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곳에서 나를 다시 고르는 법

두번째 탐색기

by 똥강아지

여기 와서 제일 먼저 흔들린 건 ‘직업이 나였던 시간’이었다. 한국에선 명함이 곧 소개였는데, 이곳에선 명함이 없으면 목소리가 떨렸다. 교사, 간호사, 회계사, MD, 디자이너, 개발자… 우리 모두 한국에서의 역할을 가방에 차곡차곡 넣어 왔지만, 입국 심사대를 지나면서 한 번 접힌 느낌. 접힌 자국이 오래 간다.


아침이면 카톡방이 울린다. 독일 어학원, 골프 레슨 정보, 테니스 코트 예약, 학부모회 일정. 누군가는 온라인 대학원을 시작했고, 누군가는 현지 취업 공고를 번역해 본다. 어떤 엄마는 “나를 돌아볼 기회”라고 말하고, 또 어떤 엄마는 “지금은 아이 먼저”라고 낮춘다. 같은 문장을 다른 톤으로. 우리의 속도는 각자 다르다.


입독 초반에는 행정과 마음이 동시에 덜컥거린다. 약속을 잡아도 외로움이 앞서고, 우편으로 온 수많은 서류들을 들고 번역하고 처리하기 바쁘다. 반년정도 지나면 긴장감이 반 톤 내려간다. 버스 노선을 외우고, 자주 가는 시장의 동선이 생긴다. 1년이 되면 대화의 주제가 바뀐다. 문제 대신 취향. 어느 빵집이 더 고소한가, 어느 수영장 물이 덜 차가운가, 어느 선생님이 아이를 더 오래 바라봐 주는가.


관계의 결도 다르다. 한국에서 만난 엄마들은 정보가 촘촘히 얽혔고, 도움과 간섭의 경계가 때로 흐렸다. 여기선 단순하지만 아무도 굳이 끌어주지 않는다. 먼저 손을 흔들어야 손이 온다. 그래서 피곤한 날엔 집으로 숨어들고, 힘이 조금 남는 날엔 커피 한 잔을 들고 걸어 나간다. “오늘의 대화는 이 한 잔이면 충분해요.” 내 손에 든 머그컵이 내 경계선이 된다.


어학원에서는 나이와 국적이 섞인다. 강의실의 공기는 의외로 다정하다. 발음이 틀어져도 웃음이 먼저 나온다.느린 속도로 천천히 나아가 본다. 골프장에서 나는 내 스윙보다 내 리듬을 배운다. 테니스 코트에서는 말보다 공이 먼저 오간다. 학부모회에서는 각자 다른 억양의 “제가 해 볼게요”가 의외로 큰 용기다. 대학원 페이지를 열었다 닫았다, 다시 연다. ‘지금의 나는 무엇으로 자랄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탭에 북마크로 남는다.


현지 취업은 쉽지 않다. 언어의 두께, 경력의 환산, 비자의 문구. 그러나 전혀 불가능하진 않다. 누군가는 회사의 유럽 지사로,어떤 엄마는 한국 본사 일을 원격으로 이어 간다. 잔기스가 생겨도 달리는 차가 결국 길을 기억하듯, 내 이력도 새로운 길을 조금씩 탐색한다. 중요한 건, 조급함이 핸들을 잡지 못하게 하는 것.


사람 사이의 긴장도 입독 시기에 따라 다르다. 새로 온 사람의 질문은 많고, 오래 산 사람의 조언은 빠르다. 때로는 그 빠름이 날카롭다. 그럴 때 마음속으로 거리를 잡는다. “내가 살 속도는 내가 정한다.” 가끔은 정보가 늦게 와도 괜찮다. 대신 내 생활을 정확히 적는다. 오늘 배운 단어 세 개, 오늘 걸은 길, 오늘의 작은 실수. 기록은 느린 사람의 무기다.


나를 구해 준 건 거창한 결심이 아니라 앵커였다. 하루의 아무 데나 꽂아 두는 작은 고정점 세 가지. 아침엔 배움 앵커—어제 들었던 표현 한 줄을 공책에 옮겨 적는다. 오후엔 몸 앵커—걷기든 벽치기 테니스든 숨이 고르는 만큼만 움직인다. 밤엔 기록 앵커—오늘의 장면 하나를 단어 세 개로 남긴다. 숫자도 성과도 강박으로 두지 않는다. 비가 오면 공책만, 바람이 세면 걷기만, 마음이 붕 뜨면 기록만. 세 앵커 중 하나만 붙들어도 하루는 기울지 않았다. 빈칸은 허락하고, 다음 날에 가볍게 이어 붙인다. 지속은 도식이 아니라 ‘붙잡을 손잡이’에 가까웠다. 그 손잡이 덕분에 나는 나를 흘려보내지 않았다.


나는 한국의 나를 사랑하고, 지금의 나도 사랑하려고 애쓴다. 명함을 꺼내지 않아도 소개할 수 있는 문장을 천천히 만든다. “나는 읽고, 배우고, 더 찾고 싶은 사람입니다.” 그 문장에 직함은 없어도 온기가 있다. 어학원 친구와 웃고, 테니스 코트에서 땀을 흘리고, 학부모회에서 한 번 손을 들고, 대학원 페이지를 또 한 번 열어 보고, 현지 채용 공고의 문장을 다시 번역한다. 그렇게 하루를 모으면, 직업 대신 리듬이 생긴다. 리듬이 생기면, 다시 직업을 고를 힘이 온다.


다음 집을 구할 때도, 다음 계획을 세울 때도, 나는 오늘의 이 문장을 먼저 떠올릴 것이다. 서두르지 말자. 대신, 매일 나를 위한 시간을 지키자. 그리고 사람들에게 너무 오래 기대지 말자. 가볍게 기대고, 스스로 선 다음, 다시 기대자. 이렇게 서는 법을 배우는 중이다. 낯선 도시가 조금 덜 낯설어지는 속도는, 생각보다 내 안에서 결정된다는 걸, 이제는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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