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래쉬(1996,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리뷰
스포일러가 일부 포함된 리뷰입니다.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은 충격적인 소재와 그에 어울리는 비주얼을 효과적으로 활용한 작품들을 통해 관객들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억압되었던 불편함을 스크린으로 불러낸다. 그의 작품들은 바디호러적 요소가 짙은 것으로 유명하다. 유명하단 말을 넘어, 크로넨버그 감독과 바디호러는 동의어로 취급될 정도로 인식되기도 한다.
예컨대, <비디오드롬(1983)>이나 <데드링거(1988)> 같은 감독의 작품에서 바디호러는 육체와 영화의 주제, 그리고 육체와 정신의 경계를 흐리는 장치로 활용된다. 바디호러가 두드러지는 그의 작품 안에서 육체는 마주해 본 적 없는 형태로 낯설게 변형되고는 한다.
그 변형으로 인해 우리 안에 굳건히 자리 잡았던 이성과 상식의 경계는 흔들릴 위기에 처한다. <미래의 범죄들(2022)>에서 신체를 갈라 장기에 문신을 새기는 기행은 ‘전시 예술’로 취급되며 고통이 사라진 세상 속 새로운 자극제를 찾는 인류의 새로운 미래를 조망한다. <비디오드롬(1983)>속에서 감독은 인간의 육체와 비디오의 ‘융합’을 통하여 미디어 매체가 우리에게 미칠 유해성에 대해 경고한다. 또한 <데드링거(1988)>에서 쌍둥이 간의 의존적 심리 상태는 서로의 육체가 물리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이미지로 표현된다.
이런 감독의 작품에서, 우리는 ‘명확히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추상적인 개념’과 ‘눈으로 볼 수 있도록 드러나는 물질적인 육체’의 구분이 흐릿해지고 있다는 것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외면하고 싶었던 인간의 끔찍한 본성은 뚜렷한 형체를 가지곤 눈앞에 나타난다. 크로넨버그 감독은 관객으로 하여금 그 일그러진 경계를 직면하도록 만든다. 우리는 인간 내면 아래에 억압되었던 욕망과 공포를 탐구하게 된다.
충격적 소재로 강한 호불호를 보여왔던 작품들의 연장선처럼, <크래쉬> 역시 개봉 당시부터 ‘문제작’이라는 말로 대표되었다.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특별상을 거머쥐었지만 시상이 거부되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심지어 어떤 지역에서는 상영 금지를 주장하는 움직임이 일어나기도 했다. 국내에서도, 1990년대 개봉 당시에 9분가량의 분량이 삭제된 상태로 개봉되었다.
하지만 2025년 3월, 마침내 <크래쉬>는 <크래쉬: 디렉터스 컷>이라는 이름으로 삭제 분량 없는 완전한 모습으로 재개봉하며 극장에서 만나볼 기회를 가지게 됐다.
이 감독의 팬들은 아마도 '크로넨버그라면 기괴한 바디호러 작품이겠지'라는 기대를 가지고 극장에 갔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기대한 모습과는 달리 <크래쉬>는 바디 호러적 요소를 빼고 훨씬 건조하며 절제된 방식의 영화다. 나 역시 해당 작품을 처음 접했을 때는 이 영화가 <비디오드롬>이나 <엑시스텐즈>처럼 충격적인 비주얼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 예상했었다. 그렇지만 작품에서 피의 분출, 흘러내리는 피부 같은 객관적으로 ‘징그러운’ 것들은 찾아보기 힘들다. 대신 시트의 마찰과 잔뜩 긁힌 금속 표면 같은 표현들만이 존재한다. 비틀리는 육체 대신 <크래쉬>에서 강조되는 키워드는 ‘성적인 충동’이다. 그리고 감독은 그러한 추상적 개념들은 그려낼 재료로 뒤틀린 육체 대신 차가운 금속을 택한다. 작품을 통해 우리는 욕망의 분출이라는 뜨거운 감각을 금속 간의 충돌로 비유한 새로운 시도를 마주하게 된다.
모든 이야기의 시발점은 주인공 제임스가 갑작스럽게 겪게 된 교통사고다. 사고 이후 그는 같은 사고에 휘말렸던 헬렌을 통하여 교통사고에 성적 흥분을 느끼는 집단과 점차 얽히게 되고, 서서히 자기 파괴적인 욕망에 몰두한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교통사고에 매료당한 사람들-어쩌면 동아리처럼 보이는 그들-에게 자동차는 단순한 금속 덩어리를 넘어선 그 자체로 욕망의 대상으로 나타난다. 차 내부는 사람들이 맨살을 부딪히며 성적인 관계를 맺고 성 에너지를 응축시키는 장소로 표현된다. 최종적으로 차 내부에서 응축된 성 에너지는 자동차 간의 충돌-즉, 교통사고라는 클라이맥스-로 폭발한다. 어쩌면 이 영화에서는 차체를 신체와 동일시하는지도 모른다. 신체가 서로 맞부딪히며 사람들 간의 흥분을 돋구는 것처럼, 또 다른 접촉인 교통사고 역시 그들에겐 성적인 흥분을 불러일으키는 행위로 작용한다.
