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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인 Jul 19. 2021

각자의 장소에 갇힌 시간

누구도 어디도 안전하지 않은 세상에서

서서히 다가오던 재난이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2020년 1월에 발생한 첫 확진자는 우한에서 여행 온 중국 사람이었고, 치료받은 후 무사히 고국으로 돌아갔다. 1월 24일에 두 번째로 한국인 확진자가 나올 무렵, 외교부는 우한이 속한 후베이성 전역에 대한 철수 권고 경보를 내렸다. 우한에서 전세기로 도착한 한국 사람들은 2주간 격리 기간을 거친 후에야 가족을 만나러 집으로 갈 수 있었다.



지크가 상하이로 돌아갔다.

테헤란으로 가는 항공편이 취소되고 전 세계가 우한 봉쇄에 이어 중국에서 일어나는 일을 두려워하며 지켜보던 2020년 2월 초였다. 지크는 그곳에 도착해서 잘 지내고 있었던 걸까. 비교적 안전해 보이는 상하이에서 조심하며 무사히 지내는 듯했지만, 카톡 메시지로 다 짐작할 수는 없었다.

2020년 1월 28일 우한(출처: 腾讯网). 지크가 찾아서 보내준 사진.


광활한 중국 면적을 떠올려보면 서울과 제주 거리의 약 두 배, 800km 정도 떨어진 우한과 상하이 사이의 거리는 가까운 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완벽하게 봉쇄된 우한에서는 지역 거주자뿐 아니라 잠시 방문한 사람까지 900만 명에 이르는 이들이 한 달 반이 넘는 기간 동안 외부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한 채 갇혀 지냈다고 한다. 전염병에 걸려 제대로 치료받을 수 있을지 두려워하며 사랑하는 이들이 죽어갈 때 곁을 제대로 지키지도 못했을 상황, 아무런 준비 없이 생활 터전에서 강제로 분리되어 지내야 했던 삶이 어땠을지 짐작도 할 수 없다. 모두가 안타깝게 우한을 지켜보며 가까운 곳에선 부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길 바랬을 것이다.


가장 나쁜 소식은 코앞에 닥칠 때까지도 알고 싶지 않은 법이다. 그때까지도 내가 사는 도시가 같은 재난에 휩쓸릴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세상이 멈췄던 사흘간(3 Days that Stopped the World) | Al Jazeera Investigations


갑자기 들이닥친 재난시대

 

대구는 내가 태어나고 자란 도시다. 엄마는 당시로는 늦은 나이에, 이후 코로나 위기 대응으로 알려지게 될 동산의료원에서 첫 아이를 낳았다. 늦게 낳은 자식이 너무 아깝다며 멀리 보내기도 싫어했던 엄마의 바람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나는 고향에서 산다는 생각을 결코 해본 적이 없다. 넓은 세상의 가보지 못한 곳을 돌아다니다 가끔씩만 집에 오고 싶었다. 외국 생활이 길어지던 무렵엔 한국 나이로 예순이 넘으면 어쩌면 돌아올 수도 있겠다고 막연히 생각하기도 했다.

 

2016년 겨울의 첫 번째 이란 여행에서 돌아온 후에도, 나는 계속 떠날 궁리를 하고 있었다. 우선 이란에서 더 오래 지내보기로 했다. 수도인 테헤란에 근거지를 두고 시간이 날 때마다 그 나라의 곳곳을 다녀보겠다는 계획이었다.

2017년 초에는 첫 여행에서 도움을 준 아자르의 집에서 한 달간 머무르기도 했다. 예상했던 대로 테헤란에서의 삶은 서울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지하철로 어디든 다닐 수 있었고, 호스트인 아자르가 만들어주는 맛있는 이란 요리를 먹고 이웃집에 초대받아 놀러 가고 유학생활을 함께했던 이란 친구도 다시 만나면서, 이 정도면 여기서 살아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계획을 그리며 돌아와 부모님 집에 잠시 머물던 중, 여느 때와 같이 아버지와 함께 엄마를 모시고 병원으로 가는 날 아침이었다. 부엌에서 몸을 돌려보니, 투석하러 가기 전 침대에 앉아 요양보호사님의 도움을 받으며 식사를 하던 엄마의 오른쪽 입술이 조금씩 아래로 처지며 숟가락을 드는 속도가 차츰 느려지고 있었다.


그날 이후 엄마는 집에 돌아올 만큼 회복하지 못한 채 3개월마다 두 군데 병원을 번갈아 옮겨가며 지내고 있다. 언젠가 고향으로 돌아와야 할지도 모른다고 막연히 생각했던 시간이 그렇게 갑자기 당겨졌다. 여행을 주로 하며 가끔 부모님을 만나러 돌아오는 게 아니라, 고향에 머물며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하고 시간을 내서 일 년에 한두 번만 먼 곳으로 다녀오는 삶이 시작된 것이다.

 

병원생활이 길어지면 짐도 많아진다. 휠체어를 이용하면 여러 번에 걸쳐 쉽게 옮길 수 있다.


중국에서 들려오는 소식이 여전히 심상치 않았지만 내가 사는 곳에선 별일 없는 날들이 지나가던 2020년 2월 말. 여느 때처럼 엄마가 계신 대구의료원에 들렀다. 마침 병실 TV에서 31번 환자의 동선을 보도하는 긴박한 속보가 이어지고 있었다. 낯익은 동네 한방병원, 근처 호텔의 예식장, 식당 등이 차례로 화면을 스쳐간다.


