댐을 쌓아서 가둬 보아도 계속 불어나서 위로 빠져나오게 되어 있어.
미미하게 차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이 말하는 소리도 들리고 누군가 소리를 지르는 것도 들렸다. 손에는 따스한 감각이 느껴졌고 기분도 활기로 가득 차 있는 상태였다. 여긴 어디지? 아 그래. 여기 내 여동생이랑 많이 놀았던 곳인데. 그렇게 생각하니 눈앞에 여동생이 보였다. 긴 장발, 갈색머리. 내가 알던 여동생 그대로였다.
"아이스크림 맛있지?"
답하지 않고 조용히 웃었다. 귀여운 녀석. 녀석은 그걸 긍정의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기분이 좋아 콩콩 뛰었다. 난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많이 맛있다고 말해 주었다. 그 녀석이 콩콩 뛰면서 기뻐했다. 마침 신호등은 초록색이 되었다.
"저것 봐. 쿠키 있어. 쿠키!"
평소 녀석이 좋아하는 초코 쿠키를 파는 곳이 횡단보도 너머 있었다. 더 기분이 좋아진 녀석은 내 손을 뿌리치고 빠르게 달려갔다. 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녀석을 보면서 웃었다.
그때 차가 달려와서 녀석의 등을 부러트렸다. 머릿결이 하늘 위에서 퍼졌고 피는 온 사방에 튀었다. 순식간에 차는 도망쳤고 사람들이 동생을 보고는 달려왔다. 몇 명은 동생을 살려서 영웅이 되려고 아득바득 뭔가를 했고 몇 명은 신고를 했다. 그리고 대부분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동생을 쳐다보았다. 나 역시도 다르지 않았다.
내가 멍하니 있는 동안 동생과 눈이 마주쳤다. 녀석은 눈을 뜨지 않았다. 입만 간신히 이렇게 움직였다.
일어나
일어나
일어나
일어나
일어나
"일어나."
누군가가 아주 가까이 내 귀에 대고 말했다. 말한 후 킥킥대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아까는 꿈이었나? 그런데, 얘는 누구였지? 목소리가 익숙한데. 누구 목소리지?
"일어나."
여자 목소리네. 이제 알겠다. 미나 목소리다. 근데 도대체 뭐하고 있는 거야?
"지훈아 일어나. 지훈아."
빨리 일어나야할 상황은 아닌 것 같았다. 무슨 말을 더 하나 지켜보기로 하고 다시 눈을 감았다. 어둠과 목소리만이 들렸다. 그 외의 나머지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세상에서 미나의 목소리만 잔잔하게 들렸다.
'이거 ASMR 같은걸. 좋은데?'
'지훈아.'
미나는 그 말을 한 뒤 잠시 멈추더니, 어눌한 목소리로 뭐라 말했다. 근데, 너무 어눌해서 잘 들리지도 않았다. 그 어눌한 말이 끝난 후 다시 킥킥대기 시작했다.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 느낌이 맞다고 정정이라도 해주려는 모양인지 미나가 내 얼굴을 자신 쪽으로 돌렸다. 미나의 긴 머리칼이 내 얼굻 옆에 내려앉았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짧은 한숨 끝에 미나가 내 얼굴 쪽으로 얼굴을 내미더니 매우 가까이 왔다. 그리고 또렷한 한마디.
"사랑해."
"뭐?"
깜짝 놀란 나머지 미나의 어깨를 밀치고 일어나 버렸다. 그리고는 도망치듯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일어났네? 어제 잘 잤냐?"
한참을 정신없이 뛰어서 도착한 곳은 바닷가였다. 바다에 가기에는 좋지 않은 날씨였고 내 기분도 바다에 가기에는 좋지 않은 기분이었다. 내 앞에 있는 건 김민찬이었다. 맑지 않은 바다를 보고 실망한 눈치였다.
"그래. 나 많이 잤어?"
"10시간 정도 잔 거면, 많이 잔 거지."
"심각하네."
근처에 있는 의자에 앉아 멍하니 바다를 응시했다. 유난히 파도가 잔잔한 바다였다. 신경질적으로 엉켜가는 마음을 풀기에는 너무나도 잔잔한 파도였다. 쟤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까? 민찬을 쳐다보니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게 맞는 것 같았다. 솔직히, 어렴풋이 생각은 했지만 저렇게까지 깊이 생각한 민찬의 모습을 본 적은 없다.
"날씨가 맑지 않은데, 애들한테 카페 들어가자고 할까?"
민찬의 그 한마디에. 난 비로소 생각을 돌리고 다른 아이들을 보았다. 김지훈과 박준혁은 세상 물정 모르고 신나게 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기분이 좀 좋아졌고 난 10분만 더 있다가 가겠다고 하고, 10분 뒤에 전화하라고 덧붙이고는 일어섰다.
