게 된 것이다.
<성모승천>은 그 제단화의 중심이다. 장례 예배당을 위해 제작된 이 그림은 죽음과 구원을 하나의 장면 안에 펼쳐 놓았다. 단순한 종교화가 아니다. 시간의 흐름을 압축한 구조다. 성모의 죽음, 승천, 그리고 그것을 목격하는 사도들의 반응까지, 서로 다른 순간들이 한 화면 안에서 동시에 일어난다.
아래쪽, 열린 관 주위에는 당황한 사도들이 모여 있다. 비어 있는 관을 확인한 그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위로 향한다. 그 시선을 따라가면, 화면 중심에서 성모 마리아가 천사들에 둘러싸여 하늘로 올라간다. 초승달 위에 선 모습은 현실이라기보다 환상에 가깝다. 지금 이 순간에도 천정을 뚫고 사라질 것처럼 보인다.
이 장면은 성경에 직접 등장하지 않는다. 전승 속 이야기를 바탕으로 구성된 장면이다. 그러나 엘 그레코는 그것을 단순히 재현하지 않는다. 그는 이야기를 상승하는 운동으로 바꿔 놓는다.
이 그림은 직선이 아니라 나선이다. 시선이 아래에서 위로, 다시 중심으로 빨려 들어가듯 흐른다. 공간은 둘로 나뉘어 있지만 완전히 분리되지 않는다. 지상과 천상이 하나의 운동 안에서 이어진다.
엘 그레코의 인물들은 낯설다. 길게 늘어진 몸, 비현실적인 비례, 그리고 강렬한 색채. 처음에는 낯설지만, 점점 그 왜곡이 오히려 설득력을 갖는다. 그는 형태를 정확히 재현하는 대신, 보이지 않는 세계를 드러내는 방식을 택한다. 그래서 이 그림은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따라가게 만드는 힘으로 작용한다.
이 그림은 200년 넘게 톨레도의 교회 제단 위, 제 자리에 머물렀다. 그리고 지금, 그 자리에 남아 있는 것은 복제본이다. 실제로 교회를 찾으면 같은 구도의 그림이 여전히 같은 위치에 걸려 있다. 공간도, 빛도, 시선의 방향도 변하지 않았다. 다만 원본만이 빠져나간 자리다.
그렇게 원래 제단을 지키던 그림이 시장에 나오자, 미국 인상주의 여류 화가 메리 카사트는 이 작품이 교육과 공공의 목적을 위해 미국에 소장되어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결국 이 작품은 긴 우여곡절 끝에 시카고 미술관의 품에 안긴다.
지금 관람객이 이 거대한 화면을 이곳에서 올려다볼 수 있다는 사실은 하나의 긴 이동의 결과다. 바다를 건너 시카고에 도착한 그림의 여정은 우연이라기보다, 어쩌면 필연처럼 느껴진다.
시카고 미술관에서 관람객은 완전한 상태의 원작을 만난다. 그러나 이곳에는 제단도, 장례 교회도 없다. 같은 그림이지만 경험은 완전히 달라진다. 이 차이는 생각보다 오래 남는다.
결국 어디에서 보느냐에 따라, 그림은 다른 의미를 갖는다
틴토레토가 인간의 욕망과 사건을 극적으로 붙잡았다면,
엘 그레코는 시선을 위로 끌어올려 구원의 이미지를 만든다.
하나는 무너지는 순간이고, 다른 하나는 올라가는 순간이다.
그래서 두 장면은 한 자리에서 감상할 때 더 선명해진다.
틴토레토를 본 뒤 엘 그레코를 떠올리면,
우리는 같은 시대가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갈라지는 지점을 보게 된다.
그리고 시카고 미술관이라는 공간 안에서,
그 두 방향을 실제로 걸으며 경험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