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한상희 ㅇ자연인한스ㅇ
Nov 23. 2024
응답하라 1975
(가족소설 팔색무지개ㅡ 제8장)
ᆢ학교사무실에는 진공관흑백 TV가 놓여있고 교환수를 통하는 자석식 검은색 전화기가 사용되었다. ᆢ
상훌은 올해 초등4학년이다. 학교에서 돌아온 후 오후쯤엔 항상 할 일이 기다리고 있다. 외양간의 누런 암소를 끌고 풀 먹이러 나가는 일이다.
여름방학이 돼도 오후의 일상은 매한가지다.
그는 내키지는 않았지만 숙명처럼 받아들였다. 왜냐하면 상훌네집의 자산목록 1호이고 그의 부친이 가장 애지중지하는 가축이기 때문이다.
상흘은 간식을 준비한다. 간식이래야 텃밭 밭두렁에 심긴 단 수수 몇 토막이다. 튼실하게 자라나 단맛이 물씬 오른 단 수숫대 몇 토막을 손에 쥐었다. 그리고 마을 앞 넓은 농수로 제방뚝까지 소를 끌고 가 그곳에 자유롭게 풀어놓는다.
그리고 해가 뉘엿뉘엿 질 때까지 동네친구들과 물에서 미역도 감으며 질탕하게 노는 거다.
어떤 때는 뒷동산 잔디밭에 소를 풀어놓고 실컷 놀다가 저녁이 되어서야 소를 찾는다. 워낭소리에 귀를 쫑긋 기울이고 나서 겨우 소를 찾아 집으로 향하는 것이 여름철 초등생 상훌의 일상이다. 때로는
날씨라도 궂으면 소풀먹이는 일이
좀 더 힘들어진다. 친구들과 놀지 못하는 것은 물론 고삐줄을 움켜잡고 소가 풀을 뜯는 내내 지켜보며 저녁때까지 들판 한편을 서성대야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상훌은 성실한 우등생이다. 날마다 저녁을 먹고는 거의 책상 앞에 안자있다. 따라서 학교 과제만큼은 항상 충실을 기한다. 하계방학 동안 그는 준비할 것이 많다.
가을에 있을 자유교양 독후감대회, 과학기능대회, 멸공포스터 그리기 대회 등이 겹쳐있다.
상훌은 초등학교 4학년이지만
담임샘의 열정 때문에 학교생활이 즐겁다.
담임샘은 수업시작 몇 분 간을 매번 흥미 있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학년 내내 계속 이야기를 조금씩 들려줬으니 대단한 일이다. 이야기 출처는 주로 아라비안나이트, 이솝우화 그리고 구약성경 이야기 등이다. 그 사실을 상훌이 알아차린 것은 먼 훗날의 일이다.
학창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스승님이다. 그는 지역의 수재가 분명했다 60년대 당시에 사범학교를 나왔단다.
그는 상훌에게 방과 후에 독후감대회 준비를 지도하셨다.
여담시간에 그는 공부를 잘하면 주로 초등교사가 된다고 하였다.
그래서 상훌은 그 말에 반기를 들었다. 상훌 자신은 과학자가 될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그때 그 말이 씨가 되어 훗날 웃음 짓게 만든다.
스승님 세대인 5, 60년대는 먹고살기도 힘든 시기였다. 일반적으로 가난한 집 수재들은 학비가 무료인
2년제 사범학교에 모였다.
그리고 자연스레 초등교사가 되었다.
한편 사범학교에 가지 못한 좀 사는 집 자제들은 4년제 대학에 갔다. 학사졸업 후 중등교사가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중등교사도 힘들던 부잣집 자제들은 대학원을 진학했다. 훗날 석ㆍ박사가 되어 대학교수가 되고 지도층이 되었다. 참 웃픈 우리선배세대의 자화상이다.
물론 사범학교 출신자들 모두가 현실에 안주하진 않았다. 바늘구멍 같은 제도적 사닥다리를 거쳐 중등교사가 되고 교수가 된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이러한 공직 직업군 선호는 사회분화의 다양성이 떨어지던 50년 전 사회상이다. 오늘날 선진사회에서는 정보화사회 직업군이 시대를 리드한다.
1975년, 때는 바야흐로 고도성장기 시대다. 훗날 개발독제시기라 일컬어진다. 또한 반공의 시대다.
상훌도 방학숙제로써 멸공선언문을 한편 준비해야만 한다.
개학하면 학급대표로 애국조회시간에 공개발표를 할 수 있도록 정성스레 준비한다.
또한 독후감쓰기대회를 위하여 학교 도서실에서 빌려온 책들을 읽어야 한다. 동명성왕 전, 알프스소녀 하이디 그리고 그림 없는 그림책 등 안데르센전집들이다. 이때 읽은 책들은 상훌이 성년이 되어서도 뇌리에 각인된 스토리텔링으로 남게 된다.
간간이 소년중앙도 읽어야 한다. 객지에서 누님이 정성스래 매달 보내주는 두툼한 천연색 책이다. 이 또한 새까만 시골소년에게 신세계로 인도하듯 세상의 눈을 뜨게 해 준 월간잡지다. 그 속에 삽입된 우주공상만화가 나중에까지 시골아이의 우주적 풍부한 상상력을 한층 촉발시켰다.
개학첫날 담임샘은 액정전자시계를 자랑하셨다. 금액으로는 십만 원에 샀단다. 물론 할부였을 것이다. 그의 두 달 치 월급에 달하기 때문이다.
고도경제 성장기였지만 공직의 임금사정은 박하기 그지없던 시절이다. 당시 금산우주지구국 미국인 엔지니어 월급은 200만 원이 넘었다.
격세지감이 따로 없다. 요즘 동남아 개도국 국가들과 우리의 임금상황이 똑같이 재현된다.
상훌은 월급의 격차보다도 담임샘의 더 중요한 말이 오랜 여운을 남겼다. "전자 액정기술이 진화를 거듭하면 수십 년 후에 벽걸이 박막 TV가
나올 것이다."라는 부연의 말이었다. 상훌은 정확히 확인했다. 30년 후에 박막 TV가 실용화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학교사무실에는 진공관흑백 TV가 놓여있고 교환수를 통하는 자석식 시커먼 전화기가 사용되었다.
십여 리 밖 우체국, 면사무소 둥에 가야만 수세식화장실을 구경할 수 있었다.
4학년 때 상훌은 담임샘의 부탁으로 저축통장을 가지고 우체국에 간 적이 있다. 그곳에는 면사무소가 있고 초등학교도 있다. 면내에 네 개의 학교가 있었으나 상훌은 학교명이 낯설지 않았다. 자주 군내 각종대회들을 나가게 되어 그들 학교대표 또래들과 조우하곤 했기 때문이다. 상훌은 중학생이 되었을 때 그들 몇 명과 반가운 인사를 하게 된다.
이렇게 상훌은 인상적인 담임샘을 만나 초등학교 4학년 한해를 추억 쌓기를하며 보낸다.
ㅡ제 9장 계속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