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안유물 이야기

고려화물선

ㅡ배는 더욱 떠밀렸다. 아뿔사! 해안암초에 얹히고 말았다. 썰물이다 .배의 좌현이 점점 기울기 시작했다.


태안해양유물 전시관에 왔다.

그는 태안 주민이 된 지 두 해가 되어갈 즈음에 이곳을 처음 찾았다.

서해의 거칠고 새하얀 파도가 끊임없이 냉기를 불어넣어 그는 연거푸 바바리코트의 목깃을 여민다. 여기는 예로부터 지형의 특성상 바다날씨가 사나운 곳으로 악명 높은 태안 안흥량이다.

해남의 울돌목, 강화의 손돌목, 옹진의 인당수와 더불어 바다의 4대 험지에 속한다.

태안반도의 돌출부 서쪽 최말단에 위치한 탓이다. 조수차가 최고점에 이르고 차령능선이 바다속으로 내려앉은 곳이라서 잡다한 암초가 산재한다. 안개 낀 날씨가 한 달 중 보름을 넘기는 곳으로 난파사고가 빈번해 한국의 버뮤다로 불린다.


하지만 고려 때이든 조선시대든 주요 연안해상 수송로의 거점이었다. 이곳을 통하지 않고서는 남쪽의 풍부한 산물이 대량으로 서울 쪽으로 결코 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물길이 잔잔한 안전한 내륙수로를 만들려는 끊임없는 노력의 흔적들이 남아있다. 즉 이곳 반도의 잘록한 부분을 물길로 연결하려던 옛날 오백여 년간 논의된 운하건설 계획이 있었다. 그것은 수십 차례 실행과 포기의 반복이 있었지만 끝내 성공하지 못했다. 다만 태안 굴포에 안타까운 미완의 운하 흔적만 남겨 놓았을 뿐이다.


왜 우리 조상들은 그런 대역사를 끝내 못해냈을까. '세상에는 불가사의 인조물들이 여러곳 있다. 암반을 뚫고 만든 고대 희랍의 코린토 운하도 있고 위대한 토목사업들이 얼마나 많은가 ' 하고 반문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속내에는 이유가 있었다.

희랍의 코린토는 그 땅이 태곳적부터 바닷속에서 퇴적된 무른 석회암지역이다. 하지만 우리의 땅은 다르다. 이 땅의 특성은 차돌같이 단단한 화강암층이다. 예전의 전근대적 기술로는 운하건설이 진즉 역부족이었다. 또한 정치이념도 한몫을 했다. 우리의 고대왕정에는 면면히 이어온 애민사상이 있었다. 대규모 백성의 노역동원을 지양하는 이유가 됐다.


그렇게 조상들은 숙명적으로 수천 년간 위험한 이곳 바다를 넘나들어야 했다. 난파사고 또한 계속되었다.


십여 년 전 이곳 인근 바닷속에서 수많은 도자기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팔백 년 전 고려시대 난파선에서 주로 나온 것들이다.

물론 난파선이 한두 척이 아니란다. 조선초기 세곡선도 상당수 있다고 한다. 발굴조사는 계속 진행 중이다.


유물전시관은 유명건축가가 설계한 듯 초현대식 건축물이다.

높직한 곳에서 서해를 등지고 동향으로 위치해 태안의 해안선이 한눈에 들어왔다. 아마도 다량의 유물들이 발굴된 이상 보존과 복원 그리고 연구를 위해 야심 차게 계획된 건축물 같았다.


널찍한 2층 로비에 들어서니 안내인이 그에게 관람동선을 알려준다. 영상과 IT 등을 활용한 전시기법이 다채롭다. 잘 복원 전시해 놓은 청자, 도자기 유물들, 목편 죽간표찰물, 그런 기록을 해설해 주는 그래픽 그리고 발굴 영상들을 둘러본다. 전시관 중앙부 1,2층이 합쳐진 중정에는 복원된 거대한 화물목선이 내려다 보인다. 쌀오백석과 도자기, 생필품을 싣고 가던 대형목선이다. 십여 미터에 달하는 우뚝 선 돛대가 이채롭다. 돛을 활짝 펼치고 당당하게 바다를 항행하는 모습을 상상한다. 그리고 선수에 자리하며 험난한 선채운항을 책임진 도사공을 떠올려본다.


