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우체국

by 따심토

12월에 찬 공기가 창문틈으로 스며들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단순 사건들이 아니야."

역사 선생님은 분필을 쥔 손으로 칠판을 톡톡 두드렸다.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마음을 기억하고 이해해야 하는 거야."

그 말이 유독 예준의 귀에 맴돌았다.

겨울은 언제나 낯설었다.

늘 반복되는 계절인데도, 매번 처음 겪는 것처럼 어딘가 허전했다. 예준은 두 손을 패딩 주머니에 넣고 천천히 교문을 나섰다. 차가운 공기에 숨을 내쉴 때마다 하얀 입김이 흩어졌다.

예준은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그때는 아무 걱정도 없었는데…'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바라보며 예준은 크게 한숨을 쉬었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가 그의 뒤통수를 툭 치며 말했다. "야, 강예준! 또 한숨이야?"

하린이었다. 웃음이 많고, 늘 긍정적인 하린. 예준과 대비되는 긍정적인 소녀였다.

"하린아, 솔직히 미래가 무섭지 않아? 졸업하고 나서 뭘 해야 할지 모르잖아." 하린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손에 들고 있던 붕어빵 하나를 건넸다.

"예준아, 원효대사 해골물 이야기 알지?"

"밤에 목이 마른 원효대사가 고인 물을 마셨다가, 아침에 일어나서 그게 해골에 고인 물이란 걸 알고 깨달음을 얻었다는 이야기 말이지."

"맞아. 일체유심조, 결국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는 거야. 그러니 너 자신을 믿어." 예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사학과에 가서 역사를 공부할 거야."

"역사? 왜?"

하린은 멀리 하늘을 바라보았다.

"과거를 통해 현재를 더 자세히 볼 수 있잖아. 그리고 미래 방향도… 결국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니까. 그리고 나의 오랜 꿈이기도 하고."

예준은 잠잠히 그녀의 말을 들었다. '꿈이 있다는 것은 대단하구나…' 하린이 준 붕어빵을 먹었지만, 오늘따라 어쩐지 쓰게 느껴졌다.

“아 맞다. 예준아, 원효대사 하니까 생각났는데 원효대사는 일심사상과 화쟁사상을 주장한 불교의 대중화에 힘쓴 인물이야. 그리고 의상이라는 스님은 화엄사상을 주장했는데...” 하린은 역사이야기만 나오면 말을 멈출 줄 몰랐다. “하린아 나 급한 일이 있어서 먼저 갈게.” 예준은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하여간 이 역사덕후’ 하린과 헤어진 뒤 예준은 길을 계속 길을 걸으며 하린과의 대화를 생각했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 골목길을 돌아서던 그때, 탁! 예준의 어깨에 무엇인가 부딪혔다.

"すみません!(죄송합니다!)" 앞을 보니 한 소녀가 뛰어가고 있었다. 예준은 조심스럽게 일어나 그녀가 떨어뜨린 파란색 편지봉투를 집었다. 구름 모양 장식이 붙어 있어 신비로운 느낌을 주었다. 그 순간 바람이 불었다. 옷깃을 잡아당기는 바람. 마치 누군가 “따라와.”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바람은 곧 길을 만들었다. 전봇대로, 좁은 골목으로, 어둑하고 낡은 간판 아래로. 그리고 마침내 한 건물 앞에서 멈췄다. 건물에 작은 간판에는 <breeze post>라고 흐릿하게 적혀있었다. 문을 열자 은은한 종소리가 울렸다. 안은 오래된 서점 같았다. 천장에는 수백 장의 편지가 실에 매달려 있었고, 바람이 스칠 때마다 조용히 흔들렸다. 주위를 둘러보니 그곳에서 예준은 아까 자신과 부딪힌 소녀를 발견했다. 소녀는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쓰고 있었다. 흰 저고리에 검은 치마, 단정한 댕기 머리에 앳된 광대. 그리고 어딘가 익숙한 인상이었다. 예준은 조심스럽게 소녀에게 다가가 말했다.

“이거… 주웠는데...” 그 뒤 예준은 파란 봉투를 내밀었다. “혹시, 읽으셨나요?”

“아, 아니 그냥 가져왔어.” 소녀는 잠시 경계하듯 바라보다가, 편지를 가슴에 끌어안았다. 그 순간, 뒤에서 한 남자가 나타났다. 회색 목도리를 두르고, 네모난 안경에 잔잔한 미소를 띤 그는 말했다. “어서 오세요. 새로운 고객이군요. 이 편지봉투는 제 것입니다.” 소녀는 끌어안고 있는 편지를 남자에게 건넸다. "혹시… 누구세요?"

