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광촌 서사

보령 석탄박물관을 가다

보령 석탄박물관 앞에 도착했다. 맑은 날씨지만 북풍한설의 차가움이 얼굴을 스쳤다. 산골짜기 한켠에 드러난 탄광갱도의 입구 같은 정문이 보였다. 옛 폐광을 박물관으로 구현한 곳이다. 그녀는 로비에 성큼 들어섰다. 말끔한 여느 박물관 분위기와 다를 바 없었지만 지하에 들어왔다는 느낌의 후각신호는 역력했다.

이곳 박물관의 컨셉은 다소 단순하게 느껴졌다. 무연탄채굴의 시대적 기록관에 가까웠다. 그점에서 아쉬움이 남았다. 욕심을 내자면 그에 더하여 태곳적 석탄의 적나라한 형성과정을 현대적 디지털 기법으로 표현할 수도 있었을테고 아니면 채굴당시의 이곳 군상들의 몇 가지 구구절절한 스토리텔링 시연도 괜찮을 성싶었다.


현재는 석탄 채굴당시 사유의 공간 구현에 충실해 보였다. 또한 극한의 빈곤을 극복하던 시절, 탄광촌 삶의 현장을 재현에 놓는데 큰 비중을 둔 것 같다. 그 당시 사용했던 도구나 장비의 전시 그리고 광부들의 석탄 채굴방법과 갱도 안에서의 세세한 일상 등을 들여다볼 수 있는 점에서는 충분한 도움을 주었다.

여기에 처음 와서 둘러보는 순간마다 그녀는 이러한 표면적, 가시적 실체의 그 뒤안길을 응시하게 되었다. 그곳에 도사려있는 사람들의 생생한 체취가 묻어있는 광부들의 투쟁기가 어두운 먹구름처럼 그녀를 사로잡았다.

물론 그녀 부모세대의 모질었던 옛적 고난의 인생 서사들이지만

여기에 와서 보니 자신의 실제적인 체험인양 환영같이 뭉글뭉글 되살아나고 있었다.


인선의 부친은 오늘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새벽 다섯 시에 도시락 가방을 들고 싸리문을 나섰다. 광업소까지 가려면 고개를 두 개나 넘어 십리길을 걸어야 했다.

새벽녘 성주산에서 불어오는 골바람은 차가웠다. 하지만 이 길을 오르내린 지도 벌써 삼 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부여 외산에서 서마지기 다랭이 산답을 농사만 짓자니 여섯 식구 목구멍에 삼시세끼 겨우 풀칠하기도 버거웠다.

그런 처지에

줄줄이 두세 살 터울 자식들 상급학교 진학은 언감생심인지라 때마침 가장으로서 결단을 내린 결과였다.


가장으로서의 이사 결정과 광업소 근무는 어쨌든 가족들에겐 활기와 희망을 불어넣어 주었다. 그 덕분에 식구들 의식주해결은 물론 학비도 지원받아 두 딸이 중ㆍ고등학교에 진학도 하였다. 그는 요즘처럼 가족들이 모두 건강하고 딸들이 상급학교에 잘 다니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감을 느꼈다.


여고생인 맏딸 인선은 부친의 이런 결단을 두고두고 내심 고마워 하고 존경스러워했다. "차암 우리 아부지 대단하셔, 어떻게 그때, 그런 생각을 하셨는지 몰러. 그 동네 어른들은 고향 떠나면 큰일이라도 나버릴 듯이 고향에 붙박여 아등바등 살려하는디, 더구나 자식교육은 초등학교나 겨우 마쳐주고 부모도리 다 한 양 여름엔 농사 져서 겨우겨우 먹고살고 겨우내 노름하고 술타령 하고 한량질이 다반사 였는디 우리 아부진 전혀 달랐거든 "


그렇게 인선은 친구들에게 종종 아버지 자랑을 늘어놓곤 했다. 물론 집에서는 효녀로서 맏딸의 역할도 잘했다. 동생들을 돌보고 아버지가 퇴근하면 어깨와 팔다리를 주무러 드리고 건강조심을 매번 신신당부했다.

아버지의 안면기색이 예전 같지 않음을 내심 느꼈기 때문이다.

탄광일이 고되고 위험하고 건강을 위협하는 일이란 걸 어린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한 번은 인선의 모친이 광업소 일을 한 적이 있다. 선탄부에 여자인원이 부족해 며칠 작업을 한 것이다. 그녀 모친은 처음엔 손사래를 쳤던 일이다.


" 탄광일은 집안에서 남자 한 명이면 족하지 집엣사람까지 그 일을 시키려고 하셔 " 하고 아버지께 쏘아붙였다.

