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를 추적해 보자.

프롤로그

by 자유인

세상에서 가장 큰 행운이 무엇인지 아는가?


내가 내 자신의 코치가 되어주는 것이다. 그 누구도 아닌 내 자신의 목소리를 마음속으로 들으면 내가 올바르게 나아가고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자신은 믿지 않는 사람, 자신의 목소리를 신뢰하지 않는 사람이 성공하는 경우는 없다. <보도 섀퍼, 이기는 습관, p. 6>





내가 삶을 어떤 기준으로 살아가고 있나를 생각해 보면 '나'보다는 '타자'들의 시선에 매몰되어 살아온 시간이 참으로 길었다는 생각이 든다.



특별히 시련이 될만한 문제에 봉착했을 때, 혹은 오랫동안 소망했던 일이 이루어진 순간에도 나는 주로 가장 먼저 이것을 함께해 줄 '타자'들을 찾았다.



잠시 가만히 기쁨을 혼자 누려 볼 수는 없었을까? 온 세포들에게, 나의 온 영혼의 총체에 가득 기쁨이 퍼지도록 시간을 할애할 순 없었던 걸까? 왜 그랬을까?


존재만으로 고통이 되었던 '그 인간들'과의 문제, '그 사건들'을 나는 왜 내 안에 잠자는 거인을 깨워 지혜와 명철을 구하지 못했을까? 아마도 나의 신음을 가장 진솔하게 받아주는 것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었을 텐데.


깊이, 더 깊이 나에게 묻게 되면 나의 내면 깊은 곳에서는 어떤 답을 해주었을 것이다.

이건 언제나 거의 확실한 방법이다.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는 이유는 끈질기게 매달리고 침투하려는 나를 향한 집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집념? 이거 절대 쉽지 않다. 매우 강력한 땔감이 필요하다.

카록이나 문자로 나를 생각해 줄 것 같은 사람들에게 상황을 전달하거나, 전화 통화를 하거나, 만나서 이야기를 하든 다양한 타자의 이야기들이 객관적이고 실패와 오류를 줄여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한몫한다.


나의 상황의 본질을 끝끝내 이해할 수 있는 한 사람은 오직 나일 진대,

중요한 순간에 우리는 이런 주인의식, 자기결정권에 손에 놓고 만다.

그러니 아무리 그럴듯해 보이는 대안도 내가 내키지 않으면 지속하지 어렵고

거의 언제나 남의 생각과 의견에는 한계가 분명했다.


혹자들은 "너를 생각해서 하는 말인데..."로 시작하여 비수 꽂는 결론으로 마무리되는 언사도 많다.

'너'라는 '나'는 진짜 나일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타자의 생각을 구하다 힘 빠지고 상처받는 일도 다반사다.


인간이 안다는 것, 이해한다는 것에도 어느 정도의 한계가 있음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누구든 한 인간의 실체와 본성을 완벽하게 드러내며 살기도 어렵고,

누군가에게 비친 '나'란 인간 역시 진짜 내가 아닐 수 있다.


그러니 이왕이면 나를 추적해 보자.

더 깊이, 더 섬세하게, 더 지혜롭게

나와 만나는 시도를 해보자.


나란 인간?

그렇게 대충이지 않다.

참 괜찮은 나를 이참에 꼭 만나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이제 고작 프롤로그일 뿐인데,

이런 도전을 받다니!




작가의 이전글독립이라는 이 거친 주제에 대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