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어예찬

숙성홍어

설날이 가까워 온다. 많은 명절 음식 중에 홍어회(홍어무침)가 생각나는 때이다.

어릴 적 설대목 장에서 사 오셨던 넓적하고 커다란 홍어가 떠오른다.


우물가에 펼쳐놓은 그 모습은

유선형 여늬 생선과는 차원이 사뭇 다른 우람하게 큰 마름꼴이었다.

두툼한 꼬리가 있고 등 쪽은 거무스레한 붉은색이고 뒤집어 놓으면 뱃살 쪽이 하얗게 드러났다.

뱃살 중간 위쪽에 자리 잡은 커다란 홍어입이 마치 사람 입모양 마냥 신기하고도 재미있어 보였다.


물론 비슷한 생선인 가오리를 통째로 사 올 때도 있었다. 마찬가지로 우물가에서 해체할 때면 항상 흥미 있는 구경거리였다. 나의 어린 시절에 생선만큼은 지금보다

흔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네 고향도 먹는 법은 좀 달랐지만 남도 호남 쪽 못지않게 홍어를 즐겨 먹었던 것 같다. 홍어찜도 먹었으며 신선한 홍어 무침회는 명절, 집안잔치, 동네잔치를 할 때마다 결코 빠질 수 없는 필수 메뉴였다.


또한 어릴 적 생선회를 거의 모르고 살던 시절 홍어는 생선을 날것으로 먹을 수 있는 유일한 음식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아직도 매콤한 감칠맛과 빙초산 향이 자극하는 그 홍어무침회 그때의 맛이 그리울 때가 있다.


하지만 지금은 나 역시 남도에서 선호하는 삭힌 홍어맛에 익숙해진 지 오래다. 점점 더 숙성이 오래된 깊은 맛을 찾게 되니 나도 이제 홍어 마니아가 다 된 것 같다.

요즘도 며칠정도 삭힌 홍어제품을 주문하여 냉실에 넣어놓고 가끔 먹고는 있지만 더 강한 맛의 아쉬움은 항상 남아있다.


얼마 전 박달재 인근 식당에서 홍어 애탕을 먹은 적이 있다. 참으로 오랜만에 제대로 된 전문식당을 우연히 만나 미각을 즐겁게 했었다. 잘 숙성된 그 애탕 맛처럼 강한 자극의 숙성 홍어회를 기대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떤 홍어맛에 미련을 두고 있는 것일까. 나와 삭힌 홍어와의 첫 인연은 사십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1 때 남도 무안에서 큰 누님 결혼식이 있었다. 매형 고향이 무안인지라 결혼식에 하객의 일원으로 참석한 때였다. 가족과 친척들의 일행에 포함되어 버스를 타고 논산역에 도착했고 호남선 열차를 타고 무안으로 내려갔다.

처음 타는 장거리 열차가 설레었고 남도 무안에서 보았던 초겨울 선홍색 동백꽃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다.


또한 그곳에서 더 충격적인 맛의 경험도 하게 된다. 남도 쪽에서 잔치의 필수 음식이라던 삭힌 홍어회를 만나게 된다.

그렇게 많이 숙성시킨 홍어회를 난생처음 맛보게 된 것이다.


그 진 맛을 모르던 상태에서 입에 덥석 넣고 씹었을 때의 그 느낌은 가히 충격으로 다가왔다. 역한 냄새는 별개라도 푹 삭힌 화끈한 맛에 코의 비강이 진동하며 머리가 혼돈되고 안면이 후끈 달아오를 정도의 큰 자극이었기 때문이다.


세월이 흘러 이제야 정작 삭힌 홍어의 참 맛을 알게 되었으니 그 맛의 옛 충격은 또 다른 미각의 차원으로 승화되어 이제는 선망의 맛이 되었다.

즉 비호감의 화끈했던 그 맛은 미지의 호기심으로 변했고 다시금 경험하고 싶은 환상적인 맛의 백미가 된 것이다.


요즘은 숙성홍어 맛집을 찾아다니는 동호회도 있다. 또한 남도 영산포를 방문하며 숙성 홍어의 원조를 찾아가는 마니아들도 많아졌다. 그들도

방송인 누군가가 말했던 행복한 맛

그 숙성홍어 맛을 찾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처음의 그 맛을 아직 찾아내지 못했고 다시 경험하지 못한 미답의 영역으로 남겨 둘지도 모른다.


삭힌 홍어가 위장과 소화계통에 좋은

음식으로 익히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삭힌 홍어의 유래는 녹녹지 않던 시절 우연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옛날에도 홍어는 역시 흑산도가 주요 산지가 되다 보니 소비지 포구인 영산포로 산물을 옮기려면 노 젓는 거룻배로 몇 날 며칠이 걸렸으리라. 냉동기술이 없던 시절 포구에 이르면 자연스레 숙성이 돼 있었음은 당연하다.

그 상태로 해물을 먹을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서 그렇게 삭힌 홍어 식문화가 유래되었다고 한다.


물론 이렇게 우연에 의해 더 좋은 맛과 영양, 풍미를 갖추게 된 세계적인 기호식품들이 많이 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을 하나만 꼽자면 단연 홍차의 유래일 것이다.


대영제국의 주요 녹차 생산지는 동방의 인도였다. 주로 녹차를 마시던 그 당시에 신선한 상태로 녹차잎을 수만리 뱃길로 수송하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달 이상 긴 항해길에 도착항구에서는 자연스레 숙성된 녹찻잎을 접해야만 했을 것이다. 이를 차마 아까워 버리지 못하고 그대로 말려 차로 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풍미 좋은 홍차의 유래라고 한다.


따라서 삭힌 홍어와 홍차 그리고 더 나아가면 양조 술의 기원도 우연에 의한 숙성의 산물로 전해진다.


이렇게 우연이든 필연이든 우리는 기다림 속에서 농익어 나온 그 맛에 열광한다. 또한 그 맛에 인간이 점점 더 도취하고 탐닉해 왔음을 홍어마니아가 되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고향에서 추억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