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 아래의 거짓말

웃고 있지만...

by 따심토

하린이 떠나고 공원 한쪽.
나무 그림자 사이에서
누군가가 조용히 서 있었다.
그의 정체는 서림당의 주인인 회색노인으로
회색노인은
말없이 건혁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동안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작게 중얼거렸다.
“… 지금은 잠시 고민해도 괜찮아.”
그 말속에는 깊은 안타까움과 위로가 담겨 있었다.
노인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하늘에는 구름이 조금씩 흘러가고 있었고 별이 하나 반짝이고 있었다.
“사람이란 참 이상하지. 수많은 선택을 하게 되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순간에는 모두 늘 이렇게 멈춰 서지."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어딘가 따뜻했다.
“걱정 앞에서는 모두가 두려워하고 도망치고 싶어 하고 외면하고 싶어 하지. 그런데”
잠시 조용히 웃었다.
“그 위기를 피하지 않고
마주 보는 순간. 사람은 변하지.
바람이 조용히 나뭇가지를 흔들었다.
회색노인은
천천히 건혁을 바라봤다.
벤치에 앉아 있는 그 작은 등을.
“건혁아.”
그의 목소리는
마치 먼 곳에서 흘러오는 것 같았다.
“지금 네가 느끼는 감정.
혼란, 두려움, 책임… 그 모든 것이 너를 괴롭히고 있겠지.”
노인의 눈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하지만 말이다. 그것이 바로 사람을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어. 위기 앞에서
뒤돌아서는 사람. 그리고…”
잠시 멈췄다.
“…그 위기를 통해 오히려 자신을 바꾸는 사람.”
공원의 가로등 불빛이
노인의 얼굴을 비췄다.
그의 눈에는
오랜 세월이 담겨 있었다.
“사람은 위기 속에서 성장한다.”
그는 조용히 말했다.
“편안한 길에서는
아무도 강해지지 못한다.
그 길에서는 아무도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 지. 하지만…”
그의 시선이 건혁에게 닿았다.
“… 위기 속에서는 두려움도 있고, 약함도 있지만
진심도. 존재하단다."
회색노인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지금 너는 갈림길에 서 있는 거야..”
바람이 다시 불었다.
“한쪽 길은 험난하고 아마 잃게 되는 것도 많겠지.”
노인의 눈이
조금 어두워졌다.
“하지만.”
그는
천천히 말했다.
“…그 길에서
너는 진짜 자신을 만나게 될 것이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노인은
벤치에 앉아 있는 건혁을 보며
조용히 웃었다.
“사람이란 참 묘하다. 지키고 싶은 것이 생기는 순간 약해지기도 하고 강해지기도 하지.”
공원 위로
구름이 지나갔다.
달빛이 잠깐 모습을 드러냈다.
“건혁아.”
노인의 목소리가
조금 더 부드러워졌다.
"나는 너를 믿는다."
잠시 눈을 감았다.
“지켜야 할 것이 있다면. 포기하지 마라. 너는 내 자랑스러운..."
바람이
조용히 공원을 지나갔다.
회색노인은
마지막으로 건혁을 바라봤다.
“… 부디. 잘 이겨내기를..."
노인의 목소리는
바람 속으로 조용히 흩어졌다.
공원 가로등 불빛이
조용히 흔들렸다.
노인은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바라봤다.
구름 사이로
희미한 달빛이 보였다.
“건혁아.”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낮았다.
하지만 어딘가 따뜻했다.
“너는 지금
네가 약해졌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누군가를 지키겠다고 말하면서도 마음이 흔들리고 있으니까.”
노인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건 약함이 아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건... 사람이기 때문에 느끼는 당연한 감정이다.”
바람이
나무 사이를 스쳤다.
나뭇잎들이 조용히 부딪혔다.
노인은
다시 말을 이었다.
“지켜야 할 사람이 생기면
사람은 두려워진다. 잃을까 봐. 다칠까 봐.
그리고 자신 때문에 누군가가 상처 입을까 봐.”
그는 잠시
건혁의 손을 바라봤다.
붕대가 감긴 손.
아직 완전히 아물지 않은 상처.
“… 상처라는 건 말이다.”
노인이 조용히 말했다.
“몸에만 남는 게 아니란다."
잠시 멈췄다.
“… 하지만.”
노인의 눈이
조금 깊어졌다.
“그 상처 덕분에
사람은 비로소 알게 되지 자신이
무엇을 지키고 싶은지.”
바람이
한 번 더 불었다.
회색노인은
조용히 미소 지었다.
“나는 많은 사람을 봐왔다. 위기 앞에서
도망치는 사람도 있었고. 자신을 버리면서까지
누군가를 지키려 했던 사람도 있었다.”
