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해진 편지

by 따심토

겨울방학이 되었고, 예준과 하린은 편지를 전달하기 위해 기차를 탔다. 사실예준을 혼자 가려고 했는데 그런 예준을 하린이 막았다. "내 할아버지니까 나도 같이 가야지!"

기차 안에서, 하린은 조용히 이야기했다.

"사실 할아버지가 살던 마을은 일제강점기에 큰 피해를 입었던 지역이네. 특히 마을 처녀들이 속임수로 끌려가 끔찍한 일을 당했다고, 할아버지께 들었어."

예준은 그녀의 말을 조용히 들었다. 밖에서는 첫눈이 흩날리며, 차창 너머로 겨울 풍경이 흘러갔다.

"우와… 눈이 정말 예쁘다. 마음까지 포근해지는 것 같아. 예준아, 너는 어때?"

예준은 잠시 하늘을 바라보다 말했다. "하얀 눈이 조용히 내리는 모습을 보니, 마치 인생의 한 막이 끝나는 기분이야." 하린은 웃으며 말했다. "긍정적으로 생각해 봐. 어른이 된다는 건 새로운 시작이니까. 음... 지금은 마치 연극에서 잠시 쉬는 인터미션 같은 거야." 예준은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에 너랑 단둘이 있으니… 어린 시절 생각도 나고, 좋다. “ 하린이 쑥스러워하며 미소를 짓었다. 그때, 창밖에서 선미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예준이 고개를 돌렸을 땐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마을에 도착한 예준과 하린은 한옥 앞에 섰다. 문을 열자 백발의 노신사가 앉아 있었다. 하린은 달려가 안겼다. "할아버지! 저 왔어요!"

예준은 조용히 인사했다. 하린의 할아버지는 미소를 지으며, 예준을 반겼다. 하린의 할아버지 댁에서에 보내는 일상은 너무 따뜻했다. 벽난로 위에서 노릇하게 구워지는 군 고구마 냄새, 하린이 깔깔 웃으며 뜨거운 고구마를 건네는 모습, 오랜만에 아무 걱정도 없이 예준은 편안함을 느꼈다. 그렇게 며칠을 보내던 어느 날 할아버지는 예준과 하린을 불렀다. 그러고 난 뒤 낡은 나무상자를 하나 꺼냈다. 뚜껑은 열니 오래된 사진들과 편지들이 있었다.

"하린아 너를 보며 우리 누님이 많이 떠올라. 너처럼 장난기 많고, 늘 웃음이 많았는데..."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유난히 느리게 떨렸다. 흑백사진 속에는 아주 어린 할아버지의 모습과 그의 손을 잡고 있는 흰 저고리에 검은 치마, 단정한 댕기 머리를 하고 있는 한 소녀가 보였다. 두 손을 모으고 수줍게 웃는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얼굴. 선미였다. 예준은 선미를 떠올렸다.

"나라가 뒤숭숭하던 시절이었지. 어머니는 나를 낳고, 산후증으로 돌아가시고, 아버지마저 일본 순사에게 구타를 당해 세상을 떠나셔서 누님과 나 단둘이서 살았어. 우리는 가난하게 살았지만 그래도 행복했지. 누님은 늘 밝게 성수야 라고 부르며 나를 챙겨주었지. 누나는 특히 글을 잘 썼는데. 내가 물어보면 누님은 자신의 꿈이 작가라는 말을 했어. " 여기 누나가 쓴 글이 적힌 공책이란다. ゆめ (꿈) 공책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누님을 나 때문에 그 꿈을 포기했어. 어느 날 마을사람들이 우리 집에 찾아왔고, 누님에게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며 이야기했지. 나는 가지 말라고 했지만 누님은 나를 위해 배에 몸을 맡기고, 먼 타국으로 떠났지. 이 공책을 두고... 그 뒤 누님의 소식을 알 수 없었어. 나는 평생 자책을 했단다. 누님이 나 때문에 꿈을 포기하고..." 예준은 알 수 없는 마음에 휩싸였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파란 편지 봉투를 건네야 한다는 확신이 들었다.

"할아버지..." 예준을 파란 봉투를 할아버지에게 건넸다. 손이 떨리는 할아버지는 편지를 열었다. 오래된 종이에 단정한 글씨가 적혀 있었다. “성수야. 너 때문에 꿈 포기한 것 아니야. 그러니 너무 죄책감 가지지 마. 우리 귀여운 성수... 누나가 더 잘해주지 못해 미안해.”

할아버지, 아니 성수는 편지를 가슴에 껴안으며 흐느꼈다. 종이를 적시던 눈물은 마치 오래 묵은 한이 녹사 흘러나오는 듯했다. 그때 창문 틈으로 겨울바람이 스며들어 종이가 휘리릭 흔들렸다. 선미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선미는 지금은 늙은 성수에 두 손을 꼭 잡았다. 바람은 잔잔하게 흔들렸고, 선미의 모습은 서서히 흐려지기 시작했다. 빛 속에서 사라져 가는 순간, 예준은 작은 목소리를 들었다. "예준 오빠, 고마워요." 예준은 멍하니 서있었다. 손끝에 남은 따스함이 현실 같지도, 꿈같지도 않았다. 그저 마음 한쪽이 편안해지는 느낌만 길게 남았다.

...

학교에서는 졸업식 준비로 분주했다. 학교로 돌아온 예준은 조용히 복도를 걸어갔다. 하린이 계단을 내려오며 물었다. "다시 글 쓰는 거야?" 예준은 창밖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응… 그게 내 꿈이니까."
예준과 하린을 서로를 마주 보며 웃었다.
살짝 열린 창문 사이로 바람이 스며들었다.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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