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바라보며 (웰다잉)
요즈음 거실에서 어린이놀이터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
그동안엔 햇볕이나 바람만 들락거리는 듯 조용했던 놀이터에 코로나19 바람에
학교랑 학원에 못 가는 예닐곱 살 된듯한 아이들이 마스크를 쓰고 책가방까지 메고 나와 돌아다닌다. 그 모습이 어찌나 웃음이 나는지 나도 시간만 나면 내다보다가 어느새 놀이터로 발길을 향한다.
옆집 젊은 엄마도 아이의 성화에 못 이겨 동생까지 업고 끌려 나왔다며 기초학습이 걱정이라고 했다. 아이가 입학식을 손꼽아 기다리느라 잘 때도 책가방을 머리맡에 놓고서야 잠이 든단다. 웃을 수만도 없는 상황이다. 놀이터에서 만난 아이를 보고 책가방에 뭐가 들었냐고 물었더니 자신만만하게 열어 보이며 자기 이름 쓴 공책과 깎은 연필이 가지런히 들어있는 필통까지 열어 보이며 밝게 웃는다. 그 모습이 어찌나 예쁜지 으스러지게 꼭 안아주니 숨 막힌다며 겨드랑이 밑으로 빠져나간다. 동화책 선물 손가락 걸고 약속했더니 손바닥을 대면서 복사도 해야 된단다.
한 뼘도 안 되는 운동화 신고 와서 내 가슴에 벅찬 기쁨을 안겨주었던 손주는 어느새 자라서 군대에 가있다. 아이들과 어울려 웃고 있는데 저쪽 그늘 밑 벤치에서 나보다 연배가 위인 듯한 노인의 초점 잃은 시선이 나와 마주쳤다. “손주 손녀 모두 커서 아이들 구경 힘드시죠?”하면서 옆에 앉았다. 그러고 보니 마스크도 안 하셨길래 마침 손가방에 있던 비상용 마스크를 드렸더니 사양하신다.”마스크는 어르신 본인보다 남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쓰셔야 되요, 설명하면서 귀에 걸어드렸다. 아이들과 나를 번갈아보시더니 “코로나에 걸리면 나라에서 장례는 치러주겠지.”하며 중얼거리신다.
언젠가 본 영화 <죽여주는 여자>에서 수갑을 차고 교도소로 들어가던 늙은 여인이 “아~ 이젠 죽는 걱정은 안 해도 되겠구나.”하며 내뱉던 독백이 생각나서 소름이 끼쳤다. 싫다는 노인을 모시고 근처 식당으로 자리를 옮겨 설렁탕 두 그릇 하고 소주 한 병 시키고 마주 앉았다. 마주하고 보니 반듯한 인상에 창백한 안색이 옛날 매일 아픈 모습만 보여준 창백했던 엄마의 모습과 비슷해서 더욱 친근감이 느껴졌다.
자녀가 없는 줄 알았더니 금쪽 같은 따님이 둘이나 있으시단다.
예쁘고 야무졌던 첫째 딸은 남편 사업자금 빌려 간 후 소식 끊어진 지 3년이 넘었고 언니한테만 돈 빌려줬다고 트집 잡던 둘째 딸은 그 후에 언니하고 잘살아보라며 발길을 끊었단다. 부모의 교육이 잘못된 것 인가, 세상이 잘못 돌아가는 것인가,
옛날이나 지금이나 효도에 관한 이야기도, 불효에 관한 이야기도, 심심찮게 들리는 걸 보니 세월 탓만 할 수도 없는 것 같다.
어느새 소주 두병을 비웠는데 정신은 더 맑아지는 듯했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수많은 상처를 만들고 또 치유하면서 치유 잘된 상처는 자부심을 느낄 수도 있었지만, 나이든 노년의 상처는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젊은 날의 상처는 몸이든 마음이든 어쩌면 세월이라는 약이 치료제가 될 수도 있다지만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자식에게서 받은 상처는 죽음 밖에는 다른 치료제가 없다 생각하시니 말이다. 이 또한 지나` 리라, 하면서 웃어넘길 수 없다는 게 문제인 것이다.
놀이터에서 아이들 보며 웃었는데 죽음을 생각하는 윗 연배의 그분을 만나서 사연을 듣다 보니 마음이 아려왔다. 내 나름 웰다잉을 염두에 두고, 당하는인생 마감이 아닌 맞이하는 죽음을 준비 중인데 말이다. 그분의 동호수를 조심스럽게 물어 수첩에 적으면서 내일 또 놀이터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헤어졌다. 그분의 따님들이 하는 일이 잘 풀려서 하루빨리 연락이 왔으면 하고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푸른 하늘을 바라보았다. 저 하늘에 떠있는 구름은 어느 구름 뒤에 비가 숨었을까, 그것 또한 우리 인생사를 닮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