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
“하지만 말이다.”
“… 진짜 강한 사람은 그 중간 어딘가에 있단다.
두려워하면서도 한 발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
무너지면서도 다시 일어나는 사람.”
공원의 공기가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노인은 아주 천천히 말했다.
“편안한 길에서는 아무도 변하지 않아.
아무도 자신이 얼마나 약한지. 또 얼마나 강해질 수 있는지 알지 못한 지.”
그의 시선이
다시 건혁에게 향했다.
“하지만 위기가 찾아오면.
… 사람은 자신의 진짜 모습을 보게 된다.”
노인은
작게 웃었다.
“아마 지금 너는
스스로에게 묻고 있겠지.
‘내가 이 길을 가도 되는 걸까.’
‘내가 누군가를 지킬 수 있을까.’
‘내 선택이 틀린 건 아닐까.’
그 질문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너를 성장시키고 있으니까.”
공원 위로
구름이 조금씩 흘러갔다.
달빛이
조금 더 밝아졌다.
노인의 목소리가
더 부드러워졌다.
“건혁아. 나는 너에게 답을 알려줄 수는 없다.
하지만 한 가지는 말해줄게.”
잠시 멈췄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지켜야 할 것이 있다면 망설이지 마라.”
바람이
조용히 불었다.
“그 길이 아무리 험해도. 그 끝에서
네가 후회하지 않을 선택이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노인은
다시 한번 건혁을 바라본 뒤
노인은 천천히 돌아섰다.
"그 위기를 끝까지 견뎌낸 사람만이 자신이라는 그림을 완성할 수 있다."
조용히 공원을 지나갔다.
회색노인의 모습은
나무 그림자 속으로
천천히 사라졌다.
...
집 안은 여전히 조용했다.
공원에서 돌아온 뒤, 아무것도 변한 것은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모든 것이 달라진 것처럼 느껴졌다.
문을 닫는 소리도 평소보다 더 크게 울렸다.
건혁은 신발도 제대로 벗지 못한 채
잠시 현관에 멍하니 서 있었다.
“… 하…”
짧은 숨이 흘러나왔다.
몸은 분명 집에 돌아왔는데
머릿속은 아직도 공원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벤치, 가로등,
그리고 '선배 좋아해요.'
'수리 씨는 위험한 존재예요.'
그 말들이 또다시 스쳐 지나갔다.
건혁은 눈을 질끈 감았다.
“… 왜 하필 지금이야…”
작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난 뒤
천천히 소파로 걸어갔다.
몸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고개를 숙였다.
붕대를 감은 손이 시야에 들어왔다.
잠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그 손을 바라봤다.
“… 아프네.”
상처는 이미 멎었다.
피도 멈췄고, 겉으로 보기엔 별거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여전히 욱신거렸다.
건혁의 눈이 조금 흔들렸다.
“… 위험한 존재…”
하린의 목소리가 겹쳐졌다.
건혁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아니야…”
작게 부정했다.
“수리 씨는…”
말이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두 개의 생각이 부딪혔다.
‘위험하다.’
‘아니다.’
‘또 이런 일이 생기면?’
‘그래도… 약속했잖아.’
건혁은 한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 모르겠어…”
그때였다.
끼익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는 소리가 났다.
건혁의 몸이 순간 굳었다.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수리였다.
문틈 사이로 얼굴을 내밀고
조심스럽게 안을 살피고 있었다.
“… 건혁 씨?”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밝았다.
수리는 천천히 방에서 나왔다.
“… 아까는 좀 정신이 없어서…”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지금은 괜찮아요. 진짜로요.”
그녀의 표정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 같았다.
건혁의 눈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 그래요?”
겨우 입을 열었다.
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몸도 괜찮고… 음…”
잠깐 생각하더니 말했다.
“배도 조금 고픈 것 같고요.”
그녀는 웃었다.
밝고, 가볍고, 아무렇지 않은 웃음.
그 웃음을 보는 순간
건혁의 가슴이
더 무겁게 내려앉았다.
“… 왜…”
작게 중얼거렸다.
수리가 고개를 갸웃했다.
“네?”
건혁은 시선을 피했다.
“… 아니에요.”
잠깐 침묵이 흘렀다.
수리는 천천히 다가왔다.
그리고
건혁의 손을 봤다.
붕대.
그녀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
“… 그거.”
조심스럽게 물었다.
“다친 거예요?”
건혁은 순간 대답을 망설였다.
“아… 그냥”
“저 때문이죠?”
수리의 말이 먼저 나왔다.
공기가 순간 멈췄다.