그때 맏딸 인선이 끼어들었다. 선탄작업은 탄광 밖에서 여자들이 주로 하는 일이고 이참에 노심초사하는

선탄부 여반장의 체면을 한 번만 세워 주시라고 중제를 잘하여 그녀의 모친도 사흘간 탄광일을 처음 해보게 됐다.


인선모친은 겨우 삼 일간 잡석과 이물질을 골라내는 선탄일을 하였는데도 그 후 며칠동안 목욕탕을 오갔다. 온몸의 피부에 탄가루가 달라붙어 완전히 빠지지 않는다는 거였다. 그 후 그놈의 탄가루가 피부에서는 다 떨어져 나간 듯한데

콧속 기관지에서는 일주일이 지나도 계속 검은 것이 나온다고 투덜댔다.

인선은 모친의 이 같은 과민반응에 실소를 보내면서도 갑자기 수년간 탄부생활을 하여 그 몸속이 만신창이가 되었을 아버지의 건강을 떠올리니 덜컥 겁이 났다.


어느 날 저녁 아버지가 퇴근하지 않았다. 늦게서야 아버지의 전화 연락을 받았다. 광업소에 사고가 났다는 것이다. 탄광촌 가족들은 가슴이 철렁할 일이다. 탄광촌은 골짜기에 엠블런스 소리라도 들릴라치면 가족들은 한순간 걱정에 휩싸이고 그 사이런 파동에 온 산천초목이 진동함을 느꼈다.


한 갱도의 중간지점에서 붕괴사고가 일어나 막장에 한 사람이 갇혔다는 것이다.

점심시간에 다른 동료들은 갱도밖으로 식사하러 나갔지만 매몰자는 갱도 안에서 식사를 하다가 사고를 당했단다.

다행히 공기주입 파이프는 작동되어 생존이 확인되었다.


구조작업은 며칠째 진행되는 중인데 아직도 구츨의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인선의 부친도 며칠째 구조팀에서 교대로 작업 중이다.

매몰자는 아직 생존으로 추정되지만 구조가 늦어질수록 생존을 장담할 수 없었다. 갱도중간의 단단한 암반층 붕괴가

구조 지연의 원인이란다.


구조전문팀의 브리핑은 생존자 구조의 골든타임을 열흘로 잡고 있었다. 다행히 현 사고지점의 갱도에서는 생존의 추가시간을

낙관하는 상태였다.

즉 생존조건인 공기 파이프가 통하고 소량의 지하수로 수분섭취가 가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고발생 십여 일이 넘어가자 전국적 언론의 관심이 모아지고 자연스레 구조작업이 독려되었다.

결국 16일 만에 매몰자는 극적으로 생존상태로 구출되었다. 탄광매몰 최장기록 생존자였다.

의료진은 그의 생존상태 구출을 분석했다. 다행히 공기가 통했고 수분섭취는 옷에 스며든 물을 빨아 먹었단다. 또한 염분섭취가 중요한데 공교롭게도 그날 도시락 반찬이 짠 무장아찌였고 생존자는 그것을 아껴서 조금씩 섭취했다고 한다.


인선의 부친은 매몰자 구출 이후 육적, 심적으로 나날이 쇠약해져만 갔다. 결국

그는 딸들의 성화로 병원을 가게 되었다.

진단결과 탄부의 고질적 직업병인 진폐증 3기를 진단 받았다. 더 이상 탄광일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이다. 더 안타까운 일은 목숨이 다할 때까지

입원생활을 해야 하는 상태가 되었다.


광업소 탄부들은 그 시절에도 소정의 복지대책이 시행되고 있었다. 자녀들 학자금이 나왔고 평생 동안 산재의료가 되었다. 따라서 당사자가 생존해 있는 한 가족들도 혜택을 그대로 누렸다.

인선의 모친은 온몸이 굳어가는 남편의 팔을 주무르며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 어쩌거나 살아 있어야만 돼유, 중학생 막내아들 대학 갈 때 까지라도유 "

인선은 병상의 아버지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어머니의 혼잣말이 야속하게 가슴을 후볐지만 자신도 딱히 할 말이 없었다. 그동안 아버지를 탄광막장이란 사지에 내몰며 그 결과로

지금까지 편하게 살아왔기 때문이다. 설마 자식이란 이유만으로 그동안 아버지의 살과 뼈를 다 파먹은 것인가. 그렇게 하여 자식인 나의 살이 돋아나고 뼈가 자라고 성장한 격이니 아버지의 몸은 빈껍데기가 되어 이렇게 화석처럼 점점더

굳어지며 누워 계신 것인가.


석탄 박물관의 검은색 입구가 아득히 멀어졌다.

성주산 골짜기에는 새하얀 함박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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