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얼 페인(2024, 제시 아이젠버그)> 리뷰
스포일러가 일부 포함된 리뷰입니다.
작년 영화제에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던 영화가 있다. 콘클라베, 브루탈리스트, 아노라 등 여러 기대작들 사이에서도 많은 주목을 받은 바로 이 작품은, 배우로 잘 알려진 제시 아이젠버그가 감독을 맡아 제작한 <리얼 페인>이다. 이 작품은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각본상을 수상했고 ‘벤시’라는 캐릭터를 연기한 키에라 컬킨은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조연상을 거머쥐기도 하였다.
영화 <리얼 페인>은 제목 그대로 ‘고통’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화다. 우리는 리얼 페인- 즉, 영화에서 말하는 진짜 고통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된다. 주인공 둘은 여행을 떠난다. 그들의 여행의 테마는 다크투어(인류의 고통, 죽음, 슬픔 등을 테마로 하는 여행을 의미)로, 과거 자신들의 할머니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갇혔던 유대인 수용소로 향한다. 수용소에서 직면한 과거의 고통은 여전히 남아있다. 그 고통들은 공기 아래로 묵직하게 가라앉아 영화 속 등장인물뿐만 아니라 지켜보는 우리까지 짓누른다.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지워지지 않은 수용소 벽의 파란 얼룩처럼 선명하다.
그러나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어도 남아 있는 고통만이 진정한 고통일까? 생사가 걸려 있는 것들만이 진짜 고통일까? 내 인생에 거대한 영향을 미치는 고통만이 진짜일까? 영화는 질문한다. 주인공 둘의 힘듦은 과거 할머니가 겪은 고통에 비하면 발 끝에도 못 미칠 정도로 미미해 보인다. 그들의 불안증과 우울증은 당장 목숨을 위협하려 들지 않는다. 당장 내일 내가 살아남을 수 있을지에 대한 생존이 걸린 문제도 아니다. 그렇지만 영화는 다시 묻는다.
진짜 고통이 뭔데?
고통은 객관적인 척도로 잴 수 없는 요소임이 분명하다. 나의 힘듦은 모두가 공감 가능한 보편적 감정이 아니다. 오히려 너무 사소한 것에 가깝다. 얼마나 사소하면 시간이 지나 그 시절의 나를 되돌아볼 때, 나조차도 '그땐 왜 그렇게 힘들었었지?'처럼 생각하게 될 때도 많다. 하지만 그 순간의 우리는 정말 힘들었음도 분명하다. 따라서 내가 도출할 수 있는 '리얼 페인'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나 자신이 너무 힘들다고 느껴진다면 그것은 ‘진짜 고통’인 것이다.
영화는 그런 사실을 뒷받침한다. 보편적인 한 민족의 고통에서 출발해 현대까지 이르는 개개인의 고통을 조망하는 영화는 어느새 우리의 마음속 깊은 곳까지 파고든다. 우리는 각자의 고통과 외면하고 싶던 시절, 감정, 스스로의 모습을 응시하게 된다.
너 왜 그래?
넌 진짜 애가 왜 그래?
이런 질문에 나도 모르겠다고, 어쩔 수가 없다고 참을 수가 없다고 소리치고 싶던 때가 있었다. 내가 왜 이러는지 가장 궁금한 사람은 아마도 스스로일 게 분명한데 말이다. 영화 내내 벤시를 보는 마음은 복잡해져만 갔다. 사회성이 부족한 것도 아닌데 맥락도 못 읽고 분위기를 망쳐버리는 거. 그렇게 짜증 내다가도 또 신나서 과하게 흥분한 듯한 모습. 어떻게 보면 나 같은 몇 사람들에게 벤시는 자화상처럼, 거울처럼 다가올지도 모른다. 그런 벤시를 보고 짜증 내는 나. 짜증 내는 나를 바라보는 나. 결국 이 모든 모습이 전부 나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벤시를 미워하는 나는 내 안의 인정하고 싶지 않은 추한 모습을 미워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내 모든 부분을 사랑할 수 있을까? 그저 다른 영화 속 다른 등장인물들이 벤시를 응원하는 마음처럼 나 스스로도 추한 나까지 응원하며, 자기혐오를 무디게 만들어 살아가는 것이 가장 나은 방법이다.
영화는 스스로에 대한 복잡한 마음을 데이빗과 벤시라는 두 등장인물의 관계로 보여준다. 그들의 관계는 썩 건강한 인간관계는 아닌 것처럼 보인다.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때로는 서로의 존재 자체가 너무 짜증 난다. 서로가 짐처럼 느껴진다. 한쪽은 찐따 같고, 너랑 있으면 쪽팔리고, 네가 이해가 안 가고, 왜 그러고 사는지 모르겠다고 상대에게 쏘아붙인다. 반대편은 그러는 네가 진짜 변한 거라며, 옛날의 너와 너무도 달라졌다고 토로한다. 그러던 어느 순간 데이빗과 벤시는 내 안의 두 갈등뿐만 아니라 오랜 시간 함께했던 모든 관계들의 은유임을 느끼게 된다. 이런 말들을 내뱉고 싶지만 차마 그러지 못했던 시간들이 떠오른다.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누군가의 벤시가 되었다가, 누군가의 데이빗이 되는 경험들을 반복한다. 하지만 가장 확실한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데이빗과 벤시 사이엔 분명히 애정이란 것이 존재한다.
영화의 엔딩은 그런 맥락에서 인상적이다. 공항이란 장소는 목적이 뚜렷하다는 특징을 가진다. 출발과 도착을 빼놓고 공항을 이야기할 순 없다. 공항에 오는 목적은 어딘가로 떠나거나 어딘가에서 돌아오거나, 혹은 돌아올 누군가를 기다리거나 가버릴 누군가를 배웅하거나 네 가지 중 하나로 정해진다. 그런 공항이란 장소에서 벤시는 혼자 앉아 있다. 저마다의 목적지를 가진 사람들이 모이는 공항에서라면, 벤시 자신의 끝나지 않는 방황도 방향을 찾을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감을 품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울퉁불퉁하게 못나고 별난 존재도 ‘이상한 별종 또라이들’ 사이에서라면 좀 덜 이상해 보이지 않을까 하는 희망도 존재한다. 그런 허무한 희망.
하지만 벤시를 굳이 공항에서 끄집어낼 수 없다. 억지로 생산적인 시간을 보내도록 몰아붙일 수도 없다. 세상엔 수많은 고통을 삭힐 방법이 존재한다. 그러니까, 벤시처럼 무의미하게 시간을 죽여야만 어느 순간 좀 괜찮아진 것 같단 느낌이 드는 고통도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너무 일찍 도착한 공항에서 붕 떠버린 것 같은, 그런 의미 없는 시간을 보내다 보면 마음 한 구석이 무뎌진 것 같단 느낌이 들 때도 있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을 떠나보내야 나도 마침내 이곳에서 떠날 수 있을까?
25.1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