“저는 이 우체국을 관리하는 점장입니다. 누구에게나 마음속에 묻어둔 말이 있습니다. 끝내 전하지 못한 이름, 끝내 듣지 못한 대답… 하지만 사라지지 그 말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아요. 모두 바람을 통해 이곳으로 오죠.” 예준은 순간 의아해했다. “혹시 여기 온 이유가 어떻게 되죠?” “그게 솔직히 말하면 바람이 여기로 안내해서 오게 되었는데...” 자신을 점장이라 소개한 남자는 활짝 웃었다. “드디어 제비바람이... 혹시 우체국 일 좀 도와줄 수 있을까요?” 그날 이후, 예준은 학교가 끝나면 이곳에 와서 점장의 일을 돕게 되었다. 우체국에는 전하지 못한 수많은 편지들이 있었고, 예준의 일은 그 편지들을 찾아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특별한 점이 있다면 그 편지의 내용은 바람을 타고 수취인의 마음에 전달된다는 것이다. 어린 딸에게 전하지 못한 엄마의 편지. 연인에게 전하지 못한 어떤 남자의 편지. 괴로움에 울부짖은 한 소년의 편지. 여러 편지를 수취인에게 전달하는 과정에서 예준은 위로를 받기도 하고, 자신의 상처를 받아들이는 사람으로 성장을 했다. 처음 예준을 경계하던 소녀도 며칠, 몇 주가 지나자 조금씩 마음을 열었다. 어느 날, 소녀가 물었다. "제 이름은 최선미예요. 오빠 이름은 뭐예요?"

"강예준." 선미는 공책을 펼쳐 보여주었다. 공책 안에는 선미가 쓴 다양한 글이 적혀있었다. 그리고 공책 표지에 일본어로 쓰인 한 단어가 눈에 띄었다. ゆめ (꿈) “오빠, 저… 작가가 되고 싶어요.” 선미는 부끄러운 듯 볼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예준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사실 그의 마음속에도 한때 작가의 꿈이 있었지만, 부모님의 반대, 입시 실패, 주변의 사람들의 평가 때문에 스스로 접어둔 것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글은 예준에게 있어서는 꿈은 갈라진 유리병과 같았다. “오빠는 꿈 없어요?”

“있었지. 하지만 지금은 없어. 선미는 고개를 저었다. "꿈이라는 건 누구에게나 있어요. 먹고 자는 것조차 누군가에겐 꿈이죠. 자신이 좋다고 느끼는 게 바로 꿈 아닐까요? 좋은 글도 마찬가지예요. 단 한 사람이라도 비록 그게 자기 자신이라도 좋다고 생각하면 그 글은 충분히 ㅇ완성도 있는 좋은 글이에요.” 예준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그 말이, 오랜 시간 묻어두었던 예준의 마음에 작은 불씨를 지피는 것 같았다. 선미는 아직 도서관에 가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부모님께서 일찍 돌아가시고, 남동생을 제가 챙겨야 했거든요. 그래서 돈을 벌기 위해 일만 해서 친구가 논 적도 없고, 도서관에 가본 적도 없어요.” 예준은 잠깐 생각을 하다가 웃으며 선미의 손을 잡고 도서관으로 달렸다. 햇빛이 스며드는 도서관, 선미는 한 권 한 권 책을 쓰다듬으며 눈을 반짝였다. 선미와 예준은 책에 관한 이야기도 나누고, 자신들이 쓴 글에 대해 이야기하며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냈다. 선미가 울먹이며 말했다. “오늘 하루가 제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에요.” 예준은 말없이 선미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 날이후 우체국에는 선미가 보이지 않았다. 어느 날 점장이 예준에게 편지 봉투를 건네며 말했다. “이 편지는 네가 꼭 전해주면 좋을 것 같은데.” 파란 봉투. 예준이 이 우체국에 오기 전 주운 파란 편지 봉투였다. 수취인 최성수 00 마을 주소에는 처음 보는 마을 이름이 적혀있었다. 예준은 고민했다. 어떻게 가야 하지?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예준은 계속 고민했다. 학교에서도 예준은 편지를 어떻게 전달해야 할지 생각하고 있는데 그때 하린이 말했다. “무슨 고민을 그렇게 하냐?” 예준이 놀라며 말했다. “야! 소리 좀 내면서 다녀 깜짝 놀랐잖아.”

“아, 쏘리쏘리 그런데 무슨 고민을 그렇게 하는 거야?” “사실 이 편지를 어떻게 전달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어.” 하린은 주소와 수취인 이름이 적힌 편지봉투를 보고 깜짝 놀라며 말했다. “응? 이 주소... 우리 할아버지댁인데.”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