바닷가의 시간은 유난히 길었다. 잔잔한 바다를 상상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쁘지 않은 풍경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대로 쭉 여유로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확실히 다른 애들은 만나면서 더 좋아진 것 같았다. 더 행복하고, 훨씬 더 피곤해지지 않았다. 문득 내 친구들 생각이 났다. 생각하기도 싫은 기억이었다.
"싸가지 없이 굴지마."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잊어버릴 기억의 한 부분이다. 이제는 절대 마주칠 일이 없는 기억들. 나는 이 바다와 다른 세계의 친구들과 계속 같이 있으면 된다. 이제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일 뿐이다. 바다를 보면서 생각했다. 핸드폰이 울렸다. 송지훈의 것이라고 확신했다. 10분을 못 기다렸다고 생각했다. 핸드폰을 든 순간 그 당연한 생각은 산산조각 나 버렸지만 말이다.
'유서민'
10분, 20분이 지났는데도 민찬에게서 아무런 연락이 없어서 다시 그 바닷가를 가서 애들을 데리고 온 후 카페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긴 시간 동안 생각하던 건 미나였다. 미나의 과거에 대해서 곱씹고 찾아보고 있었다. 무슨 부잣집 딸내미인가 싶었지만 그것도 아니고 뉴스에도 나오지 않았다.
'사랑해.'
"더러워."
도대체 왜 날 선택했는지에 대한 궁금증도 있었지만 역겨움이 더 컸다. 그딴식으로 역겹게 고백하는 사람이 도대체 어디 있냐고. 한숨을 쉬면서 더 찾아보던 도중에 강미나와 관련이 되어 있을 것 같은 검색결과가 딱 하나 나왔다. 영상이 하나 뜨길레 눌러보았다.
"요즘 대세인 무당집! 말 그대로 대세 무당집에 찾아가 보았습니다! 이곳에서는 40살 어머니와 7살 딸이 있습니다. 특이한 점은 7살 딸이 무당을 본다는 것인데요. 오늘은 그 주인공, 강미나 양을 모셨습니다."
영상에 나온 어릴 적 강미나는 지금의 강미나와 똑같이 생겼다. 흠잡을 수 없이 말이다. 한참 동안 영상을 보았다. 하지만 다음에 나오는 것은 자기 어머니가 딸의 자랑을 하는 것밖에 없었다. 더 이상 볼 게 없다고 생각한 난 핸드폰 창을 닫고. 민찬을 찾으러 갔다.
"너 괜찮아?"
"응, 괜찮아. 걱정해줘서 고마워."
"이제 돌아와. 모두가 기다리고 있어."
"정말?"
"그래. 이 멍청아. 어디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다 너 찾느라 고생하고 있어."
"....."
"너, 일주일 뒤에 돌아온다고 약속해. 부모님들도 힘들어 하시는데, 이게 무슨 민폐냐."
"알겠어.."
"알겠지? 꼭 돌아와."
민찬은 전화를 끊었고 한숨을 내쉬었다. 옆에 내가 듣고 있었단 걸 몰랐는지 날 보자마자 식은땀을 흘리면서 인사했다. 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앉았다. 그리고 물었다.
"누구야?"
"다 들었어?"
"응."
"아. 짜증나."
머리를 감싸쥐는 민찬을 보니 좋은 상대는 아닌 것 같았다. 아까 사온 음료수를 따고는 조용히 민찬에게 주었다. 민찬은 잠깐 망설이다가 음료수를 받았다. 난 바로 마셨고 민찬도 시원하게 한 잔을 마셨다. 벌써 해가 지고 있었다.
"노을 이쁘다."
"..."
"나 예전에 친구들이랑 노을 보러 오는 거 좋아했는데."
친구들 얘기가 나오자 민찬의 눈이 커졌다.
"친구들?"
"친구들이랑 종종 노을 보러 갔어. 내가 살던 지역은 노을이 이쁘게 졌거든."
"친구들은 착했어?"
친구의 대한 기억을 어렴풋이 떠올려보려고 했지만 노을이 지던 그때 친구들과 가만히 앉아 있었던 것만 기억나지. 다른 건 기억나지 않았다. 서울에 있는 노들섬에서 이쁘게 지던 노을은 모든 걸 잊게 할 만큼 좋은 곳이었다. 그 친구들도 순전히 운 때문에 멀어졌던 친구들이었다.
"딱히 기억이 안 나네."
"하긴 착했으면 여기 오지도 않았겠지."
그 말이 나한테 비수처럼 날라온 말인줄도 모르고 민찬은 조금 풀어진 표정으로 얘기를 계속했다.
"나도 착한 친구들을 가지고 있진 않았던 것 같아. 상처 주지도 않고, 얕보는 것도 없는 친구들을 원했는데 말이야. 착한 친구들을 원했는데, 그러지 못했어."
"그 친구들은 어땠는데?"
그 질문에 민찬은 잠시 생각하고는 말했다.
