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은 따뜻했고 바람은 잔잔한 어느 오후.
공기도 평온했지만 수리의 마음만은 전혀 평온하지 않았다.
수리는 혼자 공원을 걷고 있었다.
건혁은 미술 공모전 때문에 잠시 학교에 가 있었고, 집 안에 혼자 있기는 조금 답답해서 잠깐 산책을 나온 것이었다.
하지만 사실은 다른 이유도 있었는데
요즘 들어 계속 느껴지는 집 안에서의 작은 불안과 건혁이 괜찮다고 말했지만 그의 붕대 감긴 손이 자꾸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기 때문에 잠시 생각도 정리할 겸 나온 것도 있었다.
수리는 천천히 벤치 앞에 멈췄다.
그때
“수리 씨.”
뒤에서 조용한 목소리가 들렸다.
수리가 돌아보니 하린이 수리에게 말을 한 것이었다.
하린은 수리의 옆에 서서 무표정이 얼굴로 수리를 쳐다봤자.
잔잔했던 바람이 잠시 세게 불면서 하린의 머리카락이 살짝 흔들렸다.
수리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린 씨?”
하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수리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수리는 어색하게 웃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하린의 손이 천천히 움켜쥐으며 말했다.
“… 조금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벤치에 마주 앉았다.
공기는 이상할 만큼 무거웠다.
그저 바람만이 둘 사이의 공백을 메꾸었다.
잠시 후 하린이 먼저 입을 열었다.
“… 수리 씨.”
수리는 고개를 들었다.
하린의 표정은 평소와 달랐다.
밝지도 않았고 차가움만이 얼굴에 드러났다.
어딘가 복잡한 감정들이 표현되어 있는 것 같았다.
“… 건혁 선배 손.”
하린이 조용히 말했다.
수리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네?”
하린은 잠시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리고 말했다.
“그거. 수리 씨 때문이에요.”
순간 공기가 멈춘 것 같았다.
수리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네?”
목소리가 작게 떨렸다.
하린은 고개를 들었다.
“… 선배가 말 안 했죠.”
수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린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자세한 일은 저도 모르지만 수리 씨의 의 폭주 때문에 큰 소동이 있었어요.”
수리의 심장이세게 뛰기 시작했다.
“폭… 주요?”
하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는 그걸 막으려다 다친 거예요.”
수리의 눈이 흔들렸다.
“…아…”
그녀의 손이
천천히 떨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기억이…”
하린은 조용히 말했다.
“선배는 숨겼어요. 수리 씨가 충격받을까 봐.”
그 말은 칼처럼 조용히 내려앉았다.
수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린 것 같았다.
폭주.
건혁.
붕대.
모든 조각이
천천히 맞춰지기 시작했다.
“그러면 저 때문에…”
수리의 입술이 떨렸다.
“건혁 씨가...”
하린은 잠시 수리를 바라봤다.
그리고 단호하게 말했다.
“네."
그 말은 잔인할 정도로 솔직했다.
수리는 고개를 숙였다.
머리카락이 얼굴을 가렸다.
어깨가 아주 조금 떨리고 있었다.
“… 왜…”
작게 말했다.
“… 왜 말 안 했죠…”
하린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말했다.
“선배니까요. 그 사람은 원래 그래요.”
수리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하린의 눈은 어딘가 슬퍼 보였다.
“자기가 다치는 건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오직 희생만 생각하고... 정작 자기 몸은..."
바람이 불었다.
하린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그래서 더 바보 같아요.”
“…네?”
수리가 놀라 물었다.
하린은 잠시 눈을 감았다.
“저..."
숨을 한 번 고른 뒤 조용히 말했다.
“건혁 선배 좋아해요.”
수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린은 계속 말했다.
"저에게 건혁 선배는 저에게 소중한 사람이에요."
그녀의 눈이 조금 붉어졌다.
“그래서 더 무서워요. 수리 씨 때문에 선배가 더 크게 다칠까 봐.”
수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하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린의 목소리가 더 낮아졌다.
“…그래서 솔직히 말할게요. 수리 씨가 있으면 선배는 계속 다칠 거예요.”
그 말은 어쩐지 너무 무거워
수리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하린은 시선을 피했다.
“… 저도 알아요. 수리 씨가 나쁜 사람 아니라는 거. 선배도 그걸 알아서 옆에 있는 거겠죠.”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하린이 말했다.
“하지만 그래도 수리씨가 위험한 존재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고 저는 선배가 다치는 게 싫어요.”
수리는 고개를 숙여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손은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수리는 문득 건혁의 얼굴이 떠올랐다.
붕대, 웃던 얼굴, 괜찮다는 말.
그리고
'같이 있으면 해결할 수 있을 거예요.'
건혁과 함께 있던 순간들이 떠올라
수리의 눈이 천천히 흔들렸다.
“제가 위험한 존재인가요?”
하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침묵이 이미 답이었다.
바람이 불었다. 나뭇잎이 흔들렸다.
수리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천천히 말했다.
“… 알겠어요.”
수리는 하린을 보며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어딘가 슬퍼 보였다.
“저 때문에 건혁 씨가 다치면 안 되니까..”
수리는 잠시 말을 멈추다가 말을 이었다.
"제가 결정할게요."
바람이 조용히 공원을 지나갔다.
그 순간 하린은 알았다.
수리가 무슨 결정을 했는지.
그리고
그 결심이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도.
하지만 하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공원 위로
바람이 조용히 흘러갔다.
그리고
두 사람의 마음에는
아주 긴 여운이
남아 있었다.
수리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 먼저 갈게요.”
짧은 말이었다.
하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숙인 채 벤치에 앉아 있었다.
수리는 잠깐 멈췄다. 뒤돌아볼 것 같았지만
결국 돌아보지 않았다.
그리고 그대로 공원을 걸어 나갔다.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
사각… 사각…
그 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그리고 곧 완전히 사라졌다.
공원에는 다시 바람 소리만 남았다.
잠시 후.
하린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수리가 앉아 있던 자리.
이미 아무도 없었다.
“… 하.”
짧은 숨이 새어 나왔다.
하린의 손이 천천히 떨렸다.
“나… 방금…”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 뭐 한 거야.”
바람이 불었다. 나뭇잎이 흔들렸다.
그리고 하린의 눈이 흔들렸다.
“선배가 알면 분명 화내겠지.”
잠시 침묵.
"그래도… 싫어."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정말 싫어.”
하린의 손이 꽉 쥐어졌다.
“선배가 또 다치는 거.”
눈이 붉어졌다.
“나는… 다시는 못 봐.”
하린은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잠시 후.
작게 중얼거렸다.
“… 미안해요.”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수리에게 인지.
아니면
건혁에게 인지.
바람이 다시 불었다.
그리고 하린은 한참 동안 벤치에서 움직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