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이 매료했던 강진의 백운동 별서정원
다산이 귀향지로 내려갔을 때 심정은 어땠을까?
다산 정약용이 유배지인 강진으로 내려왔을 때, 낯선 환경에 적응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는 곧바로 다산초당에 자리를 잡지 못하고, 먼저 강진 읍내에서 4년 동안 머무르며 여러 곳을 전전했다. 그러다 1808년 봄에 이르러서야 다산초당에 정착하게 되었다.
다산초당에 머물기 전, 그의 거처는 강진 읍내의 한 주막이었다. 현재의 사의재 건물은 당시 주막을 재현한 것이지만, 본래의 모습은 남아 있지 않다.
낯선 땅에 유배되어 외로움 속에 있던 다산을 따뜻하게 맞아준 이는 바로 그 주막의 노파였다.
그는 그곳에서 4년을 지내며 ‘사의재’라 이름 붙였다. ‘사의재(四宜齋)’는 다산의 삶의 태도와 정신을 엿볼 수 있는 이름이다.
‘생각은 마땅히 맑아야 하고, 용모는 단정해야 하며, 말은 과묵해야 하고, 행동은 조심해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유배지로만 알았던 강진의 다산초당,
정약용의 별서정원이었다.
다산이 신유박해로 유배 왔을 때 처음부터 다산초당에 머물지 않았다. 강진 동문 밖 주막이나 다른 곳에서 거처로 삼고 지내다가 8년이 지난 후 다산초당으로 옮겨 왔다. 이사하기 전, 강진 읍내 주막에서 살았던 ‘사의재’의 선비정신으로 살았다.
다산을 초당으로 초빙한 사람은 해남 윤 씨 집안의 윤규로였다. 이곳으로 이주해 와 다산은 연못을 넓히고 꽃나무를 심어 아름다운 정원을 꾸미게 되었다. 다산이 꾸민 정원, 다산초당을 다시 자세히 보고 싶다. 자세히 보아야 아름다우니까.
강진의 백운동과 다산초당은 닮은 꼴이다. 연못에 물을 끌어들이고, 꽃과 채소를 심고, 구역을 나누어 꽃과 나무를 심은 점이다.
여기서 다산은 11년 동안 지내며, 나라와 백성들을 위하여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심서> 등 500여 권의 책을 남겼던 것이다.
정원은 원림이라고도 부른다. 고산의 정원도 부용동 원림이라고 한다. 별서 정원은 관직에서 물러나 은거하는 선비들의 정원을 말한다. 오늘날의 별장이다.
별서정원의 중심은 정자다. 정자는 사방이 마루로 개방되어 있어 공간을 자유롭게 확장할 수 있다. 산과 물을 끼고 있으며 자연과 하나 되고자 하는 열망을 품고 있다. 대표적인 곳이 강진 백운동 별서 정원이다. 월출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안개가 되어 구름으로 올라간다는 백운동은 숨겨져 있는 비경이다.
이담로가 머물렀던 곳,
정선대 정자에서 바라본 월출산 풍경은 과연 백운동이 자랑하는 1 경이다.
다산이 매료했던 백운동 별서 정원의 10경을 거닐어본다.
시원한 물줄기가 흐르는 월출산 자락에 조선의 정원이 있다. 별서 정원이다.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지나가는 길가에 차밭만 보일 뿐 정원은 눈에 띄지 않는다.
숲을 헤치고 정원에 들어오면 별천지다. 하늘에는 월출산 옥판봉의 풍경이 보이고, 땅에는 여러 가지 꽃들이 피어나 주변 정자와 조화를 이룬다. 정원 옆에는 동백나무와 대나무가 시원함과 온화함을 조성해 준다. 이담로가 관직에 나아가는 것을 그만두고 여기에 정원을 만들게 된 것이다.
강진에 귀향 온 다산이 백운동에 들러 풍경에 매료되어 <백운동 12경>의 시를 읊었다. 정선대에 올라 월출산의 비경을 보고 시 한 수 읊은 것이 제1경 옥판봉이 되었다.
신선이 거닐었던 곳, 옥판봉을 여름이나 가을에 보면 더 매력적이다.
담양의 소쇄원, 완도 보길도의 부용동 원림과 함께 강진 백운동 별서 정원은 ‘호남의 3대 정원’으로 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