‘교통사고에 흥분하는 사람들’이라는 설정은 대다수에게 매우 받아들이기 어렵다. 다만 영화는 치밀하게 조직된 시각적 이미지와 반복적 구조를 통해, 우리에게 이 낯선 감각을 점차 수용하도록 이끌고 있다.
그런 영화의 특징은 대표적으로 영화의 수미상관적 구조에서 드러난다. 극 초반부 카메라걸과의 성관계 도중 방해를 받게 되어 절정(오르가즘)에 이르지 못한 제임스를 향한 캐서린의 “다음엔 될 거야”라는 말은 엔딩에서 교통사고의 완전한 재현을 실패하며 쓰러져 있는 캐서린을 향한 제임스의 말로 반복된다. 이러한 영화의 구조는 성관계와 사고, 오르가즘과 충돌이 겹쳐진다는 은유의 또 다른 표현 방식이다.
이것뿐만이 아니다. 영화 내에서는 교통사고와 성관계가 유사한 방식으로 표현되는 장면들이 다수 존재한다. 먼저 본이 운전 중 캐서린의 차를 뒤에서 아슬아슬하게 들이받는 장면이 있다. 제임스는 캐서린이 불안한 모습을 보이더라도 그 상황에 차마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못한다. 그저 근처에서 바라보기만 한다. 이후 영화에서는 본과 캐서린 간의 긴장감 넘치는 장면이 연상되는 유사한 장면이 연출된다. 도로에서의 아슬아슬한 차체 간의 접촉이 세차장 속 자동차의 본과 캐서린의 성관계로 전환되는 순간이다. 제임스는 방관자였던 이전의 장면과 마찬가지로 차의 앞자리에 앉아 관계를 가지는 그 둘의 모습을 관찰할 뿐이다. 갓길로 빠져나와 의문을 품고 있던 캐서린에게 뒤늦게 다가간 것과 비슷하게 이 장면에서조차 제임스는 집으로 돌아와서야 한 발 늦게 캐서린의 허벅지에 남은 본의 손자국을 더듬어 볼 뿐이다.
또한 가브리엘의 자동차 사고로 남은 다리를 가르는 흉터는 징그럽고 추한 것이 아닌 매혹적인 신체의 일부로 표현되고 있다. 훔쳐보고 싶고 만져보고 싶은 육체의 일부처럼. 이는 나중에 제임스가 캐서린 차체의 긁힌 자국을 손으로 느리게 훑어내는 장면에서 겹쳐진다. 단순히 훑고 지나가는 것이 아닌 더듬는 손을 클로즈업하는 연출은 이 장면을 더욱 자극적으로 만든다. 이렇게 차의 상처와 신체의 상처는 자연스레 섹슈얼한 속성으로 묶인다. 감독은 사고와 섹슈얼리티, 이 두 가지를 제외한 다른 것들은 영화의 주제부에서 제외시키며 자극 그 자체만을 담은 작품을 완성시켰다.
크로넨버그 감독은 이 영화를 해피엔딩이라 인터뷰한 바 있다. 각자를 찾는 결말을 맞이하는 것이 아닌가, 라는 이야기였다. 영화 내내 제임스와 캐서린은 같은 집에 사는 부부이지만 각자 외부의 자극만을 찾아 통합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 한 침대에서 둘의 육체를 겹치는 성관계를 가지면서도 본이라는 제 3자의 이야기를 지속적으로 꺼낼 뿐이다. 하지만 영화 엔딩에서 그들은 마침내 서로의 “다음엔 될 거야”라는 말을 되받으며 서로를 이해한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나에게 이들의 결말은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는 새드엔딩으로 느껴진다. 완전한 욕구의 해방이란 허상과도 같다. 사고 이후 남는 것은 무엇인가? 부서진 차체, 회복될 수 없이 망가진 육체와 함께 공허함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영화 마지막 “다음엔 될 거야”라는 제임스의 말을 들으며 전복된 차체 아래에 누워 있는 캐서린의 표정은 텅 비어있다.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정말 다음 기회에는 열망했던 클라이맥스에 도달할 수 있을지에 대하여 의문이 든다.
애초에 사고의 재현을 통해 언젠가는 도달할 클라이맥스에서, 우리는 그렇게 미치도록 바란 쾌락을 감각할 수는 있을까. 사고의 재현의 결과는 결국 회복 불가한 붕괴뿐이다. 그들은 완성된 사고 속에서 그저 의미 없이 으스러지는 최후를 맞을 것이다. 그렇게 이 영화는 절대 닿을 수 없는 욕망의 한계치를 도달하고자 발버둥치는 자들의 공허한 종말을 향한 비극적 이야기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따라서 <크래쉬>는 쉽게 수용하기 어려운 욕망을 관조하게 되는 역할 외에도 여러 가지 관점에서 고민해 볼 여지를 남기는 영화다. 이 영화는 그저 단순히 성적 욕구의 해방을 외치는 것일까? 감독은 제임스를 화자로 삼아 우리가 그들의 이상 성욕을 응시하게 하고, 궁극적으로 그들처럼 그 위험한 욕망에 매료되도록 하여 새로운 체험을 제공하고자 하는 것일까? 혹은 허무함과 파멸만이 기다리고 있는 무의미한 결말로 질주하는 현대 사회의 욕망에 대하여 경고하는 섬뜩한 예언인 것일까?
25.1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