"상처주는 친구들이었어. 분명 상처를 주기 전까지는 좋은 친구들이었는데 말이야. 사실 그게 상처였는지도 잘 모르겠어. 그 친구들은 아무 생각 없이 한 말이었겠지. 하지만 난 싫었어. 아무 생각 없이 상처 주는 게 말이야. 난.."
민찬은 얘기를 또 잠깐 멈춘 뒤 계속 얘기했다.
"그 애들이 싫어. 걔네들이랑 같이 있을 바에는 혼자 있는 게 나았어. 하지만 뭐지. 걔네들은 분명 다른 사람한테는 좋은 친구였어. 분명히 말이야. 걔네가 나한테 편하게 대하는 게 싫었던 걸까. 그냥 예민했던 걸까. 아직도 갈피를 못 잡겠어."
그렇게 얘기하고는 손으로 눈을 가렸다. 문득 예전에 동생에게 말해줬던 얘기가 생각이 났다.
"상처는 바다와 같아서"
"응?"
"댐을 쌓아서 가둬 보아도 끝없이 불어나서 위로 빠져나오게 되어 있어. 댐은 상처를 가둘 수 없어. 하지만 대믈 없애면, 비록 마을은 없어질 거야. 하지만 너희는 큰 홍수를 겪고 바다가 지나간 뒤 더 단단한 집을 짓겠지.그리고 마을을 없앴던 바다는 사라질거야."
"말만 쉬워."
"그래. 말만 쉬워. 혼자서는 이 일을 하기 쉽지 않지. 그래서 무언가가 필요한 거야. 나의 상처를 보듬어줄 사람이. 그렇게 상처를 보듬는 사람이 있으면 나중에 혼자일 때 홍수에 더 잘 대처하는 집이 생길 거야."
"만약 나 혼자라면? 곁에 아무도 없으면?"
"그래.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상처를 보듬을 사람에는 사람만이 포함되지 않아, 너에게 위로를 주는 모든 것이 포함돼. 그렇게 위로를 받다보면 넌 혼자 홍수를 해결할 수 있어."
"....."
"넌 지금 그 한 걸음을 땐 거고, 내가 친구관계에서 뭐라 할 순 없지만, 적어도 힘내라는 말을 해줄 너의 또 다른 친구는 있잖아. 혼자 끙끙 댐을 지키려고 하지 마. 누군가가 있을 때 훨씬 의지가 되니까. 그게 나 혼자서도 상처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쉬운 길이니까."
말을 끝내자 민찬이 당장이라도 울 듯한 표정으로 날 봐서 깜짝 놀랐다. 민찬은 내 곁에서 한참을 울었다. 드디어 바다가 빠져나오는 구나. 하고 아무 말 없이 민찬을 쳐다보았다. 몇 분이 지나고, 몇십 분이 지나고, 몇 시간이 지난 후에야 민찬은 울음을 그쳤다. 슬슬 걱정되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이제 카페 갈까? 애들이 다 기다리고 있는 것 같던데."
민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카페로 향하던 길에 익숙한 가게가 보였다. 초코쿠키가 나열된 가게였다. 내 동생이랑 자주 가던 곳, 그곳과 매우 닮은 곳이었다. 민찬에게 위로가 되었던 얘기가 내 동생한테도 위로가 되었을까? 아마 그 애는 제대로 알아듣지도 못했을 것이다.
'보고 싶다.'
동생이 보고 싶었다. 내 상처는 내 동생만이 보듬어줄 수 있었다. 이제는 떠나버린 내 동생이. 나와 같이 댐을 부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동생은 이제 없었다. 상처를 보듬을 수 있는 이가 없었다. 난 쿠키라도 하나 사 가야겠다고 생각하고는 민찬을 먼저 보냈다.
쿠키를 구경하면서 동생 생각이 정말 많이 났다. 동생에게 잘해주지 못한 것만 생각나서 눈물날 뻔 했지만 동생은 그럴 때마다 나한테 괜찮다고 해주는 것 같았다. 걔답지 않아서 또 눈물이 났지만 적어도 걔는 늘 내 곁에서 위로해주는 것 같았다. 난 동생이 좋아하던 쿠키를 내꺼까지 4개 샀다. 미나에게 했던 생각 때문에 미안해져서 다른 쿠키를 사주고 싶어서 한참을 뒤적거리다가 정신을 차렸다.
'아니 무슨 생각을 하는거야? 걔가 나한테 이상한 짓을 한 거잖아.'
난 황급히 초코쿠키를 골라서 산 뒤 카페를 헐레벌떡 빠져나왔다. 미나 생각은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숨을 후 내뿜는다. 다시 공기를 들이마신다. 내 옆에 있는 진짜 내 가족, 남편과 아들과 소심하고 겁 많은 고양이가 나를 살리는 공기다.
써니 -추억이 아니다. 기억이다.-
+ 민찬은 내게 그 얘기를 들은 지 몇 시간 만에 아까 전화하던 친구랑 통화했다. 민찬이 불같이 화를 내는 것 같았다. 화를 내라는 뜻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민찬의 속이 홀가분해진 걸 보니 기분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