건혁의 눈이 흔들렸다.
수리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 붕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 기억은 안 나는데요.”
조용히 말했다.
“왠지… 그런 느낌이 들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아까보다 훨씬 낮아져 있었다.
건혁은 입을 열었다.
“… 아니에요.”
또 거짓말이었다.
수리는 고개를 들었다.
“… 거짓말.”
"네?"
"아무것도 아니에요."
수리는 다시 미소를 짓었지만 이번 미소는 어색함이 담겨있었다.
“… 저…”
수리는 말을 잇지 못했다.
입술이 조금 움직이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시선을 피했다.
공기가 애매하게 가라앉았다.
그때였다.
“…아, 맞다.”
수리가 일부러 밝은 목소리를 냈다.
조금 어색할 정도로 톤이 올라가 있었다.
“저 아까 배고프다고 했죠?”
건혁이 순간 눈을 깜빡였다.
“…네?”
“뭐라도 먹을까요?”
수리는 손뼉을 가볍게 쳤다.
“제가 해볼게요. 아니면… 음… 배달?”
그녀는 일부러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웃었다.
건혁은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 괜찮아요.”
짧게 대답했다.
수리는 고개를 갸웃했다.
“왜요?”
“그냥 같이 먹어요. 물론 요리는 수리 씨가"
건혁은 미소를 짓으며 말했다.
수리는 잠시 건혁을 바라보다가
다시 웃었다.
“좋아요.”
그녀는 곧장 주방 쪽으로 걸어갔다.
발걸음이 빠르고, 가벼웠다.
주방에서
가스레인지 켜지는 소리가 났다.
치익
조용했던 집 안에
작은 소리가 번졌다.
건혁은 소파에 앉은 채
그 소리를 듣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주방 쪽을 바라봤다.
수리는 앞치마를 두르고
익숙한 손놀림으로 무언가를 만들고 있었다.
“어…?”
작게 당황하는 소리도 들렸지만
곧 다시 웃는 소리가 이어졌다.
건혁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자신의 손으로 떨어졌다.
붕대.
그 위로
조금씩 통증이 올라왔다.
“… 괜찮다며…”
누가 한 말인지 모를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그는 손을 꽉 쥐었다.
욱신
작게 고통이 올라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손을 풀지 않았다.
“건혁 씨!”
수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거 좀 봐줄래요?”
건혁은 잠시 멈췄다가
천천히 일어났다.
주방으로 걸어갔다.
수리는 프라이팬 앞에서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 이거 왜 이래요?”
팬 위에서는
어딘가 애매하게 타고 있는 음식이 있었다.
건혁이 잠깐 바라보다가
작게 웃었다.
“… 불이 너무 센데요.”
“아 그래요?”
수리는 황급히 불을 줄였다.
“아하…”
그리고 머쓱하게 웃었다.
두 사람의 거리가 다시 가까워졌다.
수리는 건혁의 옆모습을 바라봤다.
아주 잠깐 수리의 얼굴이 붉어졌다.
요리가 다 완성되었다.
“이거 맛있어 보여요.”
건혁이 아주 작게 웃었다.
“… 타기 직전인데요.”
“그래도요.”
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먹으면 뭐든지 맛있으니까요.”
잠시 후.
두 사람은
작은 식탁에 마주 앉아 있었다.
접시 위에는
조금 모양이 망가진 음식이 놓여 있었다.
수리는 젓가락을 들었다.
“잘 먹겠습니다!”
밝게 말했다.
그리고 한 입 먹었다.
“… 음!”
눈을 살짝 크게 떴다.
“괜찮은데요?”
건혁도 한 입 먹었다.
“… 괜찮네요.”
짧게 말했다.
“그렇죠?”
수리는 말을 이었다.
“건혁 씨 공모전 준비 잘 돼 가요?”
“…아.”
건혁이 고개를 들었다.
“네.”
“어떤 거 그릴 거예요?”
건혁은 잠시 멈췄다.
“… 아직 못 정했어요.”
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번엔 밝은 거 어때요?”
“… 밝은 거요?”
“네.”
수리는 웃었다.
“건혁 씨 그림… 따뜻하잖아요.”
그 말에
건혁의 눈이 아주 살짝 흔들렸다.
“…따뜻하다…”
작게 중얼거렸다.
머릿속에
하린의 말이 스쳤다.
“… 그래요.”
건혁이 말했다.
“밝은 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려볼게요.”
수리는 환하게 웃었다.
“좋아요!”
그 순간.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서로 동시에 웃었다.
“… 하하.”
“… 하하…”
다시 집에는 화목함이 나타났지만 어딘가 어색함도 함께했다.

수, 금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