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하기 싫다는 아이의 투정
불행과 행복은 파도와 같다
서이초 교사의 아까운 죽음으로 인해 교사들의 프로필에는 까만 리본을 달았고, 지켜주지 못한 후배교사를 추모하는 선배교사들의 애틋한 마음을 표현하고 있는 글을 많이 접하게 된다.
모든 사람들은 행복을 추구하며 공부를 하고, 직장을 구하고, 자기 일에 매진한다.
일을 하다 보면 불가피한 악연으로 괴로움을 당하기도 하고, 관계에 집착하기도 하며, 남의 행복을 질투하기도 한다.
불행이 안착하지 못하게 이것저것 해보지만, 주위환경이 바뀌지 않으면 자신이 바뀌려고 노력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행복을 위한 결정을 내릴 권리가 있다. 그러나 그것이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못한 일이라면 자제할 줄도 알아야 한다. 행복과 불행은 순간순간 다른 이름으로 발아래 파도처럼 '쓰윽' 왔다가 '쓰윽' 가버리다가도 다시 오곤 한다.
불행의 감정에 잠식되어 있으면 순간순간 스쳐 지나가는 행복의 감정을 쉽사리 놓쳐 버리고 만다. 또한 행복의 감정에 취해 있는 사람은 자신 가까이 불행이 머리를 들여 밀여도 눈치도 채지 못하고 불행을 보내 버리곤 한다.
행복도 불행도 영원한 박제로 만들지 않는다면 파도처럼 부서져 버리는 순간의 개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생을 놓아 버린 젊은이의 선택에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나는 초등학교1학년 아이와 언성을 높여 싸웠다.
때는 태양이 미친 것처럼 폭염을 내리 쏟으며 사람들을 시험하고 있는 그즈음.
"아아~ 공부하기 싫어요"
에어컨이 켜져 있었으니 여름 짜증지수가 높아진 탓이라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아이는 책상에 앉기를 거부하며 소파에 드러눕다시피 하며 이 말만 되풀이했다.
"공부하기 싫어요"
"공부가 아니야. 이 책 재밌게 읽었어? 엄마랑 읽었어? 혼자 읽었어?"
독서수업을 공부가 아니라고 우기면서 주의를 다른 곳으로 끌어 보려는 나의 작전.
먹히지 않는다.
"공부 맞아요. 공부 싫어요. 안 앉을래요"
둘러가는 것 없이 직진형 대화.
저학년이 특허 낸 대화법이다.
속으로 '이것 봐라~귀엽네'라는 생각은 잠시.
시간을 끌면 다음 시간에 늦을 수밖에 없다. 이런 계산을 하게 되면 진심으로 화가 난다.
"선생님이 늦게 왔잖아요"
공부하기 싫은 것을 나 탓으로 돌리는 아이의 영악한 대화수법에 밀릴 수 없다는 듯이
"아니거든. 시간 맞게 왔거든. 지금 시간 끄는 건 너야. 그러지 말고 삼십 분만 재밌게 수업하자 응?"
얼래고 달래기.
아이는 심각하게 슬퍼 보였다.
"선생님은 착한 샘이었잖아요"
나를 바라보며 체념하는 듯 말한다.
"착한 샘이 오늘은 아닌 것 같아?"
"네"하면서 드디어 참았던 눈물샘이 울컥울컥 솟아난다.
"그럼 이거랑 이거만 하자"
아이는 눈물을 닦고 협상에 임한다.
"진짜요? 이거랑 이거만 하면 끝나요?"
어휘공부와 몇 가지 질문과 대답으로 수업을 마친다.
이건 직장인의 시간 때우기 수법.
내 아이 같으면 이런 날은 수업을 하지 않았겠지만 어떻게라도 수업 비슷한 거라도 하고 끝내고 싶은 직장인의 마음이 돼버렸다.
찜찜한 마음 감출 길 없던 그때.
아이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불행으로부터 훌훌 벗어나 있다.
천진난만한 아이의 표정으로 금세 돌아와 있다.
"선생님, 같이 나가요. 할머니집에 가기로 했거든요."
이렇게 행복한 표정은 또 처음이다.
엘리베이터를 같이 타고 내려갔다.
아이 어머니와 통화를 하니, "할머니집에 갈 생각에 마음이 콩밭에 갔었나 봅니다" 하고 미안해하셨다.
아이의 투정에 내 마음도 잠시 잿빛이었다는 걸 고백해야겠다. 불행의 쓰나미가 훅 끼치고 지나갔다는 것을 느끼며 가슴을 쓸어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