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배운 걸 처음으로 후회한 날
나에게는 2개의 이름이 있다. 엄마아빠가 지어주신 한국이름 ‘오은지’, 그리고 내가 나에게 지어준 이름 ‘아밀리’가 있다. 영어이름을 하나 짓고 싶었는데 드라마 보다가 아밀리라는 주인공이 이뻐서 따왔다. (그런데 아밀리라는 이름은 나중에 알고 보니 불어였다.) 외국 친구들을 사귈 때 난 영어 이름이 필요했다. ‘은지’라는 이름은 알려줘도 외국인들은 엔쥐, 윤쥐, 유진 등 엉터리로 발음한다던가 아니면 그냥 잊어버린다. 매번 발음 고쳐주다가 짜증 나서 영어이름을 하나 만들어버렸다. 그리고 그 뒤로 나는 10년 넘게 오은지와 아밀리로 살아오고 있다.
난 어릴 때부터 외국이 좋았다. 정확히 말하면 티비에 나오는 영어 쓰는 키 크고 눈 파란 외국인들이 되게 멋있어 보였다. 대학교 들어가자마자 한 일은 여기저기 다니며 영어 하는 외국인 친구를 사귀고 다닌 것이었다. 홍대랑 강남에 언어교환 모임에 줄기차게 나갔었다. 호주에 워킹홀리데이도 1년 갔다 오고 나니 어느덧 영어가 익숙해져 2개 국어 쓰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디자이너 프리랜서라 영어가 필요한 일은 1도 없지만 항상 외국인 친구들을 자꾸 사귀다 보니 그렇게 됐다. 그래, 나도 가끔 내가 신기하다.
왜 그렇게 외국인이 좋냐는 질문을 종종 들었다. 정확히 말하면, 난 외국인이라 할 수 있는 대화의 주제를 좋아하는 것 같다. 사람마다 다르지만 한국에서 신경 쓰는 직업, 성별, 무엇보다 나이에 대한 편견이 없어지는 그 기분이 좋다. 내가 ‘30살이 넘었으니’ 슬슬 결혼하고 정착해야겠다고 말하면 외국인들은 파란 눈으로 아리송한 표정을 짓곤 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나도 깨닫곤 했다. 아 내가 나이에 신경을 쓰고 살고 있구나? 내가 스스로 가스라이팅 하고 있었네? 나름 자유롭게 살고 있다 생각했지만 역시 한국 땅의 정기를 받으며 살다 보니 어쩔 수 없나 보다. 그래서 외국 친구들과의 대화는 일종의 환기구 같은 거다.
그런데, 살면서 처음으로 영어 배운 걸 후회하는 날이 찾아왔다. 정확히 말하면 남들 사는 대로 비슷하게 살 것이지 외국인이나 만나고 다니고 철들지 않은 나 자신을 후회하는 날이었다. 3년 가까이 지지고 볶고 하며 만났던 외국인 남자친구와 파혼을 한 그날. 난 내 삶을 후회해 버렸다. 살면서 잘한 짓이 없는 사람같이 느껴졌다. 나라면 밥 대신 빵을 먹고, 하얗고 까만 사람들 사이에서 매일이 신선하다 느끼며, 된장찌개 한 그릇에 2만 원 하고 반찬값은 따로 받는 나라에서 잘 살 줄 알았는데… 이런 상상이 지난밤 꿈처럼 사라져 버리고 나자, 난 진심으로 후회했다. 송충이로 태어났으면 솔잎이나 먹으며 살 것이지, 쓸데없이 외국어나 배우고 싸돌아다니던 내 자신이 너무나 싫어졌다.
이제라도 철이 들어야지. 이제 그만 먼 나라에서 온 사람들은 만나지 말아야겠다 마음먹던 찰나, 띠링! 문자가 왔다. 핸드폰을 보니 한국에서 사업을 하는 터키 아저씨 아케의 문자였다.
[은지, 9월 말에 터키 올 생각 없어? 나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가 있을 건데 터키 구경시켜 줄게!]
이건 대체 무슨 타이밍인가. 철들겠다 다짐한 딱 이때 나보고 해외여행을 오라고? 기가 찼다. ‘미안하지만 어려울 것 같아’라고 답장을 보내려 했는데, 띠링! 두 번째 문자가 왔다.
[내 한국 친구 2명도 올 거고 숙소랑 비행기는 내가 다 예약해 줄게. 9월 10일부터 17일까지 같이 여행하자!]
거의 몸만 오라는 얘기잖아? 터키에 대한 관심이 아예 없던 나였지만 아케 아저씨의 제안에 눈이 동그래졌다. 내가 마지막으로 해외여행을 해본 게 언제더라… (몇 달 전 캐나다로 전 남자 친구 부모님을 뵈러 갔다가 문전박대당한 건 포함하고 싶지 않았다.) 코로나와 사업과 결혼 문제로 정말 맘 편하게 떠나본 게 언제였는지 까마득했다. 고객 한 명이라도 더 받아오고, 곧 결혼해야 하니 돈도 모아야겠다 하며 시간과 마음을 차곡차곡 닫아왔다. 그렇게 살아야 잘 사는 거라 생각했던 것 같다. 참 안 쉬고 열심히 달리기만 해 왔다.
’여행을 다시 한번 도전해 볼까?‘
이 생각을 하자 여행비는 얼마나 들지? 여행하는 동안 일이 끊기면 어떻게 하지? 터키에서 영어는 통하나? 아케랑 여행하다가 맘 틀어지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순식간에 피어올랐다. 그런데 그와 함께 가슴 한구석이 시원하게 뻥 뚫리는 기분이 들었다. 잠시나마 다 뒤로하고 고민을 접어두고 생각을 해보니 탈출하는 기분이랄까(?) 어깨 위에 무겁게 눌려있던 어른의 삶의 무게가 짧게나마 없다는 상상을 하자 미간이 넓어지는 느낌이었다. 무엇보다 새로운 음식과 언어, 사람들도 가득할 지구 반대편 어딘가로 갈 생각을 하니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이럴 수가. 난 철들기는 그른 걸까? 여행 가면 안 될 이유는 백가지도 넘는다. 정신 차려!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휘저었지만 쿵쾅거리는 심장소리가 점점 크게 울렸다. 머릿털 끝까지 피가 도는 기분이 들었다. 정말 오랜만에, 언제가 마지막이었는지 기억이 안나는 설렘이 온몸에 차올랐다. 그러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나는 송충이가 아닌, 아직 뭐가 될지 모르는 방황하고 탐험하는 그냥 한 명의 사람이 아닐까. 왜 이렇게 생각을 못했었지.
마음을 가다듬고, 썼던 답장을 지웠다. 그리고 없는 배짱을 짜내서 아케 아저씨에게 다시 문자를 보냈다.
[초대해 줘서 고마워. 터키에서 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