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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훌네의 첫 번째 위기

(3장ᆢ 팔색무지개/가족소설)

  상훌이가 초등생이 되기 7, 8년 전에 벌써 혁명정부에서 재너머 넓은 들판을 바둑판같이 정리하고

수리시설을 완비하는 공사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안고랑 골짜기 다랭이논 지척 까지도 부분적 양수시설을 만들고 있었다. 상훌네의 양지뜸 시냇가 닷 마지기 논과  남서쪽 건너편에 있었던  황토분이  많아 황해논이라 하던  서마지기도 극심한 한 발은 면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  황해논 서마지기 옥답은  상훌네와 그리 오랜 인연을 맺지 못하고 아쉬움을 남긴 채 이별해야만 했다.


그 시절까지만 해도 시골의 겨울철 농한기는 말 그대로 애나 어른이나 먹고 노는 시기였다. 동네 발치의 한적한 주막이나 점방에는 화투  마작 등 노름방이 차려졌고  남정네들이 모여들어 노름과 막걸리 술판이 몇 날며칠  계속되기 일쑤였다.


이는  어느 때부터인지 시골동네 청장년 가장들의 친목의 장 역할도 분명히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점점 도박장으로 변질되어 가사를 탕진하는 경우가 다반사로 발생했으니

상훌의 부친도 거기에 연루되어 곤욕을 치러야 했다.


아마도 상훌의 부친은 타 지역에서 이사를 온 처지라 그 시기 농촌에서 농사일의 품앗이등을 위해 친목도모가  절대로 중요할 수 도 있었다.

하지만 노름빚 청산을 위하여 외양간의 암소 한 마리와 문전옥답 한쪽을 날리는 상황에 까지 이르렀으니 상훌집안은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돌이켜 상훌이 더욱 안타깝게 생각되었던 점은 그 시기가 상훌네 집안 여러 형제들의 물질적 필요가 최대로 많았을 시기라는 점이다.


상훌은 어려서 보릿고개는 모르지만 그의 형과 누님들은 그것을 몸소 겪었을 시기였다. 그리고 진학 등과 관련, 주로 누님들에게 시련을 안겨주었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더구나 상훌의 부친은 유교적 관념이  강하여 평소에도 딸들의 진학에 관대하지 못한 태도를 보였다.

따라서 그 시절에는 부모의 가치관에 따라 자녀들 특히 딸들의 진로에 영향을 크게 미칠 수밖에 없었으리라.


부모의 입장에서 시골에서 농토가 조금 있거나 없는 경우 여러 자녀를 두고 사는 것은 그 압박감이 상당했을 것이 뻔하다.


상훌의 한 여성지인, 부친은 생활고와 함께 자녀들 교육이 어렵게 되자 결단을 내려 탄광취업을 위해  청양에서 보령으로 이사를 하였다고 한다.


그렇게 이사한 덕분에 그지인의 자매들 모두는 고등교육까지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단다.


 하지만 그 부친은 안타깝게도 탄부의 직업병인 진폐증으로 평생을 병원에서 식물인간으로 고생하는 신세가 되었으니 안타까운 일이었다.

말 그대로 부모의 살을 다내주어 자식을 기른 격이었다.


반면에 60년대 후반, 어떤 여성분은 학업성적이 우수한데도 그녀의 모친이 진학을 안 시키고 공장에서 돈 벌기를 강요했다. 그러자 독신녀이던 담임선생님이 가정방문으로 부모설득에 나섰다.


 형편상 뒷바라지가 안되면 담임선생님이 양녀로 들여 진학시키겠다고 한나절 이상, 부모를 설득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단다. 친권우선주의를 어쩔 수 없었지만  그 후  다른 방식으로 학업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한편 또 다른 여성지인은 60년대 말에 어려운 형편인데도 진학하여 교복만이라도 입고 싶어 노심초사하였다고 한다.


그때 그녀의 부친이 힘든 형편이었지만 겉보리 몇 말을 팔아  입학을 준비하라시며 교복 살 돈을 손에 쥐어 주었던  바로 그때의 부친을 회고하며 감회에 젖는 모습이었다.


이렇게 부모의 가치관이 자녀의 미래를 결정하는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론 그것이 절대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상훌은 인생을 살면서 너무 많은 인간승리들을 봐왔으니 다음의 문구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사람은 자신이 성장한 시대와 자라온 환경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러나 처한 상황을 초월하는 사람들이 있어 경이의 대상이 분명하다. "


(4 장 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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