고려시대 무신정권 시절이다. 대장군 이순영은 집사 미랑에게 당부를 한다. '오월 단오절에 대신들과 잔치를 벌이려 하니 준비하라' 명한다. 미랑은 조정세곡과는 별도로 나주수령에게 쌀 오백석과 부산품들을 보내라고 파발과 벽란도 행수에게 기별을 넣는다.

수일 후 기별을 받은 나주수령은 영산포 도사공 공선달에게 중선을 한 척 수배해 물품들을 삼월 전까지 준비하게 한다. 개경의 대장군에게 보낼 쌀 오백석과 부산품들을 구해놓고 도사공은 몇 날며칠 사공 격군들과 선적을 계속한다.

함평현과 나주목의 현미와 미곡 오백석을 선실중앙에 싣고 남은 공간에 죽산현에서 가져온 대두 소두 닷섬과 건홍합 한섬을 싣고 무안현의 젓갈통을 그리고 강진현의 청자매병 수십 개와 도기사발 수백 개를 대나무와 짚풀로 스무 개씩 갈무리하여 선수와 선미칸에 차곡차곡 나누어 쌓는다.

또한 선적 마지막 날 나주수령의 특별 명으로 육 척이나 되는 생물 상어를 구해와 내장을 제거하여 상자에 넣고 상자 빈 곳에 숯가루를 쟁여 넣어 싣는다.

옛날 생선 육류의 부패방지를 위해서는 건조와 염장 그리고 숯을 이용한 방부처리였다.


개경까지 순풍을 만나 모든 것이 순조롭다면 항해는 사나흘 걸릴 것이다. 그렇지만 바람 안개 등 날씨와 파도 조류문제가 괴롭힌다면 열흘을 넘길지 장담할 수 없었다.

도사공 공선달은 바다길잡이 영산포 행수의 남풍이 순하다는 말을 확인하고 들물에 맞춰 사공 격군 6명과 함께

삼월 초하루에 배를 띄운다.

바다는 잔잔하고 남풍이 순하여

칠산바다 법성포를 지나 하루 만에 고창 덕성창에 이르렀다. 아직은 식수가 충분하고 삼월의 남동풍이 좋으니 내친김에 도사공 공선달은 충청 원산포로 향한다.


우리의 고대 선박들은 서남해안의 얕은 바다와 갯벌에 유리하게 배밑이 평평한 평저선이었다.

그래서 먼바다 항해보다는 연안의 얕은 바다를 항해했다. 연안항해의 장단점은 있었다.

첫째, 장점은 배에 문제나 사고가 생기면 육지나 섬으로 탈출이 용이했다. 둘째, 단점은 배의 속도가 느리고 태안 안흥량처럼 암초가 많은 곳은 매우 취약했다.


원산포를 지난 도사공은 동남풍의 순풍에 안심하며 직접 태안 안흥량으로 향한다. 영산포를 떠난 지 이틀이 돼가는 시점이다. 저녁이 되어 남서풍이 분다. 조짐이 안 좋다. 파도가 점점 험해진다. 격군들에게 돛을 조금씩 내리게 한다. 배가 자꾸 육지 쪽으로 밀려난다. 어둠이 내리자 배는 더욱 밀려 해안암초에 얹히고 말았다. 배가 기울기 시작한다. 썰물이다. 이렇게 개경으로 향하던 도사공 공선달의 화물선은

곡식과 생필품을 가득 실은 채 암초에 난파된다.


도사공과 육 명의 사공 격군들은 구사일생으로 인근 마도섬에 맨몸으로 상륙한다.

도사공 공선달은 후회막급이다.

원산포에 들러 바다길잡이 그곳 행수의 조언을 듣지 않고 당장의 순풍에 자만하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난파된 대형목선은 기울어 바닷속 갯벌에 묻혔다. 그리고 팔백 년을 잠자다가 타임캡슐처럼 현세에 깨어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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