그 무렵 의료원의 일부 병동에는 이미 코로나 환자들이 입원 중이었다. 거동이 자유롭고 돌아갈 곳이 있는 환자들은 코로나 환자와 같은 병원에 머무는 위험을 피해 집으로 돌아갔거나, 다른 병원을 알아본다고 했다. 거동을 할 수 없거나, 공공병원이 아닌 다른 병원에서는 받아주기 힘든 상태이거나, 의료원의 환경이 집보다 더 나은 환자들만 그곳에 남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병원을 찾아 헤매다

 

다음날 아침, 지역 TV 뉴스 채널을 켜자 대구 시장이 급박한 코로나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그날부터 대구의료원의 모든 병동을 비워 코로나 환자 전용으로 사용하겠다고 발표했다.


급히 그 길로 병원으로 향했다. 의사와 간호사를 비롯한 거의 모든 직원들은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듯했다. 몇 시간 전 의료원 원장이 병동 곳곳을 둘러보고 갔다고 한다. 그때 병동 수간호사가 갑자기 병실로 들어와 지금 당장 모든 환자는 퇴원하거나 다른 병원을 알아봐야 한다는 공문이 내려왔다고 전했다. 항의해봤지만, 어쩔 수 없다는 대답뿐이다. 급히 투석실로 뛰어내려 갔다. 아무 소식도 못 들은 건 마찬가지였다.


중한 상태의 투석환자가 입원할 수 있는 병원은 평소에도 찾기 힘들다. 늘 오가던 다른 공공병원인 보훈병원은 며칠 전 원내 확진자 발생으로 신규 입원환자를 받을 수 없는 상태였다. 민간 병원에서는 대구의료원에서 전원하는 환자를 거의 받아주지 않던 때다. 그날 안으로 대구와 인근 지역의 병원을 직접 돌아다니며 찾아보기로 했다. 주치의 소견서를 받기 위해 의료원의 외래 진료실 앞에서 기다리는 동안, 바로 뒤 의자에 길게 누운 남자가 절대로 여기서 나갈 수 없다며 울부짖고 있었다.

 

‘소개령’ 떨어진 대구의료원의 하루, “나가도 우리 엄만 죽고, 여기서도 죽는다”
  
저녁 무렵에야 평소 오가며 인사하던 의료원 직원의 도움으로 급하게 병원을 옮길 수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받아준 게 감사했지만, 그곳은 움직일 수 없는 환자를 침상에 눕힌 채 투석실까지 이동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았다. 며칠간은 병원에서 이동을 도와줄 수 있지만 더는 곤란하다고 했다.


대구의료원을 나오기 전 투석실에서 받은 병원 목록을 다시 살펴보며, 공간이 여유로운 시 외곽의 요양 병원에 연락했다. 의료원에 입원했던 환자여서 받아주기 힘들다는 답을 들었을 때, 눈앞이 캄캄해졌다. 얼마 전 구급차를 타고 떠돌다 심정지로 사망한 청도 대남병원 환자가 떠올랐다. 거듭 전화를 하며 간청했고, 며칠 후 요양병원의 일인실에 입원할 수 있다는 연락이 왔다.

 

청도 대남병원→부산 이송 '코로나19' 확진 54세 여성 환자 사망

 

옮겨간 요양병원에서는 입원 당일을 제외하고 면회가 전면 금지되었다. 엄마를 보살펴주는 간병사님과 통화하며 가끔 물품을 전해주러 병원 문 앞까지만 갈 수 있었다.

집을 나와 도시고속도로를 타고 병원으로 가는 길에서 보이는 텅 빈 도시가 낯설고 무서웠다. 분명히 사람들이 있을 텐데, 다들 어디에 숨어 있었던 걸까.


몸을 숨길 곳이 있는 사람들은 그곳에 갇혔고,
 그렇지 못한 이들은 갈 곳을 잃었다.

 

예전처럼 병원에 자주 면회를 가지도 못하고, 집 밖으로도 나가지 못하는 나날이 계속됐다. 창 밖에서는 하루 종일 구급차 사이렌 소리만 요란했다.

대구를 봉쇄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얼마  서울로 발령이  동생은 회사에서 고향에 가지 못하도록 자주 전화를 걸어 확인한다고 했다.

 

“대구 봉쇄', 우한처럼 지역봉쇄 한다는 의미 아니다”

2020년 2월 20일 오후 대구의 중심, 국채보상로(출처: 대구매일신문 김영진 기자)


벌써 일주일 넘게 집안에서만 숨죽이며 지냈다. 그러다 갑갑함을 참지 못하고 어렵게 구한  마스크 안에 필터를 끼워 넣고 집에서 시내 쪽으로 걸어가 보기로 했다. 지나는 차도 거의 없는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는 타인을  경계하는 이상한 풍경을 지나, 신천을 넘어가는 다리를 건넜다. 날씨는 흐리고 거리는 적막한데 상점 문은 전부 닫혔다. 오래된 중국집의 닫힌 출입구 앞에 마스크도 없이 앉아 있는 사람이 멀리 보인다. 의료원을 떠나던 , 의자에서 누워있다 바닥으로 내려와 소리치던  사람은  곳을 찾았을까.


대구 코로나 19 위기 당시 서문 시장 방역 작업 모습(출처: The Guardian, Photograph: Lim Hwa-young/AP)


병상에 누운 가족을 지켜야 하는 지금, 내가 나고 자란 이 도시가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곳이 되었다. 얼마 전 외신 뉴스의 사진에는 텅 빈 서문 시장 골목에서 방역요원들이 하얀색 방호복을 입고 소독하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평소 같으면 시장까지 충분히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였지만, 지금은 거기까지 갈 용기가 없다. 행여 가까이 오는 누군가를 마주칠까 두려워, 숨쉬기 어려운 두꺼운 천 마스크를 다시 여민 후 서둘러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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