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바보 같아..."
집 안은 조용했지만
오히려 그 조용함 때문에 불안감은 더 커지고 있었다.
창밖에서는 바람이 불고 있었지만
집 안 공기는 작은 미동도 없었다.
건혁은 소파에 앉아
붕대를 감은 손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피도 멈췄고
상처도 깊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상하게
손등이 계속 욱신거렸다.
건혁의 머릿속에
어젯밤 장면이 다시 떠올랐다.
갈라진 아스팔트.
폭주하던 빛.
그리고 그 안에서
날뛰고 있었던 수리.
“… 하.”
건혁은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다시 이런 일이 생기면…’
그는 생각을 끝까지 이어가지 못했다.
“… 아니야.”
건혁은 억지로 고개를 저었다.
“그만 생각하고 공모전 준비하자.”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수리가 있는 방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수리는 침대 위에서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창문 사이로 들어온 햇빛이
수리의 머리카락 위에 내려앉아
은빛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빛나게 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수리의 얼굴은 평온했다.
건혁은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조심스럽게 불렀다.
“…수리 씨.”
수리가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아… 네?”
“몸은 어때요?”
수리는 천천히 기지개를 폈다.
“… 음…”
잠깐 생각하더니 말했다.
“괜찮은 것 같아요.”
건혁이 잠시 망설이다 물었다.
“어제 일… 어디까지 기억나요?”
수리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솔직하게 말했다.
“… 잘 모르겠어요.”
건혁의 눈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수리는 머리를 긁적였다.
“잠깐 무엇을 사러 나갔던 건 기억나는데...”
“그다음은… 잘 모르겠네요.”
잠깐 멈추더니 말했다.
“혹시 제가 또 사고 쳤나요?”
“… 아니에요.”
건혁은 일부러 거짓말을 했다.
수리는 잠깐 멈추더니
어색하게 웃었다.
“제가 또 잠든 건가 봐요.”
건혁은 수리를 향해 미소를 날렸지만 두려움을 감출 수 없었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 그럴 수도 있죠.”
그때였다.
띠링.
휴대폰이 울렸다.
건혁이 화면을 확인했다.
메시지 하나.
— 선배, 궁금한 게 있어서 그러는데 잠깐 나올 수 있어요? 선배 집 앞 공원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
건혁의 집 앞 작은 공원 벤치에
하린이 먼저 와 있었다.
하린은 품에 와플이 담긴 종이를 꼭 쥐고 있었다.
건혁이 다가가자
하린이 고개를 들었다.
“선배.”
밝게 인사했지만 그 미소는 오래가지 못했다.
하린의 시선이
곧바로 건혁의 손으로 향했다.
붕대.
하린의 눈이 흔들렸다.
“… 그거.”
조심스럽게 물었다.
“다친 거예요?”
건혁은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아, 별거 아니야.”
“별거 아니긴요.”
하린은 고개를 살짝 찌푸렸다.
“예술하는 사람에게 손이 얼마나 중요한데요.”
그녀는 조금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건혁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 아프죠?”
“… 괜찮아.”
하린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건혁의 손을 가만히 보고 있을 뿐이었다.
“… 어쩌다가 다친 거예요?”
“그냥 실수로…”
“거짓말...”
하린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 혹시 수리 씨 때문이에요?”
건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잠깐 침묵이 흘렀다.
하린이 조용히 말했다.
“선배. 수리 씨는 위험한 존재예요.”
건혁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 왜 그렇게 생각해?”
하린은 잠시 고민을 하다가 말을 꺼냈다.
“선배. … 저 솔직히 말할게요.”
숨을 한 번 고른 다음 분명하게 말했다.
“수리 씨. 우리랑 다른 세계에서 왔잖아요.
그리고 마법을 쓰고.”
바람이 벤치를 스쳤다.
나뭇잎이 사각거렸다.
하린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게 이 세계에서 얼마나 위험한지 알아요?”
"..."
“의도하지 않았어도 누군가를 다친 게 할 수 있는 게 수리씨에요. 저도 수리씨가 착한 사람이라는 것은 알아요. 하지만...”
하린의 눈이 흔들렸다.
“그래도 결과는 똑같아요. 수리 씨가 있으면 분명 위험한 일이 생길 거예요.
그리고… 선배도 더 크게 다칠 거예요. 저는 그게 너무 걱정돼요.”
건혁의 머릿속에 폭주하던 빛이 스쳤다.
“… 그래도.”
건혁은 낮게 말했다.
“난 보호해야 해. 수리씨랑 약속했어. 위기를 함께 헤쳐나가자고."
"선배!"
하린은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선배가 대신 다치겠다는 거예요?”
건혁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하린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 그게 보호예요?"
하린이 건혁을 바라봤다.
“… 선배 기억나요? 처음 만났을 때.”
하린의 눈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아버지의 강요 속에서 무채색이었던 저는
… 선배 때문에 제 색깔을 찾을 수 있었어요.”
건혁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하린은 천천히 말했다.
“그때 선배가 했던 말 기억나요? 그림은… 사람을 위로할 수 있다고 그래서 저도 버틸 수 있었어요.”
하린의 손이 조금 떨렸다.
“… 선배. 저는 선배가 좋아하는 미술을 하며 평범한 삶을 살았으면 좋겠어요.”
건혁과 하린의 눈이 순간 마주쳤다.
“사실 저 선배 좋아해요.”
건혁은 순간 당황하며 하린을 쳐다봤다.
