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에서 추억 찾기

​소나무순의 효능을 잘 알고 있었지만 도심에서는 쉽게 만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고심 끝에 생각해 낸 장소가 고향마을이었다. 소나무순 여린 것을 맘껏 따보겠다고 아주 오랜만에 고향마을 뒷산에 올라갔다.


산마루 꼭대기 부근에 어릴 적엔 나보다 키 작은 나지막한 애기 소나무가 많았기 때문이다.

열심히 산에 올라 정상부근에 이르렀을 때 나는 잠시 망연자실, 내 눈을 의심해야 했다. 그리고

한참을 우두커니 서서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나즈막 했던 그 시절 나무들은 오간데 없이 사라지고 어른키 두 배를 넘는 장송들만 빽빽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곳에 도달하는 순간까지도

오르지 어릴 적 추억 속에 마음이 사로잡혀 지나가버린 수십 년의 시간을 망각하고 있었다. 또한 매 순간 변하고 자라는 생물의 속성까지도 까맣게 잊고 있던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잠시 그곳에 털썩 주저앉아 회한에 젖을 수밖에 없었으니 수십 번의 봄, 가을이 지났음을 돌이켜 봐야 했다.

그때 내 기억의 타임머신은 수십 년을 순간 넘나 들었는데 주변은 너무도 변해 있었다.

문득 `신선놀음에 도낏자루 썩는 줄 모른다`는 옛이야기가 떠올랐다.

한 처사가 신선들 바둑놀이 구경 후 동굴밖을 나왔을 때 그 심경이랄까.


산등성이를 내려오며

어릴 적 반들반들했던 산길이 잡목무성한 숲길이 되어 길 찾기에도

힘겨웠다. 하지만 이러한 수십 년간의 산천의 변화가 오랜만에 나를 더욱 그 시절 동심으로 이끌어 갔다.

산길을 내려오며 내가 태어나고 살았던 옛 집터는 잡초와 잡목으로 뒤덮인 상태지만 추억을 되살리기에는 충분했다.


어린 시절 그렇게도 많았던 과일나무 꽃나무들이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고향생각을 할 때마다 나의 추억이 서린 꽃과 나무를 생각하게 하는 추억의 장소로 여전히 남아있다.

반세기 전에는 고향집 뒤편 오솔길을 자주 오르내렸다. 오르막 길을 한동안 가다 보면 고갯마루에 다다랐다. 그러면 저 아래로 큰 마을과 이십여 리 확 트인 들판이 시원스럽게 눈에 들어온다.

내가 초등학생이 되기 전 한두해 전쯤부터 재너머 큰 마을 넘어가는 이 고갯마루의 넓은 잔디밭은

우리의 놀이터였고 만남의 장소였다.

우리는 그곳 고갯마루를 지역방언인 `말랭이`라 불렀다.

또한 그 고개는 높은 산 저쪽부터 연달아 내려온 능선에 위치해 있었으므로 지금에 와 생각해 보면 중요한 생태통로였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한밤중에 산짐승들이 오간 흔적을 겨울철 눈 온 날 아침이면

확인할 수 있었다.


한 번은 대낮에도 산짐승이 출몰했다. 우리 집 수탉이 암탉들을 이끌고 그곳까지 올라가 먹이활동을 하다가 대낮에 살쾡이의 공격을 받은 것이다.

고갯마루 주변에는 병풍같이 두른 큰 장송 소나무와 참나무들 그리고 봄에 연두색 잎이 새롭게 나오는 쭉 뻗은

낙엽송이 우리를 항상 지켜보는 곳이었다.

그리고 재너머 동네를 빤하게 내려다볼 수 있었다. 여닐곱 가구수의 집들과 앞에는 산으로 답답하게 막힌 우리 동네에 비하면 재너머 동네는

좀 더 크고 전기불이 들어오는 개화된 곳으로 생각되었다.

종종 그곳 말랭이에 오르면 항상 귀에 들려오던 다양한 소리들이 아직도 신선하고 생생하게 떠오른다.

새소리, 바람소리를 배경으로 저 먼 곳 넓은 들판에서 들려오는 농기계소리 방앗간 발동기소리 차량소리 등이 혼합되어 웅웅 거리던 다양한 소음들이 들렸다.


그때는 거기에 올라와야만 들리는 왠지 기분 나쁘지 않은 희망에 찬 건강한 소리처럼 여겨졌다.