하린의 머리카락이 가로등불빛 아래에서 빛나고 있었고, 얼굴은 붉어진 하린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선배가 다칠까 봐 저는 정말 무서워요."
바람이 불었다.
“저한테 지금 제일 소중한 사람은 선배예요.”
건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더 이상 위험한 일에 휘말리지 마요. 누군가를 구하려다 자기 자신마저 잃지 마요.”
그 말은 진심 어린 경고인 동시에 부탁이었다.
하린은 잠시 망설이다 말했다.
“수리 씨에게 말할 거예요. 당신은 선배를 위험하게 만든다고.”
"야! 최하린"
건혁이 큰소리로 하린을 불렸다.
그녀의 눈은 순간 흔들렸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선배! 왜 항상 혼자서 버티려고 해요.
제발 주위에 선배를 생각하는 사람도 생각하세요. 제발... "
하린은 그 말을 끝으로 벤치에서 일어나 돌아섰다. 그리고 천천히
공원을 떠났다.
떠나기 전 하린은 뒤돌며 건혁을 쳐다봤다. 웃고 있었지만 눈에는 눈물을 흐르고 있었다.
벤치 위에
와플 봉지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종이봉투는 이미 식어 있었고
달콤한 냄새도 거의 사라져 있었다.
건혁은 천천히 공원을 벗어나는 하린을 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벤치에 놓인 식어가는 와플 봉지를 옆에 두고 괴로워하며 고개만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공원의 가로등 불빛이
조용히 그의 어깨 위에 떨어지고 있었다.
바람이 한 번 불었다.
나뭇잎들이 흔들렸다.
하지만 건혁은 움직이지 않았다.
하린의 말이 계속 머릿속에서 맴돌고 있었다.
“선배 좋아해요.”
“선배가 다칠까 봐 무서워요.”
“더 이상 위험한 일에 휘말리지 마요.”
그리고
“수리 씨는 선배를 위험하게 만들어요.”
건혁은 붕대를 감은 손을 천천히 내려다봤다.
손등이 욱신거렸다.
상처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것 때문인지
그는 알 수 없었다.
“… 하.”
짧은 숨이 흘러나왔다.
“나는… 어떻게 해야하지.”
...
공원을 떠난 뒤에도
하린의 발걸음은 쉽게 빨라지지 않았다.
가로등이 드문드문 켜진 길.
밤공기는 생각보다 차가웠고
바람이 불 때마다 나뭇잎이 서로 스치는 소리가 났다.
하린은 두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천천히 걸었다.
뒤돌아보지 않으려고 했지만
몇 번이나 발걸음이 멈출 뻔했다.
‘… 아니야.’
고개를 작게 저었다.
뒤를 보면
정말 다시 돌아가 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린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도시의 불빛 때문에 별은 거의 보이지 않았지만
희미한 별 몇 개가
어둠 사이에서 겨우 반짝이고 있었다.
“… 하.”
작게 한숨이 새어 나왔다.
머릿속에는
아까 공원에서의 장면이
자꾸만 반복됐다.
벤치에 앉아 있던 건혁.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던 모습.
그리고
붕대를 감은 손.
하린의 손가락이
자기도 모르게 움켜쥐어졌다.
“왜 항상 그렇게…”
바람이 다시 불었다.
하린의 머리카락이
가볍게 흩날렸다.
그녀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 바보.”
그 말은
짜증 섞인 말처럼 들렸지만
목소리에는 애절함이 담겨있어
오히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목소리였다.
하린의 눈앞에 과거의 장면이 떠올랐다.
처음 건혁과 그림 앞에서 만났던 날.
그때의 자신은
항상 아버지의 말만 듣고
정해진 길만 걸어가던 사람이었다.
색깔도 없는 무채색인 삶을 살며...
하지만 건혁은
그런 자신에게 위로와 함께 새로운 색을 보여준 사람이었다.
하린은 하늘을 올려다본 채
작게 말했다.
“… 선배는 모르겠지.”
입술이 떨렸다.
“선배가 다치면…”
말이 잠시 멈췄다.
“… 내가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눈이 살짝 붉어졌다.
그녀는 한 번 눈을 감았다.
건혁의 모습이 또 떠올랐다.
붕대.
지친 얼굴.
그리고
그래도 괜찮다는 듯 웃던 표정.
바람이 또 불었다.
이번에는 조금 더 세게.
하린은 천천히 다시 걷기 시작했다.
발걸음은 여전히 느렸다.
“… 수리 씨 때문이잖아요.”
조용히 말했다.
“분명 그 사람 때문이잖아요.”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질투인지
걱정인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건혁이 다치는 건 싫었다.
정말로.
정말로 싫었다.
하린이 다시 하늘을 올려다봤다.
“진짜…”
그리고 말했다.
"바보.”
이번에는
조금 다른 의미였다.
이번에는 원망과
걱정과 좋아하는 마음도 함께 섞여있었다.
하린의 눈가가 조금 젖어 있었다.
"그렇게 자신을 생각 안 하고 항상 다른 사람만 생각하며 자신은 상처받아도 괜찮다는 것처럼… 다른 사람부터 지키려고 하는..."
그녀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하린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그녀는 더 이상 뒤돌아보지 않았다.
하지만
머릿속에는 여전히
벤치에 앉아 있던 건혁의 모습이 남아 있었다.
"... 정말 바보 같아."
그리고
그 생각을 지우지 못한 채
하린은 천천히 집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