그럴만하게도 당시에는 공장글뚝의

뭉게구름 연기나 건설현장의 망치소리가 경제개발의 상징으로 표현되었다. 그리고 공해나 오염이란 말은 거의 사용되지 않던 때였다.


물론 60년대에 미국에서 카슨이 침묵의 봄을 통해 환경오염을 경고한 적도 있지만 개도국 우리에겐 먼 나라 얘기였다.

그곳 고갯마루는 몇 개의

오솔길들이 겹치는 십자로여서 사람들의 발길이 빈번해 풀들이 거의 나지 않을 정도로 항상 반들거렸다.


또한 멀리 경유하는 신작로 대용의 지름길이라서 일 년에 한 번 칠월칠석 즈음에는 동네 어른들이

삽과 가래를 가지고 오솔길 정비작업을 연례행사처럼 하였던 것 같다.

말랭이 잔디밭은 봄에는 토끼풀을 뜯고 소에게 플먹이러 산등성이를 오르내리는 길목도 되었다.

우리 집의 드넓은 텃밭이 고갯마루까지 접해 있어

그곳까지도 우리 가족의 생활공간에 들어와 있었다.

또한 윗 밭에 참외 수박을 심는 해에는 원두막이 거기에 세워져 우리의 놀이터가 된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집 주변에 다양한 과일나무들이 있어 제철이 되면 과일들이 많아 형, 누님 친구들이

자주 원두막에 오곤 했다.

그리고 그곳 말랭이에는 아름드리 왕소나무와 상수리나무에 둘러싸여 있고 한쪽에는 다른 산과는 좀 이색적인 큰 낙엽송과 곰솔이

서 있었다. 봄에 새잎이 나기 전 물오른 낙엽송가지를 꺾어 호뜨기 피리를 만들어 불기도 했다.

그 낙엽송은 일본 잎깔나무였는데

재너머동네 함석집아재 부친이 일제시대 심은 것이라고 한다.

그곳 말랭이 주변에는

그집안 조상묘지들이 있어 지역의 유지였던 그 부친은 다른 산들이 헐벗고 민둥산이 될 때에도 그곳 만큼은 나무를 심고 잘 관리

했던 것 같았다.


그 집안이 얼마나 세력가였던지 그때쯤 어느 해던가 그 아재 부친이 상을 당했을 때 상여앞를 인도하던

만장이 아흔 개가 넘었다니

그 위세를 알만도 하다.


그리고 그 만장들이 신작로

수백 미터를 줄지어 따라와 말랭이 묘지가에 빙 둘러 꽂혀 펄럭이던

그 장례식날이 지금도 생생하다.

최근에 만났던 70대 지인은 자신의 선친을 회고하면서 자신이 청소년 시절 선친장례식 때

만장이 아흔아홉 개였다고 말하면서 가세가 기운 현실을 씁쓸해하는 표정이었다.


나는 그 만장의 숫자 의미를 이해했기 때문에 그지인의 집안이 대단했음을 한 것 치켜세위 주었다.

하지만 옆에 있던 젊은 동료는 그 의미를 모르는 눈치여서 요즘으로 말하자면 장례식장에

근조기나 화환의 숫자가 아흔아홉 개였다고

말해주니 그 재서야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재너머 함석집 아재 부친은 일제시대

법무시설의 기관장을 했다 하니 위세가

그럴 만도 하다.

또한 우리 현대사의 어두운

일면인 친일의 주류였으니 말문이 막힌다.

하지만 그 아재가 우리 부친의 외가 육촌이 되니

뒤틀려버린 우리 현대사에 어쩔 수

없는 아쉬움만 남게 된다.

내가 초등시절이 되기 7, 8년 전에 벌써 혁명정부에서 재너머 넓은 들판을 바둑판같이 정리하고

수리시설을 완비하는 공사가 있었다.


그리고 안고랑 골짜기 논들까지 양수시설을 만들었다. 우리 집의 양지편 시냇가 논과 황해논으로 불리던 다른 논에도 극심한 한발에 대비할 수 있었다. 시냇물이 마르면 양수물을 이용할 수 있게 되어 천수답은 면하게 해 주었다.

그리고 쌀의 신품종 통일벼가 나와 녹색혁명의 서막을 열었다.

또한 그 시기 수십 년간 황폐화된 우리의 산들에 나무를 심는 사방공사가 시작되었으니

그 효과 또한 놀라웠다. 대부분 우리네

산들의 칠, 팔부능선 위쪽은

빨간흙이 드러난

민둥산이었으나 사방사업으로

점점푸르게 변해갔기 때문이다.

말랭이 능선 끝 쪽 봉우리의 팔부능선 위쪽은 완전히 민둥산이었다.

하지만 어느날 가보니 계단식 단이 만들어지고

토양침식방지용 거적이 깔려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비료목인 싸리와 오리나무가 심기고 육성목인 소나무도 곳곳에 심어졌다.

그렇게 수년이 지나니 벌써 숲의 모양을 갖춰 가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


​수십 년이 지나 최근 고향옛집을 찾으니 그 시절 반들하던 오솔길은 입구부터 울창한 숲에 의해 막혀 있었다.

거의 폐쇄된 옛길을 보고 이제는 내가 나고 자란 고향집터가

숲에 흡수된 것 같아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야릇한 생각이 들었다.

그당시 말랭이 양쪽 동네에서는 몇가구가

대도시로 서울로 이사했다는 소문들이 들렸다.

아마도 충분한 자가논밭이 없는 경우

시골에서 자녀를 키우면서 살기에는 생활고가

대단했을 것이다.

말랭이 오솔길따라 오른편으로 한동안 내려가면

윤씨 아재네가 있었는데 그집도 서울로 이사한 집들중에 하나였다.

그후 들려오는 소식은 서울난곡 달동네에 움막같은 토담집을 짓고 산다는 소문이 들렸다.

그래도 시골보다는 가장이 직장

구하기 쉬울것이니 생활고는 덜했을 것으로 짐작해 본다.

그때부터 이렇게 서울로 도시로 인구이동이 시작된 것 같다.

그당시 서울쪽으로의 인구

유입은 가히 폭발적 이었다.

얼마나

많았던지 고속도로 서울톨게이트표어를

바꾸기까지 했다는 일화도 있다.

즉 그표어에 이런 일이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

위대한 민족의 수도 서울입니다."

였는데 여기에서 "어서 오십시오" 를

지우는 해프닝이 있었다고 한다.

부모의 입장에서 시골에서 농토가 없는경우 여러자녀를 두고 사는것은 그 압박감이 너무컷을 것이 뻔하다. 시골에 살았던 한 지인 부친은 생활고와 자녀들

교육이 어렵게 되자 결단을 내려 탄광취업을 위해 이사 하였다고 한다.


그렇게 이사한 덕분에 지인 형제들 모두는 고등교육까지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부친은 안타깝게도 탄부의 직업병인 진폐증으로 평생을 병원에서 식물인간으로 고생하는 신세가 된것이다.

말그대로 부모를 희생시켜 즉 당신의 몸을 다 파먹히며 자식들이 자라난 것이다.

이렇게 반세기전 시골의 부모들 일부는 자녀양육을 위해서 또는 생활고를 떨치기 위해 대도시 달동네로 향했고

태백에서 정선에서 보령에서 탄부생활을 했던 것 같다.

우리집은 종가집 말미를 붙잡은 부친덕분에 물려받은 논밭이 있었고 나는 보릿고개 세대는 아니었다.

하지만 형님과 누님들의 청소년 시기에는 부친의 이제미숙으로 수년간 고생을 한것은 미뤄 짐작이 간다.

내가 태어나기 직전 대대로 살던 부친의 고향에서

당신의 외가이며 현재의 내 고향동네로 이사를 온것이다.

일가친척이 중요시 되던 예전의 시골공동체 사회를

생각해보면 납득이 된다. 조부님이 삼대독자인 까닭에 친척이 거의없던 우리집안을 생각할때

부친의 외가동네로의 이사결정은 충분히 이해할 수 는 일이었다.


내 조모의 고향이며 그후 나의 고향이 된 그곳은 끝없이 흘러 나오는 화수분같이 내 추억이야기의 산실이 되어 있다. 또한 산마루에 올라와 장송으로 자라난 소나무 아래서 수십년을 순간에 넘나드는 추억의 타임머신을 탈 수 있는 장소도 돼 있다. 이렇게 고향처럼 추억의 장소는 인생이란 여정에서 영혼을 일깨워주는 감성충전소라